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항쟁' 6일의 기록…명동성당 일지 32년만에 공개
1987년 6월10일~15일 명동성당 안팎 상황 일지
'상계동철거민 출정식'에서 '경찰 완전 해산'까지
동시다발적 시위, 경찰 진압 상황 등 시간순 서술
시민들 음식·의약품 등 지원 쇄도…제보도 잇따라

【서울=뉴시스】심동준 기자 = 1987년 6·10항쟁 당시 서울 중구 명동성당 안팎에서 벌어진 항쟁을 기록한 상황일지. 6월10일~15일 상황에 대한 기록으로, 사진은 12일자 일지 일부 발췌. 2019.06.05 (사진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s.won@newsis,com
5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공개한 74페이지 분량의 '명동성당 농성투쟁 상황일지' 등에는 1987년 6월10일~15일 벌어진 투쟁 현장 상황이 담겨 있다.
일지에는 명동성당 안팎 농성투쟁 현황, 부상자 현황, 지원물품 현황 등이 적혀 있다. 항쟁 초기 명동성당 청년단체는 사제관 신부 방에 상황실을 설치했는데, 신학생 등이 시간·제목·내용·비고의 형태로 상황일지를 작성했다고 한다.
일지는 1987년 6월10일 오후 4시 상계동철거민 출정식, 오후 5시 시내 시위대가 성당 내로 진입하고 경찰과 대치를 시작한 상황 등으로 시작된다.
같은 날 후 9시30분 시민·학생 1000여명이 경찰과 투석전을 전개하면서 조금씩 진출하는 등 항쟁 초기 모습도 있다.
11일자 일지에는 경찰이 해산 협상 도중 시민들을 상대로 최루탄을 다량 난사하는 등 점차 진압이 격화되는 양상을 보여주는 대목도 있다.
특히 12일부터 일지에는 시민·학생들의 제보, 지원 물품과 방법, 시위 참가자 수가 급증하는 내용 등이 언급됐다. 이는 6·10 항쟁이 대대적인 민주화 투쟁으로 변모하는 양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당시 상황실에서는 시민들, 서울대·연세대·고려대·서울시립대·경희대·동국대·총신대 등 학생들과 시위 및 진압 상황을 공유하고 전파한 것으로 보인다. 일지에는 이들과 상황을 공유했다는 내용은 물론 피해 상황에 관한 내용도 적혔다.
12일자 일지에는 '약 2000여명이 횃불을 들고 백병원 방향에서 시위', '한대생 5000여명이 학내 집회', '롯데 앞 1만여 군중, 시립대 외 7개 학교 을지로 3가 약 1만여 군중' 등 당시의 시위 모습을 가늠할 수 있는 지점이 다수 있다.
13일도 다수의 장소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는 상황이 언급됐고, 상황 변화에 따라 짧게는 몇 분 단위로 기록됐다. 사제단과 시위대 대표의 협의 내용, 사제단과 시경 국장과 대화 내용, 청와대의 강경 입장 등이 다뤄져 있다.
또 오후 9시16분 미도파 백화점 앞에서 삼청교육대와 전경들이 시위대를 무참히 구타했다는 내용, 9시20분 부분에는 뉴스에서 "철저히 배후를 규명하겠다"는 내용이 나왔다는 기록이 있다.
14일에도 성당 미사 및 투쟁, 시국대토론회, 연좌시위 등의 상황이 다뤄졌다.
자정부터 신부 40명, 수녀 200여명이 학생들과 함께 하겠다는 '민주화를 위한 철야 기도회'가 열렸음이 적시됐으며, "인의 장벽이 되겠다"는 사제단의 제안을 토대로 바리케이드가 철거된 내용도 담겼다.
당시 사복경찰이 감시하다가 시민들에게 적발된 상황, 고 이한열 열사가 산소호흡기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는 상황이 전파된 내용 등도 담겼다.
공개된 문건 가운데서는 부상자 등 피해 기록도 있는데, 15일 오전 10시 기준 부상자 현황은 중상 27명, 경상 224명이었다.
부상내용별로 수포 환자 130명, 파편부상 5명, 찰과상 27명, 눈부상 5명, 창상 3명, 골절상 8명 등 구체적으로 언급되기도 했다.
12일 오후 1시~2시에는 전날 시위 중 눈에 직격탄을 맞은 당시 숭실대 영문과 4학년 임병진씨에 대해 수술을 하더라도 시력 회복은 힘들 것이라고 했다는 주치의의 말과 함께 임군의 병상 메시지도 기록돼 있다.
일지에 적힌 당시 임군의 메시지는 "내가 비록 실명할지라도 군부독재의 종식과 새나라 민주정부의 광명이 온다면 나의 눈에도 광명을 찾게 되는 것", "흔들림 없이 열심히 싸워줄 것을 당부"였다.
당시 시위 과정에서 시민들의 제보, 지원도 잇따랐다는 내용도 있다. 빵, 우유, 약품, 휴지, 알코올, 사탕 등은 물론 고등학교에서 도시락을 지원했다는 내용 등이 다수 존재한다.
또 시민과 학생들이 필요한 물품을 묻고 지원을 했다거나 시위 상황 관련 제보를 한 내용들도 일지 곳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일지에는 15일 오전 10시 기준 성금이 현금 2039만9690원, 48달러, 1000엔, 토큰 6개, 회수권 6장이 들어왔다고 집계됐다.
접수자별로는 단체 성금이 28건, 개인적으로 성금을 낸 사람이 1680명으로 적혔다. 물품을 접수한 단체는 45곳, 개인 차원의 물품 지원은 350명이 한 것으로 언급됐다.
일지의 시간순 기록은 15일 0시 경찰 병력이 완전 철수했다는 내용으로 마무리 됐다.
다만 일지 후반에는 미국 뉴욕의 교포·인근 샐러리맨과 식당 주인·여고생들의 지지문 등 당시 명동성당 농성투쟁을 지지한 시민들의 생생한 목소리가 첨부돼 있다.
해당 일지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http://archives.kdemo.or.kr/main;jsessionid=A04B2D4C5A3522A29F4ED17A253EE80A)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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