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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세월호 유족들에게 건넨 어느 판사의 위로

등록 2017.01.20 10: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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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신효령 기자 = "예은이랑 다르게 생겨서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시 가서 가만히 쳐다보는데 '아빠, 난데 왜 못 알아봐' 이러는 것 같았다."

 지난 17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0부(이은희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2차 변론기일에서 당사자 신문을 위해 출석한 '예은 아빠' 유경근(48)씨는 예은이의 시신을 본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흐느꼈다. 

 유씨는 세월호 참사 당시의 상황을 촬영한 동영상을 법정에서 공개했다. 또 여러 번 목이 메인 채 가슴 속 이야기를 쏟아냈다.

 유씨는 "떠올리지 않으려 해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면서 "증언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최순실씨는 어제 일도 기억을 못한다고 하지만, 저는 날이 갈수록 기억이 또렷해져서 힘들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러면서 "구조됐다던 사람들을 태운 차량에 예은이가 올 줄 알았는데 없었다"면서 "혹시 예은이가 있냐고 물어봤는데 한 아이가 '얘가 예은이 봤대요'라고 전했다. '예은이가 담요를 뒤집어쓰고 꼼짝없이 있었다. 예은이가 곧 올 것 같다'고 전했는데…"라면서 말을 더이상 잇지 못했다.

 방청석에서 재판을 지켜보던 세월호 유족 100여명도 함께 흐느꼈다. 곳곳에서 울음과 탄식이 터져 나왔다.

 유씨는 "세월호 유족들이 국가와 청해진 해운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낸 것을 두고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다"면서 "우리는 이 정부가 세월호 참사를 바라보고 있는 시각 자체를 바꾸고 싶다. 지금까지도 정부는 세월호 참사를 바다에서 우연히 일어난 교통사고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다"며 울분을 토했다.

 이어 "이것은 위자료의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며 "정작 진상규명에 들어가니까 '교통사고인데 뭘 조사합니까' '해경이 구하지 않은 것을 대한민국 전 국민이 다 봤는데 밝힐 게 뭐 있냐'는 게 정치인들의 시각이다. 정부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다하지 않은 만큼 엄중한 책임을 묻겠다"고 강조했다.

 유씨의 진술은 3시간 넘게 진행됐다. 법정에서는 어느 누구도 유씨의 이야기를 제지하거나 중단시키지 않았다. 말하는 사람, 듣는 사람 모두가 숙연해지는 자리였다.

 세월호 유족들은 유씨가 증언하는 내내 숨죽여 눈물을 흘렸다. 

 유씨에 대한 원고 측 대리인의 신문이 다 끝난 뒤에야 이은희 부장판사는 말문을 열었다.

 이 부장판사는 "법정에서 증언하기 어려운 내용일텐데 이렇게 증언해줘서 고맙다"며 따뜻한 위로를 건넸다.

 이어 "유씨가 관련 기관에서 진술한 적이 없기 때문에 끝까지 들었다"면서 이례적으로 당사자 신문을 길게 진행한 이유도 밝혔다.

 이 부장판사는 피고 측 대리인에게도 반대신문을 할지 여부를 놓고 의사를 거듭 확인하면서 공정한 재판 진행에 힘썼다.

 그러나 피고 측 대리인은 "생략하겠다"면서 유씨에 대한 반대신문을 아예 포기했다.

 이 같은 여성 부장판사의 모습은 박근혜 대통령과는 대조적이었다. 

 오늘이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1010일째 되는 날이지만, 박 대통령의 '세월호 7시간'을 둘러싼 진실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진실 규명보다 책임 회피, 말 바꾸기에 급급한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관계자들의 발언은 세월호 유가족과 국민의 공분만 더욱 키웠다. 

 이날 법정의 풍경을 거울삼아 정부는 세월호가 남긴 상처로 고통받는 유족들을 보듬어주고,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철저히 규명할 수는 없을까.  

 권력은 영원하지 않지만 '뿌린 대로 거둔다'는 인과응보는 만고불변의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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