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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복원 시비···정우영 “박대종, 자기만의 기이한 창작”

등록 2017.09.11 11:18:00수정 2017.09.11 13:5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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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①보물 제745-1호 1459년 월인석보 내 언해본 ②2007년 문화재청 언해본과 2005년 정우영 복원안. 같음 ③‘御製訓民正音’을 서명으로 할 경우의 언해본(가상)-①에서 ‘世솅宗종’을 뺀 것 ④2015년 박대종 언해본

【서울=뉴시스】 ①보물 제745-1호 1459년 월인석보 내 언해본 ②2007년 문화재청 언해본과 2005년 정우영 복원안. 같음 ③‘御製訓民正音’을 서명으로 할 경우의 언해본(가상)-①에서 ‘世솅宗종’을 뺀 것 ④2015년 박대종 언해본

【서울=뉴시스】 신동립 기자 = 정우영 교수(동국대 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가 ‘훈민정음 복원, 규칙과 진실 무시···박대종 소장 반박’(뉴시스 9월6일 보도)을 재반박했다. “최근 한 재야학자(박대종)가 논문(2015)을 통해 나름대로 언해본을 복원한 후 문화재청(2007) 언해본과 비교하면서 문화재청 정본은 실패작이라느니, 국가프로젝트를 망친 것이라느니, 건설적 논의라고 보기에는 비판의 수위가 높아 당시 연구에 참여했던 연구팀의 한 사람으로 반론(9월4일)을 하게 됐다. 그에 대해 박대종씨가 재반박함으로써(9월6일) 오늘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정 교수는 “연구를 하다보면 자기 최면에 걸려 본인의 주장이 혁신적이고 참신하며 보편타당한 진리라고 착각할 때가 있다. 그러나 새로운 견해가 학계에서 통설로 정착되는 데는 오랜 기간이 걸린다. 다양한 전공을 하는 전문가들이 공론화 과정을 거쳐 견해의 타당성이 검증될 때에서야 수용되기 때문이다. 그 시간을 단축하려면, 관련 학회에 가입해서 발표와 전문가들의 심층 토론, 그리고 투고-심사와 게재를 통해 세상에 공신력 있는 논문으로 인정받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또 “훈민정음(한글)의 원천문헌은 한문으로 된 훈민정음 해례본과 그것의 우리말 번역본인 언해본이다. 전자는 대외적인 용도의 국격을 높일 수 있는 국가간행물이고, 후자는 만백성의 교육을 위해 만든 실질적인 용도의 국가간행물로 둘은 상보적 관계에 있다. 그러나 이 두 문헌은 한민족의 대표적인 문화적 중요성에 비하면, 부분적으로 낙장이 됐거나(해례본) 훼손돼(언해본) 온전하지가 않은 상태에 있다. 따라서 학계에서는 이 두 문헌에 대한 내용 연구와 병행해 외형 연구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인식을 하고 있다. 그동안 이 방면 연구의 축적에 힘입어 2007년도에는 문화재청에서 언해본의 정본(定本) 제작에 관한 연구용역이 공고됐고, 그 사업에 국어사학회(당시 조규태 회장) 연구팀이 선정됐으며, 여러 달에 걸쳐 관련 전문가들의 연구와 토론을 거쳐 언해본의 정본 제작이라는 성과를 이룩해냈다. 2007년 연말에 언해본의 정본이 소개됐으며, 오늘날에는 다양한 분야에서 잘 활용되고 있다. 언해본 정본이 세상에 소개된 지 10년이 됐으나, 이 정본의 내용에 대해서는 결정적인 오류나 반론이 제기된 바가 없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것은 오로지 연구원들의 전문적 식견을 바탕으로, 세종 당시의 문헌제작 관례나 국어학적 연구 결과가 공식적인 채널을 통해 적절히 수렴돼 제작됐기 때문임은 두 말할 나위없는 사실이다”고 설명했다.

이어 “핵심적 논의를 위해 훈민정음 언해본과 해례본의 권두서명 문제만 가지고, 박대종 연구자의 논문 및 반박문에 나타난 주장을 요약 제시한 후, 그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기로 한다”고 전했다.

◇박대종 반론(9월6일)에 대한 재반론: 반론을 끝내며

-세종대왕 생전의 언해본에는 권두서명이 ‘御製訓民正音’(어제훈민정음)이었다.

