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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영화 ‘일대종사’ 왕자웨이 감독, 중국정부와 타협했나

등록 2013.08.20 07:01:00수정 2016.12.28 07:5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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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김태은 문화전문기자 = 왕자웨이(55·왕가위) 감독이 쿵푸 영춘권의 대가인 실존인물 엽문(1893~1972)을 소재로 한 ‘일대종사’로 6년 만에 돌아왔다.  tekim@newsis.com

【서울=뉴시스】김태은 문화전문기자 = 왕자웨이(55·왕가위) 감독이 쿵푸 영춘권의 대가인 실존인물 엽문(1893~1972)을 소재로 한 ‘일대종사’로 6년 만에 돌아왔다.

 소설계의 무라카미 하루키(65)와 더불어 1980~90년대 아시아를 대표하는 스타일리스트의 귀환에서 가장 궁금한 것은 중국정부와의 관계다.

 1997년 영국령 홍콩의 중국반환 때 가장 타격을 입은 분야 중 하나가 홍콩 영화계다. 전성기를 이끈 감독과 배우들이 부랴부랴 캐나다 등지로 이민하거나 할리우드 진출을 택하며 와해되는 듯 했다. ‘첨밀밀’로 유명한 첸커신(51·진가신)은 2008년 ‘명장’ 홍보차 내한해 “홍콩 영화가 잘 안 된 것은 이미 1991~92년 시장을 잃었기 때문이다. 개방 후 중국이 가장 큰 시장이다. 홍콩 영화 제작비의 50%를 중국에서 거둬들이고 있다”며 극구 부인하기도 했다. 청룽(59·성룡)처럼 친중국 성향을 보이며 성공적으로 안착한 영화인도 있기는 하다. 중국의 국정자문기구인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의 일원으로 출세한 청룽에게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중국정부에 큰 불만을 품고 있는 홍콩팬과 여러 홍콩영화인들이 충격을 받았다는 소식도 전해진다.

 세계적인 감독으로 떠오른 왕자웨이는 홍콩반환 후 홍콩영화산업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면서 중국당국과 종종 불화를 일으키고 있다는 뉴스만 들려왔다. 동성애를 다룬 ‘해피투게더’(1997)는 중국 본토에서 개봉하지 못했고, 이후 베이징에 머무르는 홈리스들의 사랑이야기로 알려진 ‘북경지하’라는 영화를 계획했으나 1998년 톈안먼 광장에서 크랭크 인하자마자 검열로 촬영이 중단됐다. 량차오웨이(51·양조위)와 장만위(49·장만옥)를 기용해 찍은 필름은 폐기됐다는 얘기도 나온다. 결국 왕자웨이 감독은 스토리는 물론 제목도 ‘화양연화’(2000)로 바꾸고 홍콩과 방콕, 앙코르와트를 배경으로 촬영을 마쳤다.

 중국의 1국2체제 방침으로 홍콩 자치권이 만료되는 해인 2046년이 연상되는 영화 ‘2046’(2004)을 궁리(48), 장쯔이(34) 등 대표적 중국여배우들까지 동원해 촬영한 후 주요 활동무대를 유럽으로 옮긴다. 그러나 주드 로(41)와 싱어송라이터 노라 존스(34)를 출연시킨 영어 영화 ‘블루베리 나이츠’(2007)는 별다른 호응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그렇게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다.

【서울=뉴시스】김태은 문화전문기자 = 왕자웨이(55·왕가위) 감독이 쿵푸 영춘권의 대가인 실존인물 엽문(1893~1972)을 소재로 한 ‘일대종사’로 6년 만에 돌아왔다.  tekim@newsis.com

