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년 전 오늘④]'피의 금남로' 광주시민 향한 계엄군 집단발포
【광주=뉴시스】배동민 기자 = 오는 18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제37주년 5·18민주화운동 정부 기념식이 열린다. 사진은 1980년 5월21일 광주 동구 금남로를 가득 메운 시민들. 이날 계엄군은 집단발포를 자행, 수없이 많은 시민들이 쓰러졌으며 항쟁기간 가장 많은 사상자를 냈다. 2017.05.14. (사진=5·18기념재단 제공) [email protected]
오후 1시 정각, 전남도청 건물 옥상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졌고 동시에 요란한 총성이 터져 나왔다. 공수부대원들이 '엎드려 쏴' 자세로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집단발포를 시작했다.
시민을 조준한 집단 발포는 10분간 계속됐다. 금남로는 피로 물들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태 앞에 시민들은 넋을 잃고 분노와 공포감으로 치를 떨었다.
계획된 학살이었다.
이날 오전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광주사태 담화문'을 발표하고 "5·18은 불순분자 및 (고정)간첩들의 파괴·방화·선동"이라고 강조하며 계엄군의 자위권을 강조했다. 사실상 발포명령이 이미 내려졌음을 암시한 것이다. 이후 오전 10시10분께 도청광장에 있던 공수부대에 실탄이 지급됐다.
5·18 최초 발포는 1980년 5월19일 오후 4시50분 광주 동구 계림동 광주고등학교 앞 도로에서 이뤄졌다. 계엄군 장갑차가 시위 군중에 포위되자 시민을 향해 총을 쐈고 조대부고 학생 김영찬군이 총상을 입었다.
7공수에 이어 광주에 증파된 11공수여단 병력도 이날부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잔인한 살육전을 벌였다. 노인과 아주머니, 여학생, 버스기사 등이 이들에 의해 쓰러졌다.
이를 목격한 모두가 분노했고 대학생뿐만 아니라 광주 시민 수만 명이 금남로를 메웠다. 하지만 신군부는 20일 공수부대 철수 대신 3공수여단 5개 대대를 더 투입했다. 광주시내에 투입된 공수부대 총원은 3400여명으로 불어났고 이들은 작전명처럼 '화려한 휴가'를 보냈다.
【광주=뉴시스】배동민 기자 = 오는 18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제37주년 5·18민주화운동 정부 기념식이 열린다. 사진은 1980년 5월 계엄군에 의해 숨진 광주 시민들의 시신이 안치된 상무관 모습. 2017.05.14. (사진=5·18기념재단 제공) [email protected]
시민들은 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계엄군의 총격에 대항하기 위해 총이 필요했다. 예비군 무기창고에서 노후한 카빈소총 등을 확보하고 무장했다. 무장시위대는 광주시민들에게 자연스럽게 '시민군'으로 불리었다.
21일 오후 3시20분 시민군이 계엄군의 사격에 응사하면서 시가전이 벌어졌다. 특수훈련을 받은 정예 공수부대와 전투를 벌이며 많은 사상자가 났다. 광주 시내 모든 병원은 총상환자로 가득 찼다. 부상자와 시체들이 병원으로 실려 왔다. 의약품이나 일손도 태부족이었다. 병원 앞에는 시위 대열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한 시민들이 헌혈을 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어린아이까지 팔을 걷고 달려왔다.
많은 사상자가 났지만 무장한 시민들은 포기하지 않고 도청으로 끊임없이 압박해 들어갔다. 결국 계엄군은 오후 5시30분 M60 기관총을 난사하면서 퇴각하기 시작했다. 시민군은 광주교도소를 제외한 광주 전 지역에서 계엄군을 몰아내고 승리를 쟁취했다.
그러나 계엄군 퇴각은 한편으로는 전술적인 작전이기도 했다. 계엄군은 이미 '광주지역 봉쇄-내부교란-최종진입'이라는 단계적 작전개념을 수립하고 있었다.
[email protected]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