“해례본의 권두서명(卷頭書名; 책의 첫장 머리 제목)이 무엇이었는지는 해례본의 앞 2장(4페이지)이 떨어져나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해례본 중에서 세종이 지은 글을 번역한 ‘언해본’이 1459년 월인석보(1, 2권) 앞에 붙어서 전해진다<사진1>. 따라서 이것을 객관적으로 빈틈없이 분석하면 첫장 제목을 추정해낼 수 있다. 세종 생전이므로 ‘御製訓民正音’과 ‘訓民正音’ 모두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박대종 연구자는 ‘이 제목이 아니면 실패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따라서 ‘훈민정음’이 세종 당시 제목이라고 추정한 문화재청(2007) 언해본<사진2>은 박 연구자의 주장과 같지 않기에 실패한 것이라고 평가 절하한다. 아주 위험한 전제를 하고 있다. 두 가지 가능성이 모두 있으므로, 이들을 공정하고 균형 있게 분석·검토하는 것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라고 생각한다.”

-문화재청(2007) 언해본은 본래(세종 당시) 있던 ‘御製’를 삭제해 ‘訓民正音’으로 만든 것이므로<사진2> 실패작이며 왜곡본이며 국가 프로젝트를 망친 것이다.

“‘御製訓民正音’과 ‘訓民正音’은 둘 다 권두서명으로서 가능성이 있다. 문화재청 언해본 연구팀에서는 이 둘을 가상으로 재구하여 분석·검토하였다. 두 가지 제목으로 만들어본 결과, ‘어제훈민정음’을 제목으로 하면 <사진3>과 같이 1~4행에서 완결되지 않고 제5행에 가서야 끝난다. 결국 끝장(15장)까지 모두 바뀌어야 한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나 ‘훈민정음’으로 제목을 정하면 아무 문제없이 <사진2>처럼 제1~4행에 자연스럽게 배열이 된다. 아무 문제가 발생하지 않고 논리적으로도 아주 자연스럽고 순조롭게 이해되므로, 권두서명이 ‘훈민정음’인 재구안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박대종 연구자는 세종 당시에 임금이 지은 글에는 ‘어제’가 반드시 붙어야 한다고 믿는 모양이다. 아주 간단한 질문을 하겠다. 세종대왕이 지은 글로 잘 알려진 ‘月印千江之曲’(월인천강지곡)의 책 제목은 ‘月印千江之曲’이 틀림없다. 그러면 그 책머리에 있는 제목, 즉 권두서명(또는 ‘권수제’)은 과연 무엇일까? 박 연구자가 빼서는 안 될 요소라고 강변하는 ‘御製)’가 포함된 ‘御製月印千江之曲’일까? 아니면 ‘御製’가 빠져 있는 ‘月印千江之曲’일까? 세종이 승하하시기 전에 지은 책이므로, 박 연구자의 주장대로라면 반드시 전자라야만 맞을 것이다. 그 답변이 궁금하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해례본의 권두서명이 ‘御製訓民正音’이라는 증거가 어디에 있는가? 세종실록에 나오는가? 세종실록에는 다만 ‘○是月訓民正音成御製曰國之語音~(생략)’으로 나온다. 이 기록을 박 연구자는 다음과 같다고 주장한다. ‘세종실록(1446년 9월29일) 기사에 분명히, 史官(사관)이 ’訓民正音‘ 책 서문에 쓰인 ‘御製’ 부분을 눈으로 보고 ‘이달 훈민정음이 완성되었다. 御製曰(어제왈)’이라고 국가최고공문서인 實錄(실록)에 기록을 하였다’.
 
