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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 없는 멍에뿐…오월 광주엔 우리도 있었다"[민중의 5·18]<중>

등록 2024.05.13 08:00:00수정 2024.05.13 08: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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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군 유혈 진압 분개해 전남도청 사수 동참

아비규환 속 사체수습 등 궂은 일 자진하기도

"눈 앞 죽음 보면 누구든 나섰다…기억해달라"

[광주=뉴시스] 이영주 기자 = 5·18민주화운동 당시 구두닦이로서 시민군에 합류해 항쟁에 참여했던 박영진(76)씨가 지난 3월 20일 광주 북구 자신의 집에서 44년 전 항쟁을 떠올리며 인터뷰하고 있다. 2024.05.12. leeyj2578@newsis.com

[광주=뉴시스] 이영주 기자 = 5·18민주화운동 당시 구두닦이로서 시민군에 합류해 항쟁에 참여했던 박영진(76)씨가 지난 3월 20일 광주 북구 자신의 집에서 44년 전 항쟁을 떠올리며 인터뷰하고 있다. 2024.05.12. [email protected]

[광주=뉴시스]이영주 기자 = 5·18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기층 민중들은 옛 전남도청에서 밤 지새우며 항쟁 수뇌부를 지켰고 희생자 사체 수습과 같은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무고한 시민을 향한 무차별 진압에 분연히 항쟁에 동참했지만 이름조차 남김없이 잊혀 갔다.

먹고살기 바빠 마음 한구석에 깊이 묻어뒀던 44년 전 기억을 꺼낸 이들에게 5·18은 영영 아물지 않는 상처이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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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혈진압 분노" 총 들고 나선 구두닦이

"주역이 아니어도 어떻소. 다만 잊지만 말아 주오."

5·18항쟁에 동참했던 박영진(74)씨는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죽어가는 시민들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며 이같이 말했다.

1947년 목포에서 태어난 그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살아왔다. 가난한 환경이 싫었던 그는 도시였던 광주로 나와 BBS직업전문학교(BBS)에 입소해 구두닦이 일을 배웠다.
[광주=뉴시스] 이영주 기자 = 5·18민주화운동 당시 구두닦이로서 시민군에 합류해 항쟁에 참여했던 박영진(76)씨가 지난 3월 20일 광주 북구 자신의 집에서 44년 전 항쟁을 떠올리며 인터뷰하고 있다. 2024.05.12. leeyj2578@newsis.com

[광주=뉴시스] 이영주 기자 = 5·18민주화운동 당시 구두닦이로서 시민군에 합류해 항쟁에 참여했던 박영진(76)씨가 지난 3월 20일 광주 북구 자신의 집에서 44년 전 항쟁을 떠올리며 인터뷰하고 있다. 2024.05.12. [email protected]



그는 1980년 5월17일(추정) 낮12시께 전남도청 분수대 주변에서 군경과 대치 중이던 인파에 휩쓸렸다고 했다. 군경은 해산 명령에 따르지 않는 인파에게 몽둥이를 휘둘렀다. 이때 박씨도 온몸에 멍이 들었다.

5월22일에는 도청 마당에서 널부러진 시신들을 봤다. 분노를 참을 수 없었던 박씨는 항쟁 지도부가 있던 도청에 찾아가 무작정 돕겠다고 했다. 그에게는 칼빈 총 한 자루와 정문 경비 임무가 주어졌다. 비슷한 처지의 청년 8명과 함께 밤샘 경비를 했다.

그러나 최후 항전 전날인 26일 도청 안에서 들려오는 "떠나지 않으면 다 죽는다"는 애절한 목소리에 어렵사리 총을 내려놓았다.

훗날 가정도 꾸렸지만 줄곧 어렵게 삶을 이어온 박씨는 공공임대주택에서 홀로 지내고 있다. 1990년부터 7차례 진행된 5·18 피해 보상 절차는 신청도 하지 못했다.

박씨는 "가벼운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니 나 또한 시민들의 뜻에 함께한 것"이라며 "고아·넝마주이처럼 가장 낮은 사람들도 항쟁에 함께 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라고 회고했다.

