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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세종 아닌 신미가 창제?…‘원각선종석보’는 위작

등록 2016.05.03 08:47:45수정 2022.10.13 11: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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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강상원 박사가 공개한 ‘원각선종석보’ 사본집. 옛 책의 판심이 없고, ‘권 제 일’이 ‘제 일 권’으로 돼있으며, 1459년 간행된 ‘월인석보’의 고딕 글씨체로 적혀있다.

【서울=뉴시스】강상원 박사가 공개한 ‘원각선종석보’ 사본집. 옛 책의 판심이 없고, ‘권 제 일’이 ‘제 일 권’으로 돼있으며, 1459년 간행된 ‘월인석보’의 고딕 글씨체로 적혀있다.

【서울=뉴시스】신동립 기자 = ‘훈민정음’은 세종대왕(1397~1450)의 발명품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특히 신미(信眉·1403~1480) 대사가 훈민정음을 창제했다라는 주장이 불교계 일각을 중심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한글창제 시기 8년 더 빨랐다?…원각선종석보 논란’(2013년 10월7일 뉴시스 충북 보은)에 따르면, 조선 세종태학원 총재인 강상원 박사는 ‘신미대사와 훈민정음 창제 학술강연회’에서 훈민정음 창제 시기(1443)보다 8년 앞선 정통(正統) 3년(1435)에 한글과 한자로 된 ‘원각선종석보(圓覺禪宗釋譜)’라는 불교 고서가 신미대사에 의해 출간됐다고 주장했다. 이 기사에 대해 국어문화운동실천협의회 이대로 회장은 “훈민정음을 조금만 아는 사람이라면 저 복사본이란 것이 1446년 한글창제 뒤에 만든 것이란 것을 알 수 있고 가짜란 것을 알 수 있다”고 즉각 지적했다.

 이후 ‘한글, 세종대왕이 만든 것 아니다’라는 주장을 정리한 보도(2014년 10월8일 뉴시스 신동립 잡기노트)가 나왔다.

 불교승려 신미의 속명은 김수성인데, ‘영산김씨 대동보’는 “집현전에는 불교를 배척하는 학자들이 있었다. 세종은 한글을 오랫동안 지키고 스님을 보호하기 위해 신미대사가 실제 한글을 창제했다는 사실을 밝힐 수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미는 과거 ‘충북 역사·문화인물’로도 선정됐다. “범어에 능통해 훈민정음 창제의 주역을 담당”했다는 이유에서다. 작가 정찬주씨는 장편소설 ‘천강에 비친 달’을 통해 같은 주장을 폈다.

 신미가 아니라 난계(蘭溪) 박연(1378~1458)이 훈민정음을 창제했다는 주장도 있다. 밀양박씨 난계파 후손 박희민씨는 ‘박연과 훈민정음’에서 “세종 5년(1423) 3월23일 문헌 연구를 시작해 9년 6월23일 훈민정음을 창제하자는 상소를 올리고 21년 4월24일 훈민정음 창제를 완료했으며 25년(1443) 12월30일 훈민정음 창제를 공표했다”는 박연의 일지를 제시한다. ‘율려신서’와 ‘홍무정운’ 등 운서에 정통하고, 사성칠음을 완벽히 이해하고 있으며, ‘난계유고’의 1번 소에서 ‘널리 가례와 소학, 삼강행실을 가르치고 오음정성으로 풍속을 바로잡자’면서 ‘훈민오음정성이정민풍(訓民五音政聲以正民風)’을 주장한 박연이 훈민정음의 진정한 창제자라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우선, 신미 대사설.

 4성 7음 28자 체계의 훈민정음 창제자는 훈민정음 해례본 어제 서문의 “新制二十八字”(신제28자)가 증명하듯 의심할 바 없이 세종대왕이다. 해례본 정인지 서문 “계해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정음 28자를 처음으로 만드셨다”, 조선왕조실록 1443년(계해·세종25) 12월30일자 기사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으셨다”, 그리고 1444년 2월20일 반대파인 최만리 등의 상소문 중 “신 등이 엎드려 보옵건대, 언문을 제작하신 일이 지극히 신묘하시옵니다”로도 증명된다.

