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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100주년-원로 영화인에게 듣다] 한국영화 100년 다큐 만드는 이석기 감독

등록 2019.11.01 14:5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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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에 촬영 조수로 영화계 진출 후, 180여 편 촬영·연출

60~80년대 한국영화 침체기·90년대 이후 전성기 직접 겪어

외국영화 역사만 공부하는 영화학도들 위해 다큐 제작 결심

【서울=뉴시스】조수정 기자 = 다큐멘터리 영화 '한국영화 위대한 100년'을 제작한 '낙타는 따로 울지 않는다' 이석기 감독이 24일 영화의 메카로 불리던 서울 충무로에서 인터뷰 하고 있다. 소위 '잘 나가는' 배우들을 호령하는 그가 충무로 거리에서 촬영한 한 영화에 배우로 나섰던 일화를 이야기하며 웃는다. "내가 NG를 일곱번이나 냈어요" 2019.10.25. chocrystal@newsis.com

【서울=뉴시스】조수정 기자 = 다큐멘터리 영화 '한국영화 위대한 100년'을 제작한 '낙타는 따로 울지 않는다' 이석기 감독이 24일 영화의 메카로 불리던 서울 충무로에서 인터뷰 하고 있다. 소위 '잘 나가는' 배우들을 호령하는 그가 충무로 거리에서 촬영한 한 영화에 배우로 나섰던 일화를 이야기하며 웃는다. "내가 NG를 일곱번이나 냈어요" 2019.10.25.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남정현 기자 = 1919년 최초의 한국 영화 '의리적 구토'가 개봉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100년 동안 한국영화는 7000~9000편이 제작됐다. 이석기 감독은 한국 영화 100주년을 맞아 몇 해 전부터 5부작 다큐멘터리 '한국영화 위대한 100년'을  기획했다. 현재 1편만 세상에 빛을 본 상태고, 나머지는 예산 부족으로 사업이 진척되지 못하고 있다. 한국영화 100년을 정리하는 그를 만나 우리가 계승해야 할 한국영화의 정신과 앞으로 나아가야 할 한국영화의 방향을 짚어본다.

◇ 이석기 감독의 60년 영화사

올해로 79세인 그는 1960년에 최초로 영화계에 발을 들였다. 당시를 영화하고 있던 작은 아버지인 이병삼 촬영감독의 촬영 현장에 심부름차 들렀다 그대로 영화계에 눌러앉게 됐다. 당시 고교 졸업과 동시에 연세대 화학과에 들어갔지만, 학비가 없어 결국 중도 포기하고 먹고살기 위해 영화계에 발을 담글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못살 때다. 작은아버지가 영화 쪽에서 촬영 일을 했다. 그때 (대)학교를 다닐 때다. 그때 심부름을 하러 갔다. 당시에는 촬영을 길가에서 하면 인산인해가 되고 사람 정리하는 데 손이 모자랐다. 심부름을 하러 갔다가 사람들 정리하고 이런 걸 도왔더니, 촬영 조수가 고맙다고 빵을 사주더라. 빵도 사주고 자장면도 사주고 하니 재밌었다. 그게 영화계에 들어온 계기가 됐다."

그는 당시 영화계에서는 드물게 '대학물'을 먹은 인재였고, 그만큼 다른 사람보다 빠르게 일을 배우고 성장했다고 회상했다. 그가 독립해서 찍은 첫 작품은 1966년 노진섭 감독의 영화 '보경 아가씨'다.

"그러고 나서 5년간 조수 노릇을 했다. 원래 조수를 한 10년은 해야 하는데 나는 일을 빨리 배웠다. 그때만 해도 영화계에 인재가 많지 않았다. 오갈 때 없는 사람들이 영화계에 많이 들어왔을 때다. 내가 대학생이다 보니 남보다 빨리 배웠다. 5년 만에 독립했다. 독립을 하자 이만희 감독이라고 당시 최고가는 감독이 나를 보고 '너 나하고 일하자'라고 해서 그 감독과 일을 시작하게 됐다. 이것이 영화계에서 승승장구하는 계기가 됐다."
【서울=뉴시스】조수정 기자 = 다큐멘터리 영화 '한국영화 위대한 100년'을 제작한 '낙타는 따로 울지 않는다' 이석기 감독이 24일 영화의 메카로 불리던 서울 충무로에 섰다. 소위 '잘 나가는' 배우들을 호령하는 그가 등 뒤로 보이는 충무로 거리에서 촬영한 영화에 배우로 나섰던 일화를 이야기한다. "내가 NG를 일곱번이나 냈어요" 2019.10.25. chocrystal@newsis.com

