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독립운동가에 신민회 평안남도 총감 안태국
신민회 최고위 간부인 평안남도 총감
![[서울=뉴시스] 안태국 빈소. 2022.03.31. (사진=국가보훈처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https://img1.newsis.com/2022/03/31/NISI20220331_0000964088_web.jpg?rnd=20220331123859)
[서울=뉴시스] 안태국 빈소. 2022.03.31. (사진=국가보훈처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박대로 기자 =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안태국 선생을 2022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31일 밝혔다.
1877년 평안남도 중화(현재 평양 부근)에서 태어난 선생은 1907년 안창호, 양기탁, 노백린, 신채호 등과 함께 애국계몽운동 단체인 신민회를 조직했다. 선생은 최고위 간부인 평안남도 총감에 임명돼 1911년 해체 시까지 4년여간 국권 회복에 힘썼다.
선생은 당시 신민회 기관지 역할을 한 대한매일신보 평양지사장을 겸임했다. 그는 1909년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태극서관을 설립했다. 신민회 외곽조직인 청년학우회 발기인으로 초대 총무에 선임됐다.
1910년 11월 안명근 사건(일명 안악사건) 조사 과정에서 신민회가 간도에 독립군 기지와 무관학교 설립을 계획하고 있다는 단서를 잡은 일제는 이를 저지하려고 신민회 간부들을 체포했다. 이때 선생도 보안법 위반으로 붙잡혀 1911년 7월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일제는 이 사건을 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사건(일명 105인 사건)으로 조작해 전국에서 신민회 간부 600여명을 검거해 기소했다. 선생도 재기소돼 1912년 9월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투옥된 지 5년 만에 석방된 선생은 1916년 북간도 혼춘으로 이주해 근거지를 마련하고 독립운동을 다시 재개했다.
선생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혼춘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고 후배들과 한민회를 창립했다. 그 산하에 결사대원을 모집해 한민회군을 창설했다. 한민회군은 청산리전투에 참가했다.
선생은 안창호의 초청으로 1920년 3월 상하이 임시정부로 갔지만 임시정부 요직을 고사했다. 선생은 북간도 지역 독립운동에 매진할 뜻을 밝혔다. 안창호는 이를 받아들여 선생을 대한민국임시정부 특파원으로 파견하기로 했다. 선생은 1920년 4월 46세를 일기로 고문 후유증 등으로 병사했다.
장례식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유해는 상하이 인근 외국인 공동묘지에 안장됐다가 문화대혁명기에 만국공묘로 이장됐다.
만국공묘에 안장됐던 유해는 1993년 8월 광복 48년 만에 박은식·노백린·신규식·김인전 선생과 함께 국내로 봉환됐다. 서울현충원 현충문 앞에서 각계 인사와 외교사절, 시민 등 6000여명이 모인 가운데 국민제전으로 영결식이 열렸다.
정부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