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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느끼는 귀신들 나타났다, 예술청 미래상상 '텅·빈·곳'

등록 2019.03.21 16:5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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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일프로젝트 '아이고'

일일프로젝트 '아이고'

【서울=뉴시스】 이재훈 기자 = 기억에 새겨진 공간은 항상 낭만적이다. 귀신 출몰 얘기가 끊이지 않던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역시 마찬가지다. 1989년 김옥랑 대표가 세운 국내 첫 민간 복합문화공간. 연면적 7274.9㎡로 지하2층~지상6층 규모다.

2007년 이 극장 소극장에서 '우먼 인 블랙(The Woman In Black)'을 공연할 당시 대기실 등지에서 귀신을 봤다는 목격담이 잇따랐다. 영국 작가 수전 힐의 소설을 각색한 연극으로 미친 여자의 환영에 사로잡힌 남자의 이야기다. 참여한 배우와 스태프들은 섬뜩할 수밖에 없다. 당시 관객 사이에서도 귀신을 봤다는 소문이 실체 없이 피어올랐다.

배우 조정석은 2005년 이 공연장에서 뮤지컬 '그리스'를 공연할 당시 저녁 공연을 기다리며 낮잠을 청하다 귀신을 봤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동숭아트센터 지하에는 박수 치는 '군인 귀신'이 산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러한 구전 귀신뿐 아니다. 21일 오후 동숭아트센터에 다시 귀신이 출몰했다. 1층 로비에서 과거 대극장으로 내려가는 나선형 모양의 계단 사이에 인디듀오 '미미 시스터즈'를 연상케 하는 모습의 두 여성이 누워 있었다. 짙은 분홍 의상을 입고 흰 벙거지를 눌러 쓴 이들은 "아이고 아이고"라며 흐느꼈다.

극장이 원활하게 운영되도록 전기, 난방 등의 시설을 담당하는 각종 기계 장치가 놓인 지하에서도 이들이 갑작스레 출현했다. 공연장 곳곳의 영상에 선보이는 귀신들의 해프닝을 오프닝에서 재현하는 일일댄스프로젝트의 댄스 필름 무용퍼포먼스 '아이고'의 장면들.

과거 공연장 미화원들이 쉬던 공간에서 문을 열고 나오는 장면에서는 벽에 비쳐진 영상으로 인해, 마치 벽을 부수고 나오는 듯한 착각도 일으켰다.
일일프로젝트 '아이고'

일일프로젝트 '아이고'

귀신들을 따라 공연장 구석구석을 살피니, 공간의 역사가 촉각으로 와 닿는다. 몸으로 부딪혀 배우는 역사의 행간이라고 할까. 번지르르한 겉모습보다, 어지럽게 널려 있는 삭막한 공간에서 진짜 공연장의 기운이 느껴진다.

공간을 옮겨 다니며 관객의 체험을 극대화하는, 관객 몰입형 공연 '이머시브 시어터'를 연상케 하는 이 퍼포먼스는 서울문화재단의 '예술청 공론화 프로젝트' 중 하나.

'예술청'은 동숭아트센터를 매입한 서울문화재단이 2020년 10월 재개관을 준비하며 붙인 이 공간의 새 이름이다. 리모델링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올해 7월 말까지 이 공간의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기약하기 위한 예술활동을 논의하고 상상할 수 있는 자리가 '예술청 공론 프로젝트'다.

이 프로젝트의 하나로 예술인에게 ‘빈 공간’을 잠시 내어줘 공간활용 실험을 하게끔 만든 것이 '예술청 미래 상상 프로젝트-텅·빈·곳'이다. 시범 운영으로 24일까지 일일댄스프로젝트를 비롯, 다양한 장르예술가 12팀이 참여한다.

영화감독 백종관은 과거 영화 마니아들 사이에 유명했던 동숭아트센터 극장 '하이퍼텍나다'를 활용한다. 이 공연장 1층에 있던 하이퍼넥나다는 한 면이 통유리로 돼 있어, 영화 상영 직전까지 마당에 놓여 있는 장독대를 볼 수 있던 고즈넉한 영화 공간이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전동 커튼이 서서히 닫히면서 암흑과 설렘이 함께 찾아오는 추억의 장소였다.
옛 동숭아트센터 ⓒ서울문화재단

옛 동숭아트센터 ⓒ서울문화재단

아일랜드 출신 작가 새뮤얼 베케트가 죽기 전에 한 말인 '어떻게 말해야 할까'를 제목으로 내세운 백 감독의 영상은 미완의 영상들을 상영한다.
 
이와 함께 대학로와 극장이라는 장소를 ‘극’과 ’장‘이라는 장소로 해부·나열하며 방향성을 모색하는 창작그룹 노니의 '극, 장 2019', 남겨진 공간 속 버려진 것들로 모여진 예술가들의 가상의 작업실 금일휴업의 '금일휴업-야리따이호다이', 무용과 연극의 경계를 넘나드는 너나드리 프로젝트의 '시점-움직이는 사물과 공간' 등도 눈길을 끈다.

보물찾기하는 것처럼 공연장 곳곳에 숨겨 놓은 식재료를 찾아 옥상으로 가면, 그 재료로 밥을 지어 나눠먹을 수 있는 '제작백가'의 '내손으로 한끼 식사'도 흥미롭다.
파운드 스페이스 ⓒ서울문화재단

파운드 스페이스 ⓒ서울문화재단

과거를 버리지 않고 현재에 모은 뒤 미래를 위한 재료로 활용하는 예술. 공연장이 단지 무생물 공간이 아닌 살아 있는 생물임을 깨닫게 하는 퍼포먼스들이다.

개방형 라운드테이블 '동숭예술살롱'은 전날부터 열렸다. 7월24일까지 격주 수요일 오후 3시에 예술청에서 열린다. 각 분야의 전문가를 섭외해 2020년 완공되는 예술청의 가치와 운영모델 제안을 위한 발제와 토론 등을 한다. 동숭아트센터의 역사, 외부 공간운영사례(국내외) , 운영조직 구축, 운영성과 관리방안 등 예술청 조성과 운영모델 제안 등이 주제다. 서울문화재단은 서울시, 전문가 추천을 받아 8인의 예술청 기획단을 구성했다.

서울문화재단 김종휘 대표이사는 "대학로에 위치한 동숭아트센터가 가졌던 예술적, 문화적 의미를 잘 알고 있기에 해당 공간에 대한 예술가와 시민들의 다양한 의견을 들을 수 있는 예술청 공론화 프로젝트를 기획했다"고 말했다.

"안전한 공간에서 안심해도 되는 관계를 통해 향후 민·관이 함께 안녕할 수 있는 미래를 위한 협치모델을 만들려 한다. 사전 시범운영 프로젝트 종료 후에도 예술청 공간활용에 대해 예술가들이 상상하고 논의할 수 있는 자리를 지속적으로 마련할 것"이라고 전했다.

예술청은 설계공모를 거쳐 '파운드 스페이스(Found space)'라는 콘셉트로 리모델링을 준비 중이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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