세종실록을 찾아보라. ‘御製曰國之語音~’(어제왈국지어음)으로 되어 있지 ‘御製訓民正音曰國之語音~’으로 되어 있지 않다. 박대종 연구자는 이 문장의 ‘御製’를 ‘御製訓民正音’으로 보고 싶은 모양이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엄격하게 보기 바란다. 세종실록의 기록 원칙을 분석해보면, ‘御製’는 인용된 글[國之語音~]을 지은 사람의 직위나 성명을 대신하는 단어이지, ‘御製訓民正音’을 약칭한 것이 아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라. 이달(세종 28년9월)에 완성된 책 ‘訓民正音’을 앞에다 놓고 무엇이 그렇게 급하여 권두서명인 ‘御製訓民正音’을 모두 쓰지 않고 건성으로 ‘御製’만 기록하겠는가? 만약에 권두서명이 ‘御製訓民正音’이었다면 이 책의 겉 제목(‘訓民正音’)과는 다르므로, 史官은 역사서 ‘실록’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해 차이점을 분명히 밝혀 ‘御製訓民正音曰···’로 기록하였을 것이다. 실록의 ‘御製’는 인용된 글을 지은 사람의 직위·성명을 대신하는 용어이지 결코 권두서명 ‘御製訓民正音’의 약칭이 아니다. 이러한 사실은 ‘동국정운’과 실록 기록을 대조·비교해보면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 오히려 ‘御製曰國之語音~’은 [御製: 뒷글 지은이가 현재 임금임] + (정보없음→訓民正音) + [曰: 다음과 같다. 國之語音~]로 분석될 가능성이 크다. 책의 겉제목과 속제목이 같으므로 특별한 언급이 없었던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이 문제는 차후 논문 참조). 아무튼 ‘어제’에 관해 박 연구자가 ‘진리’처럼 믿고 있는 지식은 잘못된 것이며, 그것은 세종 당시 언해본으로 복원해보면 자연히 드러나게 돼 있다.”

-세종 승하 후에 변개된 언해본<사진1>을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하기 위해 나(박대종)는 2규칙(주; 보편적이지 않은 협주방식)을 적용하여 <사진 4>와 같이 복원하였다.

-1459년 언해본<사진1>에 있는 한자 주석((製졩는글지을씨니, 訓훈은가르칠씨오, 民민은百ㅂ·ㅢㄱ姓셩이오, 音ㆆㅡㅁ은소리니)) 4개를 모두 넣으면 총45자가 되어 1~2행에 들어가지 않고 3행으로 넘어가기 때문에 모두 삭제하였다.

“세종당시 언해본의 권두서명이 ‘어제훈민정음’이었다면, 그것에 해당하는 협주는 <사진1> 가운데 ‘世솅宗종’만 빠지고 모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정상이다. 그렇게 가상해보면, <사진3>처럼 글자수가 넘쳐나 1~4행을 넘어 끝장(15장)까지 모두 바뀌어야 한다. 따라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점이 너무 많이 발생한다. 따라서 권두서명은 ‘어제훈민정음’이 아닌 것으로 판단되므로 대상 후보에서 제외한다. 그리고 또 다른 후보 ‘훈민정음’을 적용해보았다. 그 결과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따라서 해례본의 권두서명으로 ‘훈민정음’을 택하고 이를 언해본으로 만들어 <사진2>처럼 재구·복원하였다. 그런데 박대종 연구자는, 문화재청 연구팀과는 달리, 대상 후보에서 제외된 ‘어제훈민정음’을 버리지 않고, <사진1>을 복원하기 위해(주; 정확히 말하면 본인의 가설에 맞추기 위해) 자기 나름대로의 협주 규칙(2규칙)이라는 것을 세워 <사진4>처럼 복원해냈다. 객관적으로, 주석을 뺄 아무런 이유가 없는데, 다만 자신이 세운 규칙에 맞지 않고, 특히 글자수가 1~4행에서 끝나지 않고 5행까지 넘어간다는 이유로 주석 4개(31자 분량)를 삭제해버렸다. 이것은 아주 심각한 자료 조작행위로서, 기본적인 연구윤리를 의심케 한다.”

-단어 (御製, 訓民正音. 37자) 설명만 선택해 만들면(37자) 1~2행(40자 공간)에 수용 가능한 것으로 보아, ‘진실’(주; 세종당시 언해본을 만든 진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언해본에는 협주 82개 중에서 단어(한자어) 협주 방식은 1/4~1/5 정도 분량으로 보편적인 협주 방식이 아니다. 박 연구자가 보편적인 방식인 한자 낱자 주석 방식을 택하지 않고, 굳이 단어 설명 방식을 선택한 것 자체가 보편타당성과는 거리가 있다. 그 방법을 택한 것은, 박 연구자 스스로 고백한 것처럼 ‘단어를 선택해 만들면(37자) 1~2행(40자 공간)에 수용 가능’하기 때문이다. 빈 공간에 단어만 택해 넣어보니 수용되었고, 이 과정에서 그것이 바로 세종 당시 언해본을 만든 ‘진실’이라고 알게(주;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연을 필연처럼 이해하다니 참으로 유구무언이다. <사진4>는 1~4행에 딱 들어맞는 복원안이기는 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제훈민정음’을 권두서명으로 고정시키고, 그것에 맞추고자 보편적인 방법보다는 예외적인 방법을 써서 자연스럽지 않게 만든 상상적 복원안에 불과하다.
 