 원각선종석보는 자체가 위작이다. 

 1. 원각선종석보 복사본의 세로줄에 판심(版心)이 없다. 옛 책에서 책장의 가운데를 접어서 양면으로 나눌 때 접히는 가운데 부분으로 제목과 페이지(‘엽’이라 함) 숫자 등이 표시된다. 그런데 이 복사본에는 아무 표시도 없는 까만 세로선만 그어져 있다. 위작이라는 증거다.

 2. 원각선종석보가 세종대왕 당대의 책이라면 당연히 ‘卷第一’(권제1) 또는 ‘卷一’(권1)이라고 쓰여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대식 어법인 ‘第一卷’(제1권)으로 표기돼있다. ‘용비어천가’에는 ‘卷第一’, 신미대사 등이 교정한 ‘능엄경언해’에도 ‘卷第一’(97장 뒷면)로 돼있다.

 3. 서체의 시대도 맞지 않다. ‘正統(정통) 3년’은 1438년으로 훈민정음 창제연도인 1443년(정통8)보다 8년이 아닌 5년이 앞선다. 훈민정음 해례본(1446)에 나타나는 훈민정음 최초의 서체는 모음에 둥근 점인 속칭 ‘아래 아(ㆍ)’가 쓰였다. 그러다가 필기의 편의를 위해 1447년에 간행된 용비어천가에서는 ‘ㆍ’를 제외하고는 둥근 점이 모두 짧은 선으로 변했다. 1459년(세조5)의 ‘월인석보’에서는 둥근 점조차 변형된 고딕체가 됐다. 따라서 1459년의 나중 서체가 1438년(정통3)에 쓰여 있는 원각선종석보, 그것도 복사본이 진품이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4. ‘목슴’은 ‘목숨’의 오기다. 세종대왕 때부터 현재까지 우리말에서 ‘목숨’의 바른 표기는 줄곧 ‘목숨’이었다. 용비어천가, 월인석보, 법화경, 아미타경언해 모두 ‘목숨’으로 기록하고 있다.

 5. ‘주소셔’(give)의 ‘주’자 표기도 잘못돼 있다. 모음 부분에서 짧은 세로선으로 그어져야 할 부분이 원각선종석보 내 다른 글자들과는 달리 ‘ㆍ’자로 잘못 표기됐다. 위작자가 정신이 없었음을 드러낸다.

【서울=뉴시스】훈민정음 서체의 변화. 왼쪽은 ‘용비어천가’ 권1, 1장 뒷면·오른쪽은 ‘월인석보’ 권1 월인서 앞면이다. 둥근 점의 아래아가 모두 변형된 월인석보의 고딕서체가 ‘원각선종석보’와 비슷하다.

【서울=뉴시스】훈민정음 서체의 변화. 왼쪽은 ‘용비어천가’ 권1, 1장 뒷면·오른쪽은 ‘월인석보’ 권1 월인서 앞면이다. 둥근 점의 아래아가 모두 변형된 월인석보의 고딕서체가 ‘원각선종석보’와 비슷하다.

6. 첫줄 마지막 글자 ‘夭’의 독음이 어처구니없게도 한 줄 건너 다음 칸에 쓰여 있다. 첫 번째 ‘夭’의 다음 글자에는 그 독음과 전혀 상관없는 ‘애’가 적혀 있고, 바로 이어서 두 번째 ‘夭’자가 나타난다. 읽는 이들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게끔 편집이 난잡하다. ‘夭閼’(요알)이란 말은 ‘꺾다’ 또는 ‘일찍 죽다’라는 뜻인데, 이 복사본에는 ‘방울로 떨어지다’라는 뜻의 옛말 ‘처디다’(처딜씨라)가 기록돼 있다. 파탄이 여럿이다.

