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 왜구 침입 막은 '서천읍성' 사적 됐다
연해읍성 축성기법 변천 과정 반영된 가치 인정
![[서울=뉴시스] 서천읍성 항공사진 (사진=국가유산청 제공) 2025.11.11.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https://img1.newsis.com/2025/11/11/NISI20251111_0001989418_web.jpg?rnd=20251111093012)
[서울=뉴시스] 서천읍성 항공사진 (사진=국가유산청 제공) 2025.11.11.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이수지 기자 = 국가유산청이 충청남도 서천군에 있는 '서천읍성(舒川邑城)'을 국가지정문화유산 사적으로 지정했다고 11일 밝혔다.
'서천읍성'은 조선 초기 세종 연간인 1438년~1450년 경 금강 하구를 통해 충청 내륙으로 침입하는 왜구의 침입을 막으려고 쌓은 1645m 규모의 연해읍성(沿海邑城)이다.
연해읍성은 조선 초기 주로 세종 연간에 왜구 침입을 막고 지방행정 안정 도모를 위해 국가 주도로 해안 요충지에 축조한 읍성이다.
서천읍성은 연해읍성으로는 드물게 산지 지형을 활용해 축성됐다.
![[서울=뉴시스] 서천읍성 성벽 및 치성 등 잔존 현황 (사진=국가유산청 제공) 2025.11.11.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https://img1.newsis.com/2025/11/11/NISI20251111_0001989425_web.jpg?rnd=20251111093105)
[서울=뉴시스] 서천읍성 성벽 및 치성 등 잔존 현황 (사진=국가유산청 제공) 2025.11.11.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일제강점기 1910년 '조선읍성 훼철령'으로 전국 읍성이 철거되는 수난 속에서도 남문지 주변 등 일부를 제외한 성벽 대부분이 훼손되지 않고 잘 남아있다. 전체 성벽 둘레 1645m 중 현재 1535.5m가 남아있다.
서천읍성은 1438년(세종 20년)에 반포된 '축성신도(築城新圖·축성에 대한 새로운 도본(圖本). 조선 초기 성을 쌓을 때 기준)'에 따른 계단식 내벽과, 축성신도 반포 후 나타난 문제점 해결을 위해 1443년(세종25년) 이보흠(李甫欽)이 건의한 한양도성 축조기법인 수직 내벽이 동시에 확인되는 성(城)이다.
국가유산청은 조선 초기 축성정책 변천과정을 이해할 수 있어 역사적 가치가 크다고 평가했다.
![[서울=뉴시스] 1872년 충청도서천군지도에 서천읍성 (사진=국가유산청 제공) 2025.11.11.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https://img1.newsis.com/2025/11/11/NISI20251111_0001989427_web.jpg?rnd=20251111093200)
[서울=뉴시스] 1872년 충청도서천군지도에 서천읍성 (사진=국가유산청 제공) 2025.11.11.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문헌에 따르면 서천읍성에 17개소인 것으로 추정되는 치성(雉城·성 밑에 접근하는 적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성벽에 돌출해 쌓은 시설)이 현재까지 16개소로 조사된다.
대체로 90m 간격을 두고 설치된 것이 확인된다.
이는 1433년(세종 15년) 150보(약 155m) 간격의 설치 기준보다 촘촘하게 배치된 형태로 다른 읍성에서는 찾기 어려운 독특한 양식이다.
![[서울=뉴시스] 서천읍성 치성, 방어용으로 추정되는 수혈유구, 해자 (사진=국가유산청 제공) 2025.11.11.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https://img1.newsis.com/2025/11/11/NISI20251111_0001989416_web.jpg?rnd=20251111092933)
[서울=뉴시스] 서천읍성 치성, 방어용으로 추정되는 수혈유구, 해자 (사진=국가유산청 제공) 2025.11.11.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밖을 둘러 판 해자의 유구와 땅을 판 구덩이 흔적인 수혈유구도 확인됐다. 이는 읍성 축조 후 후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국가유산청은 서천읍성은 조선 초기 연해읍성 축성 구조와 변화 과정 등을 잘 보여주고, 다양한 조선 초기 읍성의 유구 등이 잘 남아 있어 높은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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