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 국방/외교

[6·25 60주년]기억해야 할 전쟁사(18) '흥남철수작전'

  • 이메일 보내기
  • 프린터
  • PDF
등록 2010-07-08 00:14:40  |  수정 2017-01-11 12:08:55
associate_pic
【서울=뉴시스】정리 / 이인준 기자 

 18. 흥남철수작전 (1950년 12월5일 ~ 24일) : 흥남을 떠나 부산으로

 당시 밀려드는 중공군의 공세에따라 국군과 유엔군은 철수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1950년 11월27일 유엔군 총사령부는 어쩔 수 없이 국군과 유엔군에게 전면적인 후퇴를 지시하게 됐다.

  제10군단장은 미제3사단, 미 제7사단과 국군 제1군단을 함흥 일대에 배치하고 교두보를 구축하도록 했다. 미 제3사단이 연포-오로리 방향, 미 제7사단이 흥남 북쪽 방향, 국군 제1군단이 함흥 동쪽과 동해안을 보고 부대를 이동했다.

 유엔군은 작전수행을 위해 3개의 작전 통제선을 설정하고 단계적으로 철수하도록 했다. 철수하면서 북한군과 중공군의 공격을 방어하고 아군이 철수할 시간을 벌도록 한 것이다. 엄호하기 위해 흥남 부근 해상에 항공모함 7척, 전함 1척, 순양함 2척, 구축함 7척, 로켓포함 3척이 배치됐다.

 짧은 시간 내 많은 인원과 물자를 배로 날라야 했다. 10만5000명, 차량 1만8422대, 전투물자 3만5000톤. 당시 미 10군단 철수 병력과 물자였다. 미 해군은 해상 이동을 위해 125척의 수송선을 동원했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연포비행장을 통해 수송기도 지원됐다.

 피난민도 몰려들었다. 흥남부두는 접근하는 피난민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제1군단장 김백일 장군은 "우리는 어떻게든 철수하겠지만, 국군이 북진할 때 열광적으로 환호하던 지역 주민들은 이제 반동으로 몰리게 생겼다. 그러니 미 제10군단에 이들의 수송 지원을 협조해달라"고 정일권 총 참모장에게 요청했다.

 결국 미 제10군단에 받아들여져 9만1000명의 피난민은 군과 함께 남으로 내려오게 됐다.

 하지만 모든 피난민을 데려갈 수는 없었다. 당시 참전 해병 장병들은 "자식만이라도 데려가 달라고 애원하는 피난민을 두고 떠나는 것이 비통했다"고 증언한다.

 수도사단 제18연대가 10일 가장 먼저 부산으로 향했다. 이어 장진호 전투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던 미 제1해병사단, 미 제7사단, 미 제10군단 등도 15일 철수를 시작했다.

 흥남 지역으로 집결한 국군과 유엔군은 함흥 외곽지대에 타원형으로 저지진지를 형성하고 있었다. 각 부대는 점령지역을 교대해가며 차례차례 수송선에 탑승해 부산으로 향했다. 북한군, 중공군과 여러차례 교전을 치르기도 했으나 대규모의 병력은 아니었다. 정찰 목적의 부분적인 공격이었다.

 24일 모든 주력 병력은 흥남부두에서 수송선 탑승을 완료했고, 이로써 모든 부대들은 부산으로 향했다. 미 제10전투공병대대와 해군 수중폭파대는 흥남항을 폭파하고, 광범위한 함포 사격으로 적 부대의 접근을 차단했다. 이 때 200톤의 탄약과 얼어붙은 폭약, 500개의 포탄, 200여 드럼의 유류가 함께 화염에 휩싸였다.

 "크리스마스 이브의 흥남해안선은 불바다 그대로였다."

 흥남철수 광경을 페렌바크 미 육군중위는 이처럼 묘사했다.

 흥남철수작전은 결과적으로 이례적인 작전이었다. 많은 수의 병력과 물자들을 후방으로 안전하게 피신시킬 수 있었다. 이는 육군, 해군, 공군 등 모든 군의 합동작전으로 가능했다. 이로써 국군과 유엔군은 전투력을 보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두고 온 피난민은 물론, 굶주림과 추위, 질병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부산으로 향하는 배 안에서 죽어가는 등 흥남철수작전은 많은 비극을 낳기도 했다.

 ijoinon@newsis.com
  • 이메일 보내기
  • 프린터
  • PDF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늘의 헤드라인

정치 핫 뉴스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