 1958년(일설에는 1956년생이라고도 한다) 중국 상하이 태생으로 문화혁명이 일어나기 전인 1963년 부모를 따라 홍콩에 정착할 수 있었던 왕자웨이는 어떤 식으로든 중국에 부정적인 감정을 지닐 수밖에 없다. 1966년부터 10년 간 중국 최고지도자 마오쩌둥이 주도한 극좌 사회주의 운동인 문화대혁명으로 국경이 막히면서 형과 누나와 만날 수 없게 됐다. 홍콩 통용어인 광둥어를 몰랐던 왕자웨이는 어머니와 함께 영화관에서 주로 시간을 보내며 고독한 성장기를 보냈다고 한다. 홍콩이공대에서 그래픽디자인을 공부한 그는 2년 수료 후 홍콩방송사 TVB가 운영하는 프로덕션 트레이닝 코스를 밟고 방송작가로 업계에 첫발을 내딛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홍콩으로 오지 못했다면 세련되면서도 개인주의적이며 퇴폐적 도시미를 지닌 그의 영화세계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일대종사’가 6월16일 서울에서 열린 중국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며 중국 광전총국 장홍센 영화관리국장, 엽문 역 량차오웨이, 궁이 역 장쯔이와 함께 온 왕자웨이 감독의 표정은 작품 속 인물들처럼 진지했다. 선글라스를 낀 채 심각한 표정을 한 그는 자리가 자리인만큼, 뜻밖에도 친정부적이고 중화적 민족주의 성향의 말을 꺼냈다. “중국영화계가 예술인들에게 그 이상을 실현하고 관객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많은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민족의 특색을 되돌아보고 거기서 특성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발언들이다.

 홍콩출신 량차오웨이는 만다린(베이징어)이 서툰 탓일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수줍어하고 말수가 적어 경직돼 보였다. 장쯔이 만이 거칠 것 없는 태도로 환한 미소를 지었다. 재벌과 연루, 고위관리 성상납 루머가 나돌 정도로 중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여배우다운 자신감이 언행에서 뿜어져나왔다. 엽문을 주인공으로 한 ‘일대종사’에서 분량이 대폭 늘어난 것도 그만큼 입김이 세다는 증거라는 얘기도 있다.

 2008년 착수, 3년의 촬영기간을 거쳐 선보인 ‘일대종사’(영어제목 ‘The Grandmaster’)는 ‘한 땀 한 땀 장인의 손길’로 만들어진 영화다. 왕자웨이는 자신이 추구하는 비주얼리스트로서의 미학적 정점을 보여주고 있다. 엽문의 일대기라는 뼈대만 빌렸을 뿐 왕자웨이는 스스로 ‘그랜드마스터’가 되고자 했다. 휙휙 나는 요란한 무술을 기대해서는 절대 안 된다. 왕자웨이의 또 다른 액션 영화 ‘동사서독’(1994)이 국내 개봉했을 때 욕을 하며 중간에 영화관을 나가던 한 떼의 젊은 남자들을 기억한다. 무협을 빌려 철학과 기억의 문제, 삶과 사랑을 이야기하는 그의 영상미 넘치는 작품을 치고 받고 나는 쿵푸영화로 알고 온 사람들일 것이다.

【서울=뉴시스】김태은 문화전문기자 = 왕자웨이(55·왕가위) 감독이 쿵푸 영춘권의 대가인 실존인물 엽문(1893~1972)을 소재로 한 ‘일대종사’로 6년 만에 돌아왔다.  tekim@newsis.com

 특유의 슬로모션으로 손놀림 발놀림 하나하나까지 세심하면서도 우아하게 만들어내고 배우들에게 사소한 동작까지도 완벽하게 요구하면서, 한 시퀀스를 찍는데 한 두 달을 소비하는 것은 기본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눈빛, 표정, 시선의 마주침, 우중 대결신에서 물방울이 튀는 미세한 영상과 눈꽃송이의 날림, 색감까지 한 컷 한 컷 미장센을 추구한 걸작이 완성됐다. 그러다보니 배우들과의 불화설은 기본이었다. 엽문의 아내 장영성 역을 맡은 송혜교로서는 1년여를 참여했는데 6분 남짓 밖에 안 나온다니 진이 빠질 만도 하다. 량차오웨이, 장쯔이와도 출연분량과 촬영일정을 놓고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

