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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기층민중 연구로 '풀뿌리 항쟁' 재조명해야[민중의 5·18]<하>

등록 2024.05.14 08:00:00수정 2024.05.14 08: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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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조사위, 항쟁 참여 기층민중 7명 파악…보상·지원 주선

부정적 선입견 탓에 연구·평가 미흡…5·18 폄훼 논리 '악용'

주민등록누락 상당수, 강제수용 등 추가 피해 여부 살펴야

"항쟁 마지막 주체, 활동상 밝히면 풀뿌리 항쟁 의미 크다"

[서울=뉴시스] 박태홍 기자 = 소총으로 무장한 시민군이 1980년 5월 23일 전남도청 앞에서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는 외곽지역으로 이동하고 있다. 박태홍 뉴시스 편집위원이 1980년 당시 한국일보 사진기자로 재직 중 5·18 광주 참상을 취재하며 기록한 사진을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에 즈음해 최초로 공개한다. (사진=한국일보 제공) 2020.05.17. hipth@newsis.com

[서울=뉴시스] 박태홍 기자 = 소총으로 무장한 시민군이 1980년 5월 23일 전남도청 앞에서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는 외곽지역으로 이동하고 있다. 박태홍 뉴시스 편집위원이 1980년 당시 한국일보 사진기자로 재직 중 5·18 광주 참상을 취재하며 기록한 사진을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에 즈음해 최초로 공개한다. (사진=한국일보 제공) 2020.05.17.  [email protected]

[광주=뉴시스]변재훈 이영주 기자 = 5·18민주화운동 당시 기층민중들의 참여 실태가 공식 조사로 일부 드러나면서 후속 연구·조사 필요성이 나온다.

신군부가 5·18을 격하 또는 폄훼하는 데 악용한 이들의 항쟁 기간 중 정확한 행적과 역할을 규명, 왜곡 논리를 근절하고 '풀뿌리 항쟁사'로서 재조명해야 한다는 목소리다.

14일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조사위)에 따르면, 조사위는 항쟁에 참여한 것으로 확인된 기층민중 7명을 발굴, 이들에 대한 의료 지원·보상 절차 참여 등을 도왔다.

이 중 2명은 현재 기초생활수급자이며, 4명은 지난 1990년부터 진행된 광주시 5·18 보상 절차를 신청하지 않았다.

이들 모두 당시 고아 또는 가출 청년들에게 숙식·교육·일감을 제공했던 자활 지원 기관 'BBS직업전문학교' 소속이거나 연관이 깊다.

교차 증언으로 이들이 항쟁 기간 중 사체 수습, 도청 경비 등을 도맡으며 일정 부분 역할이 있었던 사실도 확인됐다.

[서울=뉴시스] 박태홍 편집위원 = 광주 시민군이 전남도청을 장악한 1980년 5월 24일 분수광장 앞에서 시민들이 “군사정권 타도”, “김대중 석방”을 외치며 집회를 하고 있다. 집회 중 신원 미상의 시신을 실은 트럭이 전남도청으로 들어서고 있다. 박태홍 뉴시스 편집위원이 1980년 당시 한국일보 사진기자로 재직 중 5·18 광주 참상을 취재하며 기록한 사진을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에 즈음해 최초로 공개한다. (사진=한국일보 제공) 2020.05.17. hipth@newsis.com

[서울=뉴시스] 박태홍 편집위원 = 광주 시민군이 전남도청을 장악한 1980년 5월 24일 분수광장 앞에서 시민들이 “군사정권 타도”, “김대중 석방”을 외치며 집회를 하고 있다. 집회 중 신원 미상의 시신을 실은 트럭이 전남도청으로 들어서고 있다. 박태홍 뉴시스 편집위원이 1980년 당시 한국일보 사진기자로 재직 중 5·18 광주 참상을 취재하며 기록한 사진을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에 즈음해 최초로 공개한다. (사진=한국일보 제공) 2020.05.17. [email protected]


그러나 이들이 항쟁 당시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와 평가는 극히 드문 실정이다. 제대로 조명된 바 없어, 보상·트라우마 치료 지원 대상에서도 빠져 있다.

항쟁 당시 기층민중의 역할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던 배경으로는 당대에도 홀대받던 소외계층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5·18 당시 수습대책위원이었던 고(故) 윤영규씨는 1989년 광주청문회에서 기층민중들이 시민군 총기 회수 결정에 반발했다는 내용을 증언했다.

