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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도국 지위 타협점 못찾은 정부…농민단체 행동 나설 듯

등록 2019.10.23 05: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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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23일로 미국이 제시한 시한넘겨…농업계 반대입장 고수

"이미 결론 다지어놓고 협상?"…"6대 요구안 없다" 언급도

"식량안보 문제로 봐야…집 짓는데 설계도면도, 돈도 없는 꼴"

【무안=뉴시스】변재훈 기자 = 전남 지역 6개 농민단체들이 21일 오전 무안군 삼향읍 전남도청 앞에서 정부의 '세계무역기구(WTO) 개발도상국 지위' 포기 검토 움직임에 반발하며 농산물 값 안정대책 수립 등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2019.10.21. (사진=전국농민회 광주·전남연맹 제공)photo@newsis.com

【무안=뉴시스】변재훈 기자 = 전남 지역 6개 농민단체들이 21일 오전 무안군 삼향읍 전남도청 앞에서 정부의 '세계무역기구(WTO) 개발도상국 지위' 포기 검토 움직임에 반발하며 농산물 값 안정대책 수립 등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2019.10.21. (사진=전국농민회 광주·전남연맹 제공)[email protected]

【세종=뉴시스】장서우 기자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7월 우리나라에 세계무역기구(WTO) 상 개발도상국 지위를 유지할 지 여부를 결정하라고 제시한 90일간의 시한이 23일로 도래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같은 언급이 있은 후 석 달이 지났고, 우리 정부는 결국 이 기한을 넘겼다. 다만 적어도 이달을 넘기지는 않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우리나라는 당초 농업 분야에서만 개도국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중화학 공업 위주 성장 정책을 펴는 상황에서 농업만큼은 개도국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는 논리에서였다. 이를 포기하면 농업 분야에 제공되는 관세, 보조금 등 혜택이 더 이상 주어지지 않게 된다.

정부는 농업계와의 이견을 좁히기 위해 간담회 등 자리를 마련했지만, 가시적인 성과는 없었다. 일부 농업 단체는 정부가 이미 결론을 정해두고 형식적인 모양새를 내고 있다며 투쟁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지난 22일 오전 김용범 기획재정부 1차관은 한국농축산연합회·한국농업인단체연합·축산관련단체협의회·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한국여성농업인중앙연합회·한국농촌지도자중앙연합회·한국쌀전업농중앙연합회 등 농업계 인사들과 간담회를 열었다. 기재부는 우리 농업의 현실과 정부의 농업 정책에 대한 농민들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한 자리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실제 간담회는 의견 청취보다는 개도국 지위를 포기하겠다는 결론을 미리 지어두고 농업계와 협상하는 쪽으로 진행됐다는 전언이다. 간담회에 참석한 한 농민 단체 대표 C씨는 통화에서 "서로 입장이 어떤지 보자는 간담회로 알고 갔는데, 협상을 해서 합의를 보자는 식이었다"며 "정부에서 어떠한 대응책도 내놓지 못한 상황에서 협상을 할 단계는 아니었다"고 불만을 드러냈다.

간담회를 주재했던 김 차관은 회의 직후 기자들과 만나 농업계에서 제시한 6대 요구 사안을 논의해보겠다고 밝혔다. 요구 사안은 공익형 직불제로의 개편에 필요한 예산을 내년 예산안 기준 2조2000억원에서 3조원까지 확대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와 함께 농업·농촌을 지원하기 위한 예산의 비중을 전체 정부 예산의 3%에서 4~5%까지 늘리는 것이 큰 틀이다. 다만 C씨는 "요구안이 받아들여질 분위기는 아니었다"고 전했다.
【서울=뉴시스】 박영태 기자 = WTO 개도국지위 유지관철을 위한 농민공동행동 회원들이 18일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WTO 개도국 지위 유지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19.10.18.since1999@newsis.com

【서울=뉴시스】 박영태 기자 = WTO 개도국지위 유지관철을 위한 농민공동행동 회원들이 18일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WTO 개도국 지위 유지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email protected]

무엇보다 이 요구안은 간담회가 마무리되기 전 먼저 퇴장한 7개 단체 대표들과는 합의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애초에 6대 요구안을 따로 정리해서 제시하진 않았다"고 언급한 농민 단체 대표도 있었다. 또 다른 단체 대표도 "논의된 바 없다"고 전했다.

분명한 것은 농업계가 지속해서 무조건적으로 개도국 지위 포기에 대한 반대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는 것이다. C씨는 "정부에서 농업에 당장 피해가 없다고 하는데, 피해가 없다면 그 동안 왜 막아놨겠나"라고 반문하며 "상식적으로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어차피 정부는 자기 갈 길을 갈 것이고, 우리도 우리대로 집회 등을 통해 투쟁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개도국 지위를 내려놓더라도 당장의 영향은 없다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관세·보조금 수준을 변경하려면 차기 도하개발어젠다(DDA) 협상이 재개돼야 하는데, 2008년 4차 수정안(Rev.4) 채택이 불발되면서 그 이후 사실상 동력을 잃은 상태다. 이 문제를 둘러싼 선진국과 개도국 간 이견도 첨예하고 가장 중요한 국가인 미국 역시 협상 자체에 소극적이다.

농업계도 이를 알고 있다. 결국 지금의 갈등은 1995년 이후 우리 농업의 상황이 크게 나아지지 않았던 데 따른 농민들의 울분이다. 간담회에 참석한 농민 단체 대표 N씨는 "한·중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면서 매년 1000억원씩 10년 안에 1조원 규모로 상생기금을 마련한다고 했지만, 3년간 1000억원도 못 했다"며 정부가 단지 '요식행위'를 벌이고 있을 뿐이라고 비판했다.
【서울=뉴시스】김용범 기획재정부 1차관이 21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혁신성장 민관협의회’를 주재,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2019.10.21. (사진=기획재정부 제공)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김용범 기획재정부 1차관이 21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혁신성장 민관협의회’를 주재,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2019.10.21. (사진=기획재정부 제공) [email protected]

N씨는 "(개도국 지위 포기를) 할 땐 하더라도 내부적으로 같이 가자는 것"이라며 "이 문제는 농민들만의 것이 아니라 식량 안보 차원의 문제"라고 했다. 그는 "산업부에서 '개도국 지위 포기'라는 집을 짓는다면 농식품부에선 그에 맞는 설계도면을 만들고 기재부에선 예산을 마련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마련된 것이 없으니 집을 짓는 업자격인 농업인들은 농산물을 생산할 수가 없다"고 비유했다.

개도국 지위 포기 여부를 최종 결정짓는 회의체인 대외경제장관회의는 이르면 오는 25일 열릴 가능성이 높다. 미국을 방문 중인 유명희 통상교섭본부장은 미 무역대표부(USTR) 등과 접촉해 관련 내용을 논의할 것으로 전해졌다.

정인교 인하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통상 환경으로 보면 개도국 지위를 고수하긴 어렵다"며 "새로운 협상이 시작돼서 끝날 때까지는 아무런 피해를 예상할 수 없기 때문에 대책을 미리 내놓는 건 불가능한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당장의 피해가 없는데 예산을 반영할 수도 없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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