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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무협상 개최하자는 북 담화는 미국 의지 시험용

등록 2019.09.10 08:48:04수정 2019.09.10 08:5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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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압적 표현으로 미국 자존심 있는대로 긁어

'회담 열려도, 미국이 회담을 깨도 좋다' 판단

【하노이(베트남)=뉴시스】고승민 기자 = 제2차 북미정상회담 이틀째인 지난 2월 28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베트남 JW메리어트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하면서 회담이 결렬됐음을 밝혔다. 2019.02.28. kkssmm99@newsis.com

【하노이(베트남)=뉴시스】고승민 기자 = 제2차 북미정상회담 이틀째인 지난 2월 28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베트남 JW메리어트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하면서 회담이 결렬됐음을 밝혔다. 2019.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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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강영진 기자 = 최선희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이 어제 밤 늦은 시간에 담화를 발표 "9월 하순경 합의되는 시간과 장소에서 미국측과 마주앉아 지금까지 우리가 논의해온 문제들을 포괄적으로 토의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이로써 6월말 극적인 김정은-트럼프 판문점 상봉에서 김위원장이 7월중 개최할 것이라고 약속했다던 실무협상이 2개월 이상 지연돼 열릴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담화문 문안만 보면 아직은 실무협상이 재개되더라도 협상이 순항할 지, 심지어는 정말 재개될 수 있을지조차 확실하지 않다. 최선희 제1부상이 담화에서 여러가지 단서를 달았기 때문이다. 

우선 최 제1부상은 미국의 고위급 북미협상 담당자들이 북미실무협상 개최에 준비돼 있다고 거듭 공언한 것에 주목한다고 자신들이 실무협상에 나서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그러나 최 제1부상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 4월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미국이 '새로운 계산법'을 가지고 우리에게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밝힌 것을 상기시키면서 "그사이 미국이 우리와 공유할 수 있는 계산법을 찾기 위한 충분한 시간을 가졌으리라고 본다"고 강조했다.

이어 "우리에게 접수가능한(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계산법에 기초한 대안을 가지고 나올 것이라고 믿고 싶다"고 밝히면서도 "만일 미국측이 어렵게 열리게 되는 조미(북미) 실무협상에서 새로운 계산법과 인연이 없는 낡은 각본을 또다시 만지작거린다면 조미 사이의 거래는 그것으로 막을 내리게 될 수도 있다"고 위협했다.

짧은 담화문이지만 그에 담긴 내용들은 치밀한 계산이 담긴 것들이다. 담화문을 일반이 이해하기 쉬운 말로 풀어쓴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미국이 애걸복걸하니 일단 실무협상을 일단 시작해 보기로 한다. 그렇지만 김위원장은 지난 4월에 미국이 하노이회담에서 보인 입장을 바꾸는지 연말까지 지켜보겠다고 밝혔다. 그 때 이후 5개월의 시간이 지났으니 미국이 새로운 대안을 마련하기 위한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 실무협상에 우리가 동의할 만한 대안을 가지고 나와라. 그런 대안도 없이 2월 하노이회담에서 밝힌 내용을 실무협상에서 다시 들먹거린다면 앞으로 북미 협상은 없다.'

협상 상대자인 미국이 모멸적으로 느낄 수도 있는 고압적인 어투로 시종일관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겉으로 드러난 내용일 뿐이다. 북한 역시 김정은 위원장이 제시한 연말이라는 시한이 다가오면서 초조감을 느낀 것이 분명했다. 그동안 북미는 심할 정도의 기싸움을 벌여왔다.

그동안 북미가 대립했던 가장 큰 쟁점은 실무협상을 열 것인가, 아니면 실무협상 없이 정상회담을 다시 열 것인가하는 문제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달 10일(미국시간) 트윗으로 김정은 위원장이 미사일 시험에 대해 사과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다고 밝히고 "나도 김정은을 그리 머지않은 미래에 만나기를 고대한다"며 북미 정상회담 추가 개최 가능성을 시사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나도"라는 표현을 쓴 것으로 미뤄볼 때 김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을 다시 만나고 싶다고 밝혔음이 확인된다. 다만 두사람이 서로 만날 의사를 밝혔지만 실무협상을 거쳐서 만날 지에 대한 생각은 판이하게 달랐던 것으로 전해진다.

국가간 정상회담은 많은 사전 준비를 거쳐 이뤄지는 것이 통상적이다. 또 정상들은 실무회담을 통해 이미 합의한 의제와 형식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관례다. 정상회담에서 예기치 않은 돌발변수가 발생하는 것을 방지함으로써 회담이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이 이같은 관례를 따르길 거부해 왔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다.

그 이유는 일단 김정은이 트럼프를 상대로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나이가 젊은 김정은은 자신이 북미관계와 핵문제를 깊이 연구해속속들이 내용을 알고 그에 따라 북한에 유리하도록 협상 전략과 전술을 구사할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북한에서 핵문제를 두고 현상의 변화를 가져올 중대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인물은 김정은밖에 없다는 점이다. 김정은 외에 누구도 북미가 합의하는 내용에 대해 뒷감당할 자신이 없는 것이다.

