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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이젠 발포명령자다②]軍 문건과 증언으로 본 사격·발포

발포 관련 간접증거 넘치지만 '스모킹 건' 부재
"발포의 역사적 흔적, 핵심자료 찾기 주력해야"

등록 2020.01.05 07:00:00수정 2020.01.05 11:5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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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이젠 발포명령자다②]軍 문건과 증언으로 본 사격·발포


[광주=뉴시스] 신대희 기자 =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집단발포를 방증하는 기록과 증언은 차고 넘친다.

5일 5·18기념재단 등에 따르면 1980년 5월20일 오후 11시 광주역과 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앞에서 3공수·11공수여단의 집단발포는 비공식 지휘체계에서 이뤄졌다는 분석과 의견이 지배적이다.

그동안 검찰 수사와 정부 조사 내용을 종합하면, 보안사령관 전두환, 특전사령관 정호용 등이 5월21일 광주를 다녀간 직후 도청 앞에서 비무장 시민을 향한 무차별 조준사격이 자행됐다. 우연의 일치로 보기에는 전후 맥락이 너무나 뚜렷하고 필연적이다.

505보안부대가 5월21일 작성해 보안사령부에 보고한 것으로 추정되는 일일속보철 '광주 소요사태'(21-57) 문건에는 '23:15 전교사(전투병과교육사령부) 및 전남대 주둔 병력에 실탄 장전 및 유사시 발포명령 하달(1인당 20발)'이라고 적혀 있다.

육군 제2군사령부의 '광주권 충정작전 간 군 지시 및 조치 사항'에 '전(全) 각하(閣下) : 초병에 대해 난동시에 군인복무규율에 의거 자위권 발동 강조'라고 명시돼 있는 점도 사실상 전두환씨가 발포 지시를 내린 정황을 선명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1980년 기갑부대사'에는 5월21일 오전 8시 전투태세인 진돗개 하나가 발령됐고, 오전 11시 각급 부대에 개인당 M16 소총 실탄 90발씩을 지급했다고 기록돼 있다.

'12·12 5·18 실록, 자위권 발동 이전의 발포 행위 일람표'에도 5월19~20일 광주역, 광주고~계림파출소 등지에서 사격 행위와 실탄 지급·통제 기록이 오롯이 담겨 있다.

이는 5월21일 도청 앞 발포 전 조직·체계적 실탄 분배가 이뤄졌고, 자위권 천명에 앞서 발포허용 명령이 있던 것으로 넉넉히 추정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육군본부 '광주소요사태분석(교훈집)' 70쪽에도 '무장 헬기가 작전기간(7일간)에 1인당 평균 59발 소모했다'고 적혀 있다.

신군부 핵심 세력들의 지휘로 발포가 이뤄졌을 것이라는 증언도 잇따랐다. 

전 505보안대 수사관, 미군정보 요원, 공군 706보안부대장 운전병 등은 5월21일 정오 전두환씨의 광주방문 직후 이뤄진 발포에 대해 한결같이 또렷이 증언했다.

"극비리에 홀로 광주를 찾은 전씨가 광주비행장에서 핵심 인사들과 회의를 했고, 헬기를 타고 서울로 돌아간 직후 도청 앞 사살 행위가 이뤄졌다"는 설명이다.

실제 '육군본부 작전교육참모부 작전상황 일지' 등에도 '5월21일 (정호용)특전사령관 외 2명이 오전 8시부터 10시20분까지 기동용 헬기 UH-1H를 타고 광주로 향했다'고 기록돼 있다.

▲공수부대 투입 과정에 작전통제권을 갖게 될 전교사령관·31사단장과 사전협의가 없던 점 ▲상급 부대 승인 없이 공수부대가 독자적으로 실탄을 분배한 점 ▲발포 관련 보고가 공식 지휘 계통에 누락된 점 ▲계엄군 간 오인 사격이 잇따른 점 등도 비공식 지휘 체계에 따른 발포를 방증하고 있다.

이에 자위권 발동 결정은 발포를 합리화시키기 위한 조처였을 가능성이 크다.

비선 라인(보안사령관-육군참모차장-특전사령관-3·7·11공수)에 의한 발포 명령과 자국민 학살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조치라는 뜻이다. 

▲집단발포 '이후'인 21일 오후 7시30분 자위권 천명 ▲자위권 발동 수칙인 하반신 사격 등 미준수(5·18 총상환자 53% 이상이 21일 이전 부상, 머리·목·가슴 등 파편) ▲공수부대원들이 검찰 조사에서 '실탄 분배, 자위권, 봉쇄 작전을 사살명령으로 받아들였다'고 진술한 점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광주=뉴시스】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곤봉과 최루탄을 동원해 시민군을 진압하는 계엄군의 모습. 정씨에 따르면 계엄군은 버스 창문을 깨고 그 안에 최루탄을 던져 넣는 수법을 썼다. **저작권자 요청으로 회원사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2020.01.05 (제공=정태원씨)

【광주=뉴시스】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곤봉과 최루탄을 동원해 시민군을 진압하는 계엄군의 모습. 정씨에 따르면 계엄군은 버스 창문을 깨고 그 안에 최루탄을 던져 넣는 수법을 썼다. **저작권자 요청으로 회원사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2020.01.05 (제공=정태원씨)

실제 김순현 전교사 전투발전부장은 검찰에서 "육군본부 전문에 작전발령호수나 발령권자의 표시 없이 '향후 광주지역 수습 작전에 대한 모든 책임을 현지 사령관에게 위임한다'고 적혀 있었다. 이를 소준열 전교사령관에게 전했다. 소 장군 얼굴이 흑빛이 됐다"고 진술했다.

이는 신군부 핵심 세력의 중요 명령(발포 등)과 책임 회피를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라고 5·18연구진은 설명했다.

전 505보안대 수사관 허장환씨는 5월20일 505보안대 통신실에서 '자위권 구사 발포 사살 합의'라고 적힌 '보고 전문'을 봤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다만, 그동안 정부 차원 조사에서 발포를 입증할 결정적 증거를 찾지 못했다. 
 
안길정 5·18기념재단 자문위원은 "증거를 남기지 않고 발포가 이뤄졌을 가능성이 매우 유력하다"며 "최근 출범한 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발포 관련 역사적 흔적과 '그 날의 진실'을 밝혀줄 자료 찾기에 주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