【서울=뉴시스】조수정 기자 = 다큐멘터리 영화 '한국영화 위대한 100년'을 제작한 '낙타는 따로 울지 않는다' 이석기 감독이 24일 영화의 메카로 불리던 서울 충무로에 섰다. 소위 '잘 나가는' 배우들을 호령하는 그가 등 뒤로 보이는 충무로 거리에서 촬영한 영화에 배우로 나섰던 일화를 이야기한다. "내가 NG를 일곱번이나 냈어요" 2019.10.25. [email protected]

이만희 감독과 처음으로 함께 한 작품은 '군번 없는 용사'(1966)였다. 이후 이석기 감독은 이 감독과 '귀로', '휴일', '창공에 산다' 등 13편을 같이 한다. 그 중 '창공에 산다'는 그에게 대종상 촬영상을 최초로 안긴 작품이다. 

"대종상 7회 때 촬영상을 탔다. '창공에 산다'라는 영화였다. 공군들에 대한 얘기였다. 그때만 해도 기재들이 없으니까 실제로 비행기에 타서 촬영하고 했다. 조종사하고 나하고만 타서 찍고 했다. 또 그때만 해도 내가 머리가 잘 돌아갔다. 시나리오가 나오면 일일이 설명할 수 없으니 외국잡지에서 스크랩한 그림들을 연출에게 보여줬다. 이런 분위기 어떠냐고 연출자에게 보여주면 의사소통이 더 쉽지 않나. 그래서 감독들이 나를 좋아했다."

이만희 감독하고 13편 정도 영화를 찍었을 때, 이번에는 김수용 감독에게 러브콜이 들어왔다. 김수용 감독과도 네 편의 영화를 함께한 이석기 감독은 마지막으로 당시 3대 영화감독이었던 김기덕 감독과도 네 작품을 함께 한다. 이후에도 그는 이석기 감독은 고영남 감독, 정인엽 감독 등 당대 대표 감독들과 작업을 이어 간다.

"고영남 감독은 좀 젊은 감독인데, 나보다 서너 살 많다. 그분이 젊은 감독 중에 엄청 잘나갔다. 그 친구가 나를 또 빼간다. 그 친구하고 20~30편을 했다. 그때 30대 초반이었다. 그리고 '애마부인' 만든 정인엽 감독이 있다. 이 친구는 나와 동년배다. 그와 40~50편 정도 했다. 그렇게 해서 촬영감독으로서 커리어를 그렇게 다졌다. 그렇게 해서 한 20, 30년 흘렀다. 그 사이에 대종상 2, 3번 촬영상 받고 그랬다."

이 감독은 영화 '창공에 산다'에 이어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1990)로 제 28회 대종상 촬영상을 거머쥔다. 영화 '깃발 없는 기수'(1982)로는 대종상 특별상을 탄다. 이후 대종상 공헌상, 황금촬영상 등은 물론 올림픽 문화훈장까지 받는다. 그는 '성리수일뎐'(1987)으로 연출로 데뷔, 이후 10여 편의 작품을 연출한다. 촬영감독으로 임한 작품까지 합치면 그의 작품 수는 180여 편에 이른다.

◇ 영화의 전성기와 침체기 모두 겪어

60년대 후반부터 80년대까지 매년 영화가 200~250편씩 만들어졌다. 당시 제작사들은 외국영화 수입쿼터를 얻기 위해 다수의 '국책영화'(반공영화)를 제작했다. 이로 인해 만들어지는 영화의 수는 많았지만, 그만큼 버려지는 영화도 많았고 영화의 질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영화 제작 환경 또한 척박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국가가 '국책영화'라고 해서 반공영화를 제작했다. 1년에 4편을 만들면 국가가 외국영화 수입 쿼터를 줬다. 당시 외국영화는 무조건 손님이 들었다. 아무거나 골라와도 흥행이 될 때다. 제작자는 그걸 얻기 위해서 국책영화를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만들어지는 양이 많았다. 만들어서 창고에 바로 집어넣어 버린다. 그래서 60~80년대 영화가 범람하고 질을 개판이 돼 버린 거다."   