이같은 정황은 1,2차 북미정상회담을 통해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지난해 6월 싱가포르 1차 정상회담을 앞두고 북미는 상당한 기싸움을 벌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과 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한 뒤에 회담을 취소하겠다고 밝히기도 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회담이 열렸었다. 

그러나 회담을 열기로 합의한 뒤 판문점에서 열린 실무회담에서 북한은 회담의 장소와 시기, 회담 방식 등의 절차적 문제를 넘어 정상회담의 의제에 대해선 논의를 거부했었다. 

이에따라 김성 미국측 실무협상 대표는 최선희 당시 외무성 부상과 회담에 대해 상당한 좌절감을 표시했고 이때문에 일부에선 정상회담이 열리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부정적 관측마저 내놓기도 했었다.

결국 미국의 상당한 양보끝에 정상회담이 열렸고 회담은 그 결과 북한에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이 한미군사훈련을 중단하겠다고 김정은에게 약속했음을 회담뒤 기자회견에서 밝혔는데 이점은 북한이 이후 두고두고 미국을 압박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2월의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아니 1차 때보다도 더 심했다. 북한은 실질적인 실무협상을 계속 미루다가 정상회담이 열리기 일주일 전에야 회담 의제와 일정을 다루는 실무협상을 시작했고 그나마 의제에 대해선 실질적인 진전을 사실상 봉쇄했었다. 1차회담 때처럼 트럼프-김정은 담판을 통해 북한에 유리하게 협상을 이끌겠다는 계산이 있었던 듯했다.

그러나 이번엔 미국이 달랐다. 트럼프가 김정은이 제시한 영변 핵단지 폐기와 제재 해제 제안을 거부함으로써 회담을 결렬시켰다.

당시 미 의회에서 트럼프의 탄핵 가능성을 둘러싼 논의가 활발했고 궁지에 몰린 트럼프가 김정은에게 다시 밀렸다는 평가를 감수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 일반적 평가였다. 미국은 하노이 회담에 나서기 전부터 회담을 결렬시킬 준비를 하고 회담에 나섰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트럼프의 이같은 정치적 판단을 주도한 것이 바로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었다는 보도가 잇달았다. 이용호 북한 외무상이 최근 폼페이오 장관을 '미국외교의 독초'라고 독설을 내뱉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이번에 미국은 3차 정상회담에 대한 언급이 없이 폼페이오 장관과 스티븐 비건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나서서 줄기차게 실무협상 개최를 북한에 요구했다. 그러면서 북한이 응하도록 압박의 강도를 차츰 높여왔다. 

심지어 비건 대표는 북미 핵협상이 최종 결렬되면 한국과 일본이 핵을 보유하겠다고 나설 수도 있다고까지 말했다. 핵확산 방지를 미국 외교정책의 핵심 줄기로 삼는 미국에서 이같은 발언은 금기를 깬 수준의 발언으로 평가된다. 

그러자 결국 최선희 제1부상이 담화를 통해 일단 실무협상을 해보자고 나선 것이다. 자신들이 더이상 시간을 끌면서 실무회담에 나서지 않을 경우 미국이 2017년의 초강경 입장으로 돌아설 위험성이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여전히 호락호락하지 않다.

최대한 고압적인 표현으로 미국을 압박하는 단서를 달아서 회담을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은 실무협상을 미국이 깨도록 유도하려는 의도를 담은 것으로 분석된다.

트럼프 대통령이 아직도 1년 넘게 남은 내년 미국 대선에서 재선될 수 있을 지는 아직 누구도 자신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북한으로선 트럼프 대통령과 최종적인 핵합의를 서둘러 진행할 의사가 아직 없는 듯하다. 그렇지만 미국의 압박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고 더이상 이를 방치하면 자칫 트럼프가 북미회담을 깨버리고 다시 2017년의 '미친 개 전략'으로 돌아설 위험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미 대선이 1년 넘게 남은 시점상 트럼프가 '미친개 전략'으로 복귀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대북외교가 실패했다는 평가를 넘어설 수 있는 시간이 충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결국 북한은 미국의 자존심을 긁어가면서 선심쓰듯이 실무협상에 동의하는 듯 하면 미국이 수모를 감수하고 회담에 나서는 것도, 미국이 회담을 깨버리는 것도 북한으로선 나쁘지 않다는 생각인 듯하다. 

우선 북한이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중단하고 있는 것을 외교적 성과로 포장해온 트럼프가 아직은 쉽사리 회담을 깨지는 못할 것이라는데 무게를 두는 것같다. 9월 하순이라는 시간을 정해 통보한 것은 자신들의 회담의지가 진지한 것임을 가장하는 것이다. 실제로 트럼프는 "만남은 좋은 것"이라고 일단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만에 하나 미국이 회담을 깰 경우라도 향후 어느 시점에서 다시 핵협상 재개 논의가 이뤄지면 북한은 일단 우위에 선 채로 회담 논의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핵을 보유한 북한으로선 미국이 회담이 아닌 방법으로 핵문제 해결에 나서지 못할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최선희 제1부상의 담화는 실무협상 개최여부를 둘러싼 북미간 기싸움이 막바지에 이르렀음을 시사한다. 미국이 최 제1부상의 회담 개최 용의 표명을 받아들여 회담에 나설지 아니면 회담을 깨고 발끈할 지 북미핵협상은 기로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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