 7-8. ‘化’자 밑에 독음인 ‘화’자가 없다. 또한 ‘良’자 밑에도 꼭지 있는 동그라미(ㆁ)의 독음인 ‘량’자가 보이지 않는다. 원각선종석보 복사본의 설명문 속 모든 한자들은 1448년 편찬된 ‘동국정운’식 한자음 표기를 따르고 있는데, 다른 한자들과 달리 ‘化’와 ‘良’자 밑에 독음이 없다. 위작을 하는 과정에서 빠뜨린 탈자들로 보인다.

 9. ‘習’자 밑에 세종대왕 당시의 표기음인 ‘씹’(이때의 ㅆ은 된소리가 아니라 긴소리)이 적혀있지만, 입성임을 나타내는 글자 왼쪽의 ‘점 하나’가 없다. 이 또한 위작 과정에서 저질러진 실수로, 다른 입성 글자들(閼, 毒, 惡, 覺)에는 모두 ‘한 점’의 입성 표시가 돼있다.

 대종언어연구소 박대종 소장은 “원각선종석보 복사본은 같은 서체의 월인석보에 비해 글씨가 삐뚤빼뚤하고 크기가 균일하지 않음은 물론, 전체적으로 조악하다. 진본도 없이 복사본만 있다는 원각선종석보는 현대인에 의한 위작임이 분명하다. 신미대사는 훈민정음이 창제된 이후에 불경을 훈민정음으로 언해하는 과정에서 공을 세운 분일뿐”이라고 밝혔다.

 다음, 박연설.

 우리나라 3대 악성(樂聖) 가운데 한 사람인 박연이 훈민정음 창제자라는 주장의 핵심은 1822년 박연의 글을 모아서 엮은 시문집 ‘난계유고’에서 비롯된다. 난계의 소(疏) 39편 가운데 조선왕조실록에 기재돼 있지 않은 것은 3개다. 이 중 날짜를 알 수 없는 1번 소의 마지막 부분 ‘훈민오음정성이정민풍’이 곧 박연이 훈민정음을 창제했다는 근거라는 것이다. “훈민오음정성…이 말을 줄이면 훈민정음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훈민정음의 ‘정음’이 ‘아, 설, 순, 치, 후, 반설, 반치’의 7음에 기반한 음운·언어학 용어임에 반해, ‘오음정성’은 동양 음악용어인 5음(궁상각치우)을 표현한 말이다. 주나라 태공망이 지은 ‘육도(六韜)’의 용도편(龍韜篇)이 출처다. 전쟁에서 율음(律音) 소리가 승부를 결정짓는 요소인가라는 무왕의 질문에 강태공이 답한다. “심오하도다. 왕의 질문이여! 무릇 율관은 12개가 있는데 그 요체는 5음이 있는 바, 궁상각치우로 이것이 그 정성(正聲)이며 만대가 흘러도 바뀌지 않는 것입니다.”

 오음정성이 음악에 한정된 용어라는 사실은 1432년 8월28일자 세종실록 기록에서도 입증된다. “황희·맹사성·권진·허조·정초 등이 아뢰기를…‘문헌통고(文獻通考)’를 살펴보건대, 대성부(大晟府)는 일찍이 1현(絃)·3현·7현을 폐지하고 다만 5현만 보존하였다고 하니, 그것이 오음의 정성을 얻어 여러 금(琴)보다 가장 우수했기 때문입니다.”

 훈민오음정성이정민풍이 기재된 난계유고 1번 소에서도 그것은 음악용어임이 증명된다. “더욱이 나라의 전례(典禮)도 바르지 못할뿐만 아니라 회례(會禮)의 음악에서도 바른 거동을 보지 못하겠고, 창우(倡優)와 여악(女樂)의 진퇴나 연희에서도 삼강의 행실을 볼 수가 없습니다. 풍속이 아름답지 못하고 음악 또한 바르지 못하여 미풍양속이 그릇되게 뒤섞여 있습니다.”

 훈민정음 어제 서문을 75년 만에 복원한 사계의 권위인 박대종 소장은 “이처럼 소를 쓴 날짜도 없는 음악인이 쓴 음악용어를 가지고, 세종대왕이 박연의 훈민정음 창제를 가로챘다고 주장하는 것은 착각을 넘어 큰 잘못”이라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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