어떻든 세종 당시 언해본의 두 복원안의 모양새는 갖추어졌다. 그러면 어느 것이 진실에 가까울까? 네티즌들은 그것을 판별할 수 있을까? 아마 어려울 것이다. 세상은 목소리가 크고 언변이 좋고 적극적이며 외형이 그럴 듯하면 거기에 경도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성보다는 감성에 좌우되는 매체, 그래서 학문은 연구자들이 모인 학회의 학술대회에서 갖는 것이 적격이다. 박 연구자도 학회에 가입해 그곳에서 나머지 문제를 토론하였으면 한다.
 
그러면 세종 당시 언해본의 두 복원안을 검증할 방법은 없는가? 있다. 세종 당시의 언해본이라고 복원한 두 복원안<사진 2, 4)을 역으로 검증하는 방법이다. 즉, 두 복원안의 출발문헌인 1459년 월인석보 언해본<사진1>으로 다시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먼저, 권두서명이 ‘訓民正音’인 문화재청(2007) 언해본<사진2>을 검증해보자. ①세종이 승하(1450.2.17.)하신 후, 세조가 월인석보(1459)를 편찬할 때, 만백성의 한글 교육을 위해 세종 당시 언해본을 월인석보(권1·2)의 권두에 붙이게 된다. ②세종때는 권두서명이 ‘訓훈民민正졍音ㆆㅡㅁ’이었으나, 1459년은 세조때이므로 이 글을 지은 사람의 직위와 이름을 분명히 밝혀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의 글인지 모를 수가 있다. ③그런 사항을 모두 담을 수 있는 관례적 명칭은 ‘世宗御製’, 즉 ‘世宗[묘호] + 임금께서 지으신 글[御製]’이다. 이것을 ‘訓民正音’의 앞에 붙이면 권두서명이 ‘世宗御製訓民正音’이 된다. ④세종 당시에는 없던 ‘世宗’은 기휘(忌諱) 전통에 따라 주석은 달지 않고 한자음만 ‘世솅宗종’(4자)으로 병기한다. 한자어 ‘御製’는 여기에 처음 나오므로 주석을 달되, 새로 만든 고유명사 ‘訓民正音’의 주석처럼, 한자 낱자 풀이에 이어서 이들을 모아 단어를 풀이하는 ‘製졩ㄴ·ㄴ 글지ㅿㅡㄹ씨니 御엉製졩ㄴ·ㄴ 님금 지ㅿㅡ샨 그리라’(21자)와 같은 식의 협주를 추가한다. ⑤세종때 언해본보다 25자가 새로 늘어났지만, 세종 당시의 언해본 판목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원칙을 세워 항목별 글자수를 조절·안배한다. 기본체재는 1행 16자(쌍행 32자)이지만, 이미 글자수가 넘쳐나 있다. 반드시 제1~4행에서 이들 정보를 균형 있게 처리해야 하므로, 항목을 구분해 제1행에 권두서명(16자), 제2행~3행은 그에 딸린 협주로 각각 18자(쌍행 36자)씩 넣어 배치한다. 세종 당시 언해본에는 3~4행에 걸쳐 있던 ‘서문’의 첫구 ‘國귁之징語엉音ㆆㅡㅁ이’(9자)와 그 협주(21자)를 1행 20자(쌍행40자) 공간에 넣어서 제4행에 조밀하게 안배하면 복원이 완료된다. 이렇게 하고 나니, 1459년 월인석보본 언해본<사진1>이 회복되었다. 세종 승하로 인해 ‘世宗御製’와 그에 따른 협주만 추가한 것이므로, 인과관계가 아주 명확하고 합리적인 복원안으로 평가할 만하다.
 
