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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연배의 이야기와 함께하는 와인] 와인으로 읽는 세계 해전사

등록 2022.02.05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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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레이쇼 넬슨 제독의 초상화. (사진=위키피디아 캡쳐) *재판매 및 DB 금지

호레이쇼 넬슨 제독의 초상화. (사진=위키피디아 캡쳐)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세계 역사를 살펴보면 한 나라의 운명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의 줄기를 바꾼 유명한 해전을 이끈 명장들이 여럿 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와인과 특별한 인연을 지닌 이들도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 해양 명장으로는 이순신 장군이 있다. 이순신 장군은 1591년 선조 24년 신묘년 2월 종4품인 진도군수로 발령되자마자 바로 종3품인 가리포진 수군첨절제사로 승진 발령되고, 부임하기도 전에 또 다시 정3품인 전라좌도 수군절제사에 임명된다. 이 때로부터 14개월 후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이순신 장군이 그 전에 겪었던 일련의 고난을 보면 우리 민족에게는 하늘이 준 천운이었다. 장군은 이 자리에 오기 전 16년 동안 한 번에 4계급 특진(불차탁용)을 포함한 5회의 승진도 했지만 2회의 좌천, 한번의 백의종군을 포함한 2회의 파직, 2회의 승진 취소, 2회의 휴직 및 2회의 복직을 겪는다. 이후 전란 중에도 1차례의 승진과 1차례의 파직 및 백의종군을 더 겪는다. 그리고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한 그 다음해인 1598년 노량 해전을 승리로 이끈 후 전사한다. 장군의 나이 54세, 관직 경력 22년째 되던 해였다. 7년 전쟁의 마지막 해전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임란 중 바다에서 23번을 싸워 23번을 이겼다. 세계 해전사를 통틀어 인품이나 리더십, 전략 전술, 전함을 비롯한 장비의 운용 등 모든 면에서 이순신 장군에 필적할 만한 위대한 지휘관을 찾기는 쉽지 않다.      

우리나라 역사상 와인이 처음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1653년이다. ‘하멜 표류기’에는 제주도에 표류한 네덜란드인 하멜이 조선 관원에게 포도주를 바쳤다는 기록이 나온다. 일본에 처음 와인이 전래된 것도 1594년경이니 이순신 장군이 어떤 경로로든 와인과 직접적인 접촉이 있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하지만 세계 해전사에서 이순신 장군과 직간접으로 비견되는 유명한 해군 제독들과 관련한 와인 이야기는 존재한다.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는 1588년 벌어진 아르마다 해전(칼레 해전)에서 영국 해군의 부사령관으로 참전해 스페인의 무적함대(Armada)를 격파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는 해적 출신으로 영국 해군의 사령관이 되어 기사 작위를 받은 것은 물론, 마젤란에 이어 영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세계일주를 한 탐험가이기도 했다. 1540~1543년 사이에 태어나 1596년에 사망했는데, 이순신 장군(1545~1598)과 비슷한 생몰연도를 가지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그는 해군 지휘관으로도 유명하지만 와인의 역사에서도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영국은 프랑스와 싸운 백년전쟁의 여파로 14세기 전반부터 스페인 카디즈(Cadiz) 지역의 헤레즈(Jerez)에서 세리 와인을 수입했지만, 그 가격이 맥주의 12배나 될 정도로 비쌌다.

드레이크는 1587년 카디즈를 습격해 2900배럴 상당의 세리 와인을 약탈해 런던으로 가져온다. 500㎖로 100만병이나 될 정도로 엄청난 양이었다. 이는 세익스피어의 희곡에서도 예찬될 만큼 영국에서 세리 와인이 대중화하는 계기가 된다. 카디즈 습격은 그 다음해 칼레 해전에서 스페인 무적함대가 고전하게 되는 또 다른 배경이 되기도 했다. 세리 와인이 영어로 약탈을 뜻하는 ‘Sack’으로 불리는 유래이기도 하다.            

이순신 장군에 비견되는 또 한 명의 명장은 호레이쇼 넬슨(Horatio Nelson) 제독이다. 넬슨은 1805년 트라팔가 해전에서 프랑스와 스페인의 연합함대를 격파해 18만 나폴레옹군의 영국 침략을 저지햇다. 연합함대는 대포의 화력을 집중하기 쉽게 배의 측면이 적진을 향한 전형적인 종렬진을 쳤다. 반면 넬슨은 위험을 무릅쓰고 직각으로 2열의 종대를 이룬 11자 진법으로 맞섰고, 연합군의 진열을 세 동강 내어 대포로 선수와 선미를 가로로 직격하는 ‘종사 공격’을 퍼부어 대승했다. 그 또한 마지막 전투에서 적군의 총탄을 맞고 전사한다. 적이 피격 사실을 모르게 천으로 얼굴을 덮게 한 것도 이순신 장군을 연상시킨다.

넬슨의 시신은 전사 후 부패를 막기 위해 럼주를 담은 대형 오크 통에 담겨 런던으로 이송됐다. 오늘날 붉은 색 럼주를 ‘블러디 럼(Bloody Rum)’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와인은 넬슨의 함대에서 주요 보급품이었다. 

미국 해군사관학교의 생도였던 체스터 니미츠는 졸업을 앞둔 1905년 아시아 지역 순항훈련 차 전함 USS 오하이오를 타고 도쿄에 기항한다. 마침 같은 해 5월의 쓰시마 해전 승전을 축하하기 위해 메이지 천황이 주최하는 사교 파티가 열렸고 USS 오하이오도 초대를 받는다. 파티에 참석한 니미츠가 와인을 마시던 중 파티의 주인공인 일본의 해군 제독과 마주쳤고 그를 자신의 테이블로 초청했다. 놀랍게도 제독은 초청에 응했다.

제독은 일본에서는 군신으로 불리는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었다. 도고는 와인을 함께 마시면서 영국에서 유학한 유창한 영어로 쓰시마 해전의 경험담을 니미츠에게 들려주었다. 두 사람의 인연은 이후에도 이어져 니미츠는 1934년 도고의 국장에 직접 참석해 조문했다.

쓰시마 해전은 1905년 5월27~28일 이틀 동안 도고 제독이 지휘한 일본의 연합함대가 대마도 근처 대한해협에서 막강한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궤멸시킨 해전이다. 러시아 함대가 북해로부터 2만8800㎞를 돌아와서 지친 탓도 있었지만, 빠른 스피드를 바탕으로 과감하게 T자 진법을 구사한 도고 제독의 전략이 승리의 요인이었다.

도고는 그 11년 전인 1894년엔 우리나라의 서해에서 벌어진 청일전쟁에서 전함 나니와 호를 지휘해 청의 북양함대를 격파한 전적도 있었다. 도고는 넬슨과 이순신 장군을 존경했다.

니미츠는 1941년 12월7일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자 태평양 함대 사령관으로 부임하고 미드웨이 해전 등에서 일본 해군을 재기 불능상태로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함대인 미주리 호 함상에서 일본의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니미츠가 직접 이순신 장군의 승전을 언급했다는 이야기가 뉴욕 타임즈에 실린 적도 있다. 이들은 모두 최악의 상황에서 나라를 구했다.       

▲와인 칼럼니스트·경영학 박사·우아한형제들 인사총괄 임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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