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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임종헌의 재판 지연과 '절차적 만족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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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3-29 14:3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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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박은비 기자 = 최근 만난 한 부장판사로부터 장기 미제 사건을 처리한 경험을 들었다. 민사 사건이었는데 원고인 당사자가 선고만 하면 자살하겠다고 했다고 한다. 변호사도 없는 나홀로 소송이었다.

이 부장판사는 억울해하는 원고가 하는 이야기를 다 들어드릴 테니 하고 싶은 말씀 하시라고 하고, 매달 한 차례 1시간씩 정제되지 않은 원고의 변론을 들었다.

하는 말을 다 들어주고 보니 사건을 처음 접할 당시는 봄이었는데 어느새 겨울이 됐다. 인사가 난 다음 4번째 재판부로 넘길수는 없다는 생각에 내용을 가장 잘 아는 판사가 판결을 하는게 낫지 않겠냐고 설득했다.

결론은 패소였다. 원고의 긴 이야기를 듣기 전 결론과 동일했다. 하지만 항소하지 않았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없었다. 수시로 송사를 일삼는 사람이었는데, 이 재판만큼은 '절차적 만족감'이 있었던 것 같다.

구속 만기 개념이 없는 민사 사건이지만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진행이 지지부진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사건이 떠올랐다. '내 식구 감싸기'라는 비판을 듣지 않기 위해서인지 그 어떤 재판부보다 진행이 꼼꼼하고 신중하다.

임 전 차장은 판사 생활을 30년을 한 베테랑이다. 자신보다 10기수 후배인 재판장이 무슨 고민을 할지 훤히 꿰뚫어 보고 있다. 임 전 차장의 동료였던 법원장 출신 변호사 등이 구치소 접견을 와서 조언도 한다고 한다.

이 사건은 본격적인 증인신문을 시작하기 전인데, 공소사실 인정 여부, 증거 인정 여부를 다투는 것 만으로도 하루종일 재판을 한다. 임 전 차장이 100명이 넘는 후배 법관들의 진술조서를 증거로 쓰겠다고 동의하지 않으면 증인신문은 불가피하다. 증인들이 정해진 기일에 나와 증언할지도 미지수다.

이쯤되면 피고인인 임 전 차장이 재판을 쥐락펴락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임 전 차장은 "가능하면 동의해서 출석 부담을 덜어드리는게 선배 법관으로서 도리다 생각했는데, 조서를 읽어가면서 과연 동료라고 생각한 판사인가 울분을 느낄 때가 많았다"고 주장했다. 피고인의 권리가 아니라고 할 생각은 없다.

다만 자신보다 늦게 기소된 양 전 대법원장 등 상관보다 먼저 선고받기 싫어 펼치는 지연 전략이 아니라면 적어도, 조금이라도, 사법농단 중간 책임자로서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주기를 바란다.

임 전 차장은 검토해야 할 기록이 많아 제대로 변호할 수 없다며 변호인단이 항의성으로 대거 사임한 뒤 변호사 2명을 새로 선임했지만 사실상 셀프 변론을 한다. 기록이 방대해서 그렇지 어떻게 하면 사안의 핵심을 짚고, 자신에게 유리한 변호를 할 수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안다.

"피의사실 관련 조항을 형해화 시켜 장식적 규정으로 전락", "합리적인 해석론을 통해 그 한계를 분명히 선언", "적법절차에 의한 사법적 통제를 가할 필요성" 등 임 전 차장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기록으로 남고 있다. 법정은 유려한 말솜씨를 뽐내거나 해박한 법률 지식을 자랑하기 위한 장이 아니다.

앞서 말한 원고는 재판장을 잘 만난 경우지만, 그동안 사법부는 얼마나 사건 당사자들의 방어권 보장을 위해 기본 원칙을 찾았던가. 쌓여가는 미제 사건을 신속하게 처리하기 위해 외면한 당사자는 없을지 모르겠다. 누구보다 법률전문가인 임 전 차장에게도 하고 싶은 말을 다 해야만 하는 절차적 만족감이 필요한 걸까.

 silverline@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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