"신성일은 한때 50편을 동시에 계약했다. 나도 1년에 11편을 할 때도 있었다. 당시에는 배우 스케줄이 오전, 오후, 밤으로 나뉘었다. 오전에 A 영화, 오후에 B 영화, 밤에 C 영화를 하는 식으로 찍었다. 시나리오만 만들어지면 영화가 되는 시대였다. 나도 15일간 밤에 잠을 안하고 일하다 쓰러진 적이 있다."
【서울=뉴시스】 남정현 기자= '쉬리', '실미도' 포스터(사진=각 배급사 제공) 2019.11.01 nam_jh@newsis.com

【서울=뉴시스】 남정현 기자= '쉬리', '실미도' 포스터(사진=각 배급사 제공) 2019.11.01 [email protected]



군사정권 시절 내리막길을 걸었던 한국 영화는 민주화 바람과 함께 고도성장 시대를 맞게 된다. 이석기 감독은 한국영화의 터닝포인트가 된 작품으로 강재규 감독의 '쉬리'(1999), 강우석 감독의 '실미도'(2003)를 꼽았다.

"'쉬리', '실미도' 이런 영화들이 1990년대 말 2000년도에 치고 나왔다. 그때 국민들이 '한국 영화도 제대로 만드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때부터 한국영화가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애마부인'이나 액션 영화 위주의 저질 영화만 나왔다. 당시에는 임권택 감독도 액션 영화를 했다."

이석기 감독은 군사정권 시절 한국영화가 성장하지 못했던 또 다른 이유로 '검열'을 꼽았다.

"시나리오가 나오면 시나리오를 사전 검열한다. 영화가 만들어지면 영화를 가지고 또 검열한다. 제목부터 검열한 참 난센스 같은 일들이 많았다. 예를 들어 '애마부인'은 '사랑 애', '말마 자'를 써야 한다. 하지만 이를 못 쓰게 해 '산 마' 자로 바꿨다. 액션 영화인데 피가 나오면 안 되고, 멜로 영화에서는 젖가슴이 나오면 안됐다."

"내가 찍을 다큐에 이런 내용을 담고 싶다. 힘든 상황에서도 선배들이 한국 영화를 지켜왔다는 걸 후배들에게 알리고 싶다. 한국영화인들은 어느나라 영화인들보다 훌륭하다."

◇ 다큐멘터리 '한국영화 위대한 100년'

한국영화는 1919년 '의리적 구토'가 단성사에서 최초로 공개된 이후, 일제 강점기, 6·25 전쟁, 군사정권, 산업화 등 굴곡진 역사와 함께했다. 한국영화는 이제 세계 3대 영화제인 칸 영화제(봉준호 감독 '기생충'/황금사자상), 베니스영화제(김기덕 감독의 '피에 타'/황금사자상), 베를린 영화제(강대진 감독의 '마부'/은곰상)에서도 인정받는 한류 문화의 첨병이 됐다.

이석기 감독은 이러한 한국영화의 성장이 '자금도, 장비도, 기술도 없는 열악한 현장에서 오로지 열정과 사명감으로 작품을 만들어낸 선배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그 역사를 기리기 위한 작업으로 다큐멘터리 '한국영화 위대한 100년' 제작에 나섰다.