[광주=뉴시스] 이영주 기자 = 5·18민주화운동 당시 구두닦이로서 시민군에 합류해 시신을 직접 염했던 심호진(64)씨가 지난 4월 19일 서울 은평구 자신의 일터에서 44년 전 항쟁을 떠올리며 인터뷰하고 있다. 2024.05.12. leeyj2578@newsis.com

[광주=뉴시스] 이영주 기자 = 5·18민주화운동 당시 구두닦이로서 시민군에 합류해 시신을 직접 염했던 심호진(64)씨가 지난 4월 19일 서울 은평구 자신의 일터에서 44년 전 항쟁을 떠올리며 인터뷰하고 있다. 2024.05.12. [email protected]


"관이 작아 사체 욱여넣기도…평생 미안"

당시 구두닦이였던 심호진(62)씨도 항쟁 과정을 떠올리자 눈물을 삼켰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심씨는 어린 시절 가출해 BBS 출신 구두닦이들을 따라다니며 어깨 너머로 일을 배웠다.

5월18일 심씨는 무등극장 주변에서 계엄군의 무차별 유혈 진압을 목격했다. 사흘 뒤에는 도청 앞에서 집단 발포까지 벌어지자 시위대에 가세했다.

이후 적십자병원에 방치된 사체들을 보게 됐다. 자발적으로 돕겠다고 나선 심씨는 병원에 머물며 다친 시민들을 거들었다. 학동 BBS 출신 구두닦이들과 함께 사체를 염(殮 사체를 씻기고 염포로 싸는 일) 했다.

진압 희생자가 속출, 관이 부족해지자 급한 대로 합판을 모아다 임시 관을 짰다고도 했다. 급조하다 보니 관이 사체보다 조금 작아서 "죄송하다"고 통곡하며 억지로 밀어 넣은 적도 있었다고 심씨는 회고했다.

심씨는 항쟁 직후 악몽에서 벗어나듯 광주를 떠났다. 그러나 자리 잡은 서울에서도 삶은 녹록지 않았다.

'빨갱이'라는 멸시를 들으며 제대로 된 직장조차 구할 수 없었다. 설상가상 항쟁 트라우마도 변변한 치료도 받지 못했다.

심씨와 함께 사체 수습에 나섰던 BBS 출신 김순호(71)씨는 '사람들이 이유 없이 죽어나간다'는 상황에 누구나 한마음 한뜻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김씨는 "눈앞에서 죽어가는데 천불 나지 않은 사람이 있겠느냐. 누구든 무슨 일이라도 하려고 나섰을 것이다. 때마침 우리(BBS 출신 구두닦이들) 눈에 띈 일이 다른 사람들이 주저한 일이었을 뿐"이라고 했다.

심씨도 "상무관에 모인 유족에게 사체를 인도하는 과정에는 눈물 마를 틈조차 없었다. 바깥은 대동세상이었다지만 병원과 상무관은 아비규환이었다"며 "항쟁 이후 살아남기에 바빴던 우리들을 이제라도 기억해 달라"고 호소했다.
[서울=뉴시스] 박태홍 기자 = 5·18광주민주화운동 시위 중 사망한 교련복 차림의 학생 시신이 1980년 5월 24일 전남도청 마당에서 관이 모자라 임시로 땅바닥에 안치되어 있다. 박태홍 뉴시스 편집위원이 1980년 당시 한국일보 사진기자로 재직중 5·18 광주 참상을 취재하며 기록한 사진을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에 즈음해 최초로 공개한다. (사진=한국일보 제공) 2020.05.17. hipth@newsis.com

[서울=뉴시스] 박태홍 기자 = 5·18광주민주화운동 시위 중 사망한 교련복 차림의 학생 시신이 1980년 5월 24일 전남도청 마당에서 관이 모자라 임시로 땅바닥에 안치되어 있다. 박태홍 뉴시스 편집위원이 1980년 당시 한국일보 사진기자로 재직중 5·18 광주 참상을 취재하며 기록한 사진을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에 즈음해 최초로 공개한다.  (사진=한국일보 제공) 2020.05.17.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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