윤씨는 당시 구두닦이로 보이는 소년이 '당신들만 애국자요? 우리도 애국 한번 합시다'라고 외쳤다고 했다. 그러면서 "'너희들만 애국자냐, 우리 같이 무식하고 배우지 못한 놈들도 애국할 수 있다'는 투로 받아 들여져 충격적이었다"고 진술했다.

전두환 신군부는 극빈층이었던 기층민중에 대한 부정적 인식·선입견을 항쟁 성격 격하에 악용하기도 했다. 계엄사령부는 시민군 결성에 대해 '불순분자와 이에 동조하는 깡패들이 사태를 악화시키고 있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이후로도 신군부는 항쟁을 줄곧 '사회 부랑아들의 영웅 심리'로 몰아세웠고, 이러한 인식 논리는 오늘날 극우 세력이 주장하는 '폭동설'과도 일맥상통한다.

기층민중의 항쟁 참여 동기와 구체적인 역할 등이 조사·연구를 통해 밝혀진다면 5·18 왜곡의 한 고리를 끊어낼 수 있다. 
[서울=뉴시스] 박태홍 기자 = 광주 시민들이 1980년 5월 24일 전남도청 앞 상무관에서 계엄군 발포로 사망한 시민들을 추모하고 있다. 박태홍 뉴시스 편집위원이 1980년 당시 한국일보 사진기자로 재직 중 5·18 광주 참상을 취재하며 기록한 사진을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에 즈음해 최초로 공개한다. (사진=한국일보 제공) 2020.05.17. hipth@newsis.com

[서울=뉴시스] 박태홍 기자 = 광주 시민들이 1980년 5월 24일 전남도청 앞 상무관에서 계엄군 발포로 사망한 시민들을 추모하고 있다. 박태홍 뉴시스 편집위원이 1980년 당시 한국일보 사진기자로 재직 중 5·18 광주 참상을 취재하며 기록한 사진을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에 즈음해 최초로 공개한다.  (사진=한국일보 제공) 2020.05.17.  [email protected]



기층민중들이 항쟁 참여 직후 어떻게 됐는지에 대한 추적 조사도 미완의 진상 규명 일환이 될 수 있다.

당시 사회적 홀대·멸시의 대상으로 극빈층인 넝마주이 중에는 주민등록조차 되지 않은 이들이 많았다. 항쟁 전 해인 1979년 당시 경찰이 관리한 광주 소재 자활근로대 16곳의 넝마주이 193명 중 주민등록증 미발급자는 71명에 달한다.

고아, 주민등록조차 없는 무연고자였던 이들이 도시 빈민으로 분류돼, '사회 복지' 실현이라는 미명 아래 강제 수용 등 또 다른 국가 폭력에 노출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실제 한 학술 논문('1980년 광주항쟁과 도시 빈민 어디로 와서 어디로 사라졌는가'·이정선·2021년 발간)은 항쟁 직후 규모가 커진 자활근로대 집단수용소나 새로 지은 시립갱생원에 강제 수용됐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조사위가 발굴한 무연고 유해와의 관련성은 없는지도 확인해봐야 할 대목 중 하나다.
[광주=뉴시스] 이영주 기자 = 5·18민주화운동 당시 구두닦이로서 시민군에 합류해 항쟁에 참여했던 박영진(76)씨가 지난 3월 20일 광주 북구 자신의 집에서 44년 전 항쟁을 떠올리며 인터뷰하고 있다. 2024.05.12. leeyj2578@newsis.com

[광주=뉴시스] 이영주 기자 = 5·18민주화운동 당시 구두닦이로서 시민군에 합류해 항쟁에 참여했던 박영진(76)씨가 지난 3월 20일 광주 북구 자신의 집에서 44년 전 항쟁을 떠올리며 인터뷰하고 있다. 2024.05.12. [email protected]



박강배 5·18재단 상임이사는 "항쟁에는 주·조연, 위·아래가 없었다. 다만 체계적 연구가 부족해 기층민중은 상대적으로 도외시되고 있다"며 "이들의 삶이 5·18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파악하는 등 연구를 확장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송선태 조사위원장도 "기층민중은 항쟁 전후 인권·생존 사각지대에 놓여있었다. 피해 사실 입증 과정에서도 곤란함을 겪어 치료·보상 대상에 들지 못했다"면서 "단순한 국가 폭력의 희생자가 아니라 항쟁 마지막 주체로서 바라봐야 한다. 이들의 활동상이 명확히 드러나야 비로소 5·18을 '풀뿌리 항쟁'의 역사로서 보다 의미있게 재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고 밝혔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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