"내가 이 다큐멘터리를 만들게 된 계기가 있다. 영화를 공부하겠다는 학생들이 우리 정체성을 모른다. 어느 세미나장에를 갔더니 젊은 교수가 50년대 영화를 얘기하는데 전부 거짓말을 하고 있더라. 없던 얘기를 하더라. 그 당시에 16밀리로 촬영을 많이 했다. 근데 학생들한테 당시에 16밀리로 촬영을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
【서울=뉴시스】조수정 기자 = 다큐멘터리 영화 '한국영화 위대한 100년'을 제작한 '낙타는 따로 울지 않는다' 이석기 감독이 24일 영화의 메카로 불리던 서울 충무로에서 인터뷰 하고 있다. 소위 '잘 나가는' 배우들을 호령하는 그가 충무로 거리에서 촬영한 한 영화에 배우로 나섰던 일화를 이야기한다. "내가 NG를 일곱번이나 냈어요" 2019.10.25. chocrystal@newsis.com

【서울=뉴시스】조수정 기자 = 다큐멘터리 영화 '한국영화 위대한 100년'을 제작한 '낙타는 따로 울지 않는다' 이석기 감독이 24일 영화의 메카로 불리던 서울 충무로에서 인터뷰 하고 있다. 소위 '잘 나가는' 배우들을 호령하는 그가 충무로 거리에서 촬영한 한 영화에 배우로 나섰던 일화를 이야기한다. "내가 NG를 일곱번이나 냈어요" 2019.10.25. [email protected]



특히 한국의 영화학도들이 프랑스의 '누벨바그'에 대해 공부하면서 과거 열악했던 국내 영화 선배들의 정신은 외면하는 데 큰 아쉬움을 드러냈다. '누벨바그'는 '새로운 물결'이라는 의미로 1950년대 프랑스에서 일어난 새로운 영화 풍조다. 저예산으로 좋은 영화를 만들자는 정신이다. 이석기 감독은 프랑스에 못지 않게 한국 영화 선배들도 '헝그리 정신'으로 영화를 만들었다고 힘주어 말했다.

"우리 영화가 어떻게 흘러왔는지 모르니까 프랑스, 미국 영화 역사를 공부한다. 외국영화 역사를 공부하기보다 우리 역사를 공부하면 훨씬 더 빨리 배우고 더 살갗으로 와닿을 수 있다. 우리 영화인들 정말 머리 좋다. 외국에서 해외 촬영을 하면 외국 사람들이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우리는 필름을 최대한 많이 써야 3만 장 쓴다. 2시간 영화에 만 여장 들어 간다. 외국에 비해 엄청 적게 쓰는 거다 필름값이 없으니까. 필름 사용을 오버하면 연출자가 물어내야 했다. 그러니까 연출자가 NG를 낼 수가 없었다."

"과거 영화인들은 돈 받고 작업을 하지 않았다. 영화가 좋아서 했고, 먹고 살기 위해서 했지만, 개런티를 달라는 말도 못 했다. 그저 어깨 넘어로 기술만 배워도 충분했다. 한두 달 동안 13번 정도 찍어서 촬영을 끝내 버린다. 새벽에 집합해 3~4시간 이동하고 2~3시간 찍으면 저녁이 됐다. 망원렌즈가 없어서 전쟁 영화 찍을 때는 파편을 맞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영화인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일했다."

마지막까지 이 감독은 100주년을 계기로 다큐멘터리를 통해 한국 선배 영화인들의 정신과 한국 영화의 정체성을 후배들에게 꼭 알리고 싶다고 재차 강조했다. 그가 다큐멘터리 제작에 나선 지 6년이 됐다. 그동안 예산 부족으로 다큐멘터리 작업은 중단된 상태다. 그는 영화 관계 부처에서 원로 영화인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이제 시간이 많지 않다고 조바심을 냈다.

"60년대부터 영화계에 몸을 담았다. 내 위의 분들이 돌아가시니까 마음이 더 급하다. 자꾸 돌아가시니까. 그분들한테 말이라도 한마디 얻고 해서 다큐멘터리는 1편(1919~1960)을 정리했다. 내가 경험했던 게 아니기 때문에 선배들 얘기를 주워듣고 모아서 한 거다. 앞으로 만들 2편은 내가 실제 활동하던 시기니까 더 잘할 수 있다. 1편 만들어 놓고 2편을 하려고 하는데 호응이 없다. 영화진흥위원회 위원들을 너무 젊은 사람들이 맡고 있다. 그만큼 원로 영화인들의 목소리를 덜 들어준다. 반은 포기했다. '죽기 전엔 안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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