다음으로, ‘御製訓民正音’을 권두서명으로 삼은 박대종 복원안<사진4>을 검증해보자. ①1459년은 세종 승하 후이므로 권두서명에 ‘世솅宗종’(4자)을 추가한다. ②세종 당시에 이미 단어 설명(御製,訓民正音. 37자) 방식으로 주석이 적정화 되어 있으므로, 더 이상 추가할 주석이 없다. ③제1행의 권두서명에 ‘世솅宗종’을 앞에 붙여 완료한다. 그런데 묘호(世宗)가 추가됨으로써 협주(총 37자)가 모두 뒤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협주가 37자밖에 되지 않으므로, 세종때의 언해본 판목을 최대한 유지하기 위해 제2행을 19자(38칸)로 조절하면 협주가 완전히 수용되고도 1칸이 남는다. 이미 세종 당시 언해본에서 엄격한 규칙을 적용해 만들었으므로, 추가적으로 고려할 사항이 더 이상 없다. 이제 세종 당시 복원본<사진4>에서 1459년 월인석보본 언해본<사진1>으로 되돌리는 과정은 모두 끝났다.
 
그런데 여기 큰 문제가 발생했다. 박대종 복원안<사진4>을 가지고 1459년 월인석보본을 만들어 보았으나 1459년 언해본<사진1>이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다. 월인석보본에 있는 4개의 협주(‘製, 訓, 民, 音’ ‘製졩는글지ㅿㅡㄹ씨니~音ㆆㅡㅁ은소리니’까지 총31자)가 여기에는 모두 빠져 있는 것이다. 이를 추가할 수 있는 무슨 명분이 있는가? 그동안 박 연구자는 <사진1>을 토대로, 세종 당시의 언해본을 복원하기 위해 2015년 이전부터 무진 노력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언해본 복원안 연구의 출발점인 <사진1>로 회복되지 않는 결과물이 나왔다. 결국, 그동안의 연구를 통해 박대종 식 복원안은 만들었지만<사진4>, 정작 1459년 월인석보본으로 되돌리는 검증 과정에서 이 세상에는 없는 ‘희귀한 창작언해본’이 만들어지고 말았다.”

-세종 당시 언해본은 박대종 언해본<사진4>이 맞고 문화재청 언해본<사진2>은 실패작이다.

“이제 이 논전을 모두 마무리하고자 한다. 박대종 연구자를 비롯하여, 우리나라에는 ‘해례본’에 애정을 가진 무수한 또 다른 ‘박대종’ 연구자들이 계신다. 그분들이 계시기에 ‘해례본’ 연구는 계속될 것이다. 그동안 박 연구자가 논문(2015, 2016)을 통해 학계와 관계 기관에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는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던 점에 감사드린다. 그러나 자신이 연구하여 틀림없다고 믿더라도, 이와 같은 매체를 통해 논전을 벌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메시지 전달력은 빠르지만 다양한 학문적 논의를 신중하게 고려하기가 아주 부적절하기 때문이다. 특히 공식적인 검증 과정을 거치지 않은 자기만의 ‘新奇(기이)한’ 주장을 근거로 하여, 공신력 있는 연구진에 의해 제작되고 학계의 오랜 검증 과정을 거쳐 통설로 수용되고 있는 업적을, 국가기관·관련 연구진의 ‘실패작, 왜곡본, 국가프로젝트를 망친 것’ 등등으로 폄하하면서 기사화에 열을 올리는 것은 명예훼손을 넘어 악업(惡業)을 짓는 일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해례본을 연구해 인문학의 발전에 무슨 기여를 하겠는가? 오늘날 인문학은 관련 전문가들의 심사를 거쳐 ‘우수한 논문’으로 평가를 받더라도 한 줄의 신문기사로도 다루어지지 않는 세상이다. 박대종 연구자가 진정으로 한국의 어떤 연구자보다 탁월한 ‘훈민정음’ 연구 성과를 이룩해냈다고 자부하거든,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활동하는 관련 학회의 학술대회에 나와서 심도 있는 토론을 거쳐 공개 검증을 받아보라. 훈민정음 해례본은 대한민국의 국보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다. 이것의 정본을 빈틈없이 정확하게 제작해보자는 취지의, 건설적이고 대안이 있는 학문적 논의라면 어느 누가 거부하겠는가? 부디 후속 논문은 본격적인 학문의 장에서 만나 진정한 토론이 깊이 있게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정우영 교수는 “아직도 박대종 언해본이 맞고, 문화재청 연구팀이 만든 복원안이 실패작이라고 생각하는가”라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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