 급기야 지난 1월 중국개봉을 앞두고 중국어권 매체들은 량차오웨이가 극중 비중이 현저하게 줄어든 것에 분노하고 왕자웨이 감독과 결별할 것이라고 지인들에게 털어놓고 있다는 보도를 내놨다. 두 차례 골절상을 입을 정도로 수년 간 헌신했으나 일선천 역의 대만배우 장첸(37)과의 대결 장면 등이 대폭 잘려나가고 오히려 장쯔이가 주연인 것처럼 표현됐다는 것이다. 이를 부인하기 힘든 것이 실제 영화에서 궁이 역은 어린 시절 회상장면까지 공을 들여 나왔지만, 팔극권을 연마해 팔극권 겨루기대회에서 우승까지 했다는 장첸은 의아할 정도로 비중이 적어 불균형적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사실 중국은 쿵푸에 대해 할 말이 없다. 문화혁명시절 무술가들을 탄압해 본토에서는 무협의 명맥이 거의 끊기다시피 했다. 극중에서처럼 1949년 공산주의 혁명을 피해 홍콩으로 이주한 엽문의 영춘권, 일선천의 팔극권 등 만이 살아남았다. 궁가 64수도 궁이의 사망으로 후계가 단절된다. 잘 알려져있다시피 세계적인 액션스타 브루스 리(이소룡)는 엽문에게 영춘권을 습득하면서 유명해진다.

 본래 왕자웨이는 사회현실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감독이 아니었다. 그래도 ‘일대종사’는 일종의 역사물인데 역사적 배경에 대한 설명이 거의 생략됐다. 중국정부를 의식한 탓일까, 모든 팩트는 애매하게 이미지즘에 가려버린다. 정 필요한 사실은 그저 자막으로 간단하게 설명되거나 흑백사진 한 컷으로 여운을 남길 뿐이다. 외적 검열과 이를 의식한 자기 검열이 이야기를 붕 뜨게 만들었을까, 의문이 남는다.

【서울=뉴시스】김태은 문화전문기자 = 왕자웨이(55·왕가위) 감독이 쿵푸 영춘권의 대가인 실존인물 엽문(1893~1972)을 소재로 한 ‘일대종사’로 6년 만에 돌아왔다.  tekim@newsis.com

 그래도 ‘역사왜곡’을 시도하며 2008년 홍콩에서 만들어진 드라마 ‘엽문’보다는 낫다. 예웨이신(49·엽위신) 감독이 연출하고 전쯔단(50·견자단)이 타이틀롤을 맡은 이 드라마의 에피소드들은 거의 픽션이다. KBS를 통해 국내에서도 방송된 이 드라마는 엽문을 마치 항일투사인양 묘사했다. 엽문과 일선천이 중국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의 적이었던 국민당 소속 경찰로 대일항전에 간여한 것은 맞지만, 일본 장군과 대결을 벌일 정도로 대단한 민족주의자로 포장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왕자웨이는 이 부분을 아예 건너뛴다. 희미한 일장기를 배경으로 일본군에 투항해 득세한 마삼 일당과의 대조만 드러낼 뿐이다. 엽문이 일본군에게 집과 재산을 빼앗기고 항일전쟁 중 두 딸을 잃었다고만 언급한다. 홍콩으로 피신 이후 언젠가는 고향인 포산(佛山)으로 돌아가리라 여겼지만 국경이 막혀버려 아내와도 영원히 결별하게 된다.

 왕자웨이의 외로움과 허망함의 기조는 더욱 커졌다. 손아귀에 쥐었던 한줌 모래가 빠져나가듯 흘러가버린 세월에 대한 아쉬움은 과거 홍콩에 대한 그리움일까, 표현의 자유를 제약받고 민주주의의 퇴보를 절감하고 있는 홍콩인으로서의 절망감일까. 각본까지 맡은 왕자웨이가 쓴 “권법에 남북이 있지만 나라에 남북이 있겠습니까”라는 대사는 중국인과 일체감을 느끼도록 정체성을 수정해가는 스스로를 반영한 것일까. 22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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