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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의 불안"의 美문학평론가 해롤드 블룸(89) 타계

등록 2019.10.15 08:4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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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문호들 분석, 20세기 비평문학의 새 기준 마련

【AP/뉴시스】해롤드 블룸의 활동의 터전인 예일대학교 캠퍼스에 있는하크니스 타워. 

【AP/뉴시스】해롤드 블룸의 활동의 터전인 예일대학교 캠퍼스에 있는하크니스 타워.  

【서울=뉴시스】차미례 기자 = 세계 문학계의 거장들의 작품세계를 분석해 "영향의 불안"(The Anxiety of Influence )개념을 주장하고 이를 저서로 펴냈던 미국의 문학평론가 해롤드 블룸이 14일(현지시간) 코테티컷주 뉴헤이븐의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9세.

세계의 고전문학 작가와 작품에 정통한 그는 서구 현대문명과 최신의 문학적 트렌드의 기준이 될만한 이론을 정립했을 뿐 아니라,  평단에서도 많은 글과 저서를 발표하는 선도적인 지식인으로 활동해왔다.

부인 쟌느 불룸은 그가 최근들어 건강이 급속히 악화하는데도 계속해서 책을 쓰고 있었으며,  지난 주까지도 예일대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고 말했다.

예일대학교도 블룸이 뉴헤이븐의 한 병원에서 숨진 사실을 공지했다.

블룸은 20여권의 저서를 남겼으며,  학술적인 주제를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개하는데 대해서 스스로 자부심을 갖고 있는 베스트 셀러 저자였다.

'영향의 불안'은 1970년대 미국의 문학 비평가 헤롤드 블룸(Harold Bloom)이 17세기 계몽주의 시를 연구했던 월터 잭슨 베이트(Walter Jackson Bate)의 업적을 이어받아 독창적으로 만들어낸 용어이다. 블룸은 같은 제목의 저서에서 베이트가 지적한, 위대한 선배 시인들의 시적 성취에 대한 18세기 후배 시인들의 열패감을 근본적으로 수정하기 위해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도입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블룸은 늘 현대문학의 비평적 기준들이 사라지고 있다고 한탄했는데,  결국 현대의 문학평론가들이 그런 역할을 해내야 한다고 책임을 부여하곤 했다.

그 때문에 그런 내용을 담은 "서구 문학의 규범" ( The Western Canon ) " 더 북 오브 제이" ( The Book of J) 같은 저서를 써서 베스트 셀러 목록에 올랐고 "굿 모닝 아메리카"(Good Morning America )를 비롯한 많은 방송 프로그램에도 출연했다.

블룸은 전미 도서상( National Book Award ) 최종 수상작가에 오르기도 했으며,  미국 학술원의 문학부문 회원이었다.  근대문학도서관이 실시한 독자 대상 여론조사에서 그의 "서구 문학의 규범"은 일반 독서물이 아닌데도 20세기 최고의 영어로 쓰여진 명저 58위에 오르기도 했다.

 블룸에 따르면 밀튼 시대 이후 후배 시인은 강력한 선배 시인에 대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놓이게 된다. 후배 시인은 강한 아버지를 존경하면서도 절대적으로 독창적인 인물이 되고 싶은 욕망에 선배 시인이 선취한 업적을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방어적으로 읽음으로써 자신의 창조성을 부각하게 되는데 이것을 영향의 불안이라고 한다.

블룸은 모든 선배 시인의 작품에 대한 독서는 그 때문에 "은폐 또는 오독(誤讀)"일 수 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런 오독은 "약한 오독(weak misreading)과 강한 오독(strong misreading)"으로 나누어지는데 약한 오독은 텍스트의 진정한 의미에 도달하려는 시도이나 이것은 필연적으로 실패하게 되어 있다.

반면 강한 오독은 독자의 방어기제가 극단적으로 텍스트의 의미를 곡해하는 것이 허용되는 오독이다. 블룸의 주장은 선배 비평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블룸 자신의 이론과 독법에도 그대로 적용되며, 문학적 표준이 되는 기존의 전통을 부정하게 된다.

그의 이런 이론은 문학을 떠나 모든 예술 분야에도 적용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거기 대한 논쟁, 패러디, 도전,  학술행사가 끝없이 이어졌고 블룸이 의도하지 않았던 엉뚱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예를 들어 뉴욕타임스가 " 영향의 불안에 도전하는 제이-Z"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거나 캐나다의 한 록 밴드가 밴드의 이름을 "영향의 불안"으로 짓는 일도 있었다.

블룸은 공개적으로 셰익스 피어, 새뮤엘 존슨 같은 과거의 대 문호들을 현대 세계로 이끌어냈으며 19세기의 문학평론가 월터 페이터를 재조명하기도 했다.  그는 인간의 삶과 정신세계의 삶의 사이에는 경계가 없다는 것과,  활자로 출간된 작품의 인물이나 말들은 작가가 사멸한 뒤에도 남게되는 현상들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예를 들어 셰익스피어는 배신을 당해 사라져도 자신이 좋아하는 주인공 폴스타프는 하나의 전형으로 영원히 살아있는 사실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는 12살 때 처음으로 폴스타프를 접하고 이후 자신의 의식세계의 지주로 삼아왔다고 자랑스럽게 쓰기도 했다.

헝클어진 머리와 근심에 가득찬 연극적인 말씨로 예일대 강단에서 열변을 토하던 블룸은 수 십년의 교수 생활을 접고 영면에 들었다.

그의 타계 소식에 예일대 출신들은 상반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일부는 그의 독창적이고 열렬한 강의와 모든 영시를 암기하고 있어 술술 읊어내는 그이 능력에 감탄하는 말을 했고,  일부는 2004년에 불거진 여성작가 나오미 울프에 대한 성추행 파문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당시에 울프는 자신이 예일대에 다닐 때 블룸 교수가 원치 않는 성적 접촉을 시도했었다는 글을 썼는데,  블룸은 이를 일체 부인했다.

1930년 뉴욕의 유대정교회 출신 이민가정의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해롤드 블룸은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하는 러시아출신 이민가족에 속해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디시어로 된 시를 읽으며 문학의 꿈을 키웠고 ,  하트 크레인 T.S. 엘리엇,  윌리엄 블레이크를 비롯한 많은 시인들을 접하며 문학평론가의 소양을 쌓았다. 

그는 청년시절 한 때 한번에 1000쪽의 책을 읽을 정도로 독서광이자 속독가였다고 고백한 적 있다.

그는 "문학작품들은 나에게 자유의 느낌을 선사했다.  나를 해방시켜서 원초적인 충만감을 만끽하게 했다"고 말했다.

1951년 코넬 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영국 캠브리지의  펨브로크 칼리지에 유학했고 1955년에는 예일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부인 잔느 굴드와는 1958년 결혼해 두 아들을 두었다.

1994년 출간한 "서구문학의 규범"에서 그는 단테에서 새뮤엘 베케트에 이르는 서구문학의 대가 26명의 평전과 함께  현대문학의 여러 작품에 대한 영향력을 분석하기도 했다.  그 중심에는 셰익스피어가 있었다.  블룸에 따르면 프로이트나 톨스토이도 셰익스피어를 거부하고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 속에서 명저를 탄생시킨 대가들이다.

블룸은 "프로이트의 핵심도 결국 셰익스피어 작품을 산문화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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