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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돌 LG]구인회→구자경→구본무로 이어진 3대 경영…글로벌 핵심기업으로 도약

등록 2017.03.27 06: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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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용 출금//LG그룹 여의도 사옥

【서울=뉴시스】김동현 기자 = LG가 27일로 창립 70주년을 맞았다.

 1947년 고(故) 연암 구인회 회장이 부산 서대신동에서 락희화학공업사(현 LG화학)을 설립, 화장품 럭키크림을 생산하며 사업을 시작한 LG는 이제는 전자를 중심으로 명실상부한 글로벌 핵심기업으로 자리잡고 있다.

 70년 세월이 지난 현재, 3억원이던 매출은 지난해 약 150조원으로 성장했다. 종업원수도 창립 당시 럭키크림을 생산하기 위해 90평 규모의 공장에서 20명 정도가 일하기 시작해 현재는 약 22만2000명이 국내(13만7000명)와 해외(8만5000명) 곳곳에서 근무 중이다.

 3월27일로 창립 70주년을 맞은 LG는 올해를 지난 기간의 성과를 기반으로 100년을 넘어서는 영속기업, 글로벌 최고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해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는 분기점으로 삼을 계획이다.

 당시 근무하던 종업원 수는 20여명에 불과했지만 럭키크림은 '동동구리무'라는 애칭을 얻어 불티난 듯 판매됐고 창업 기업으로는 드물게 매출 3억원을 달성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고 구인회 회장은 럭키크림 사업 성공을 발판으로 칫솔, 세숫대야, 식기 등으로 생산 품목을 확대하며 사업을 확장해나갔다.

 1954년에는 부산진구 연지동에 공장을 오픈, 비닐원단 및 플라스틱제품 제조시설을 갖췄으며 이듬해인 1955년에는 럭키표 치약을 생산, 국민적 사랑을 받는 기업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전자기업으로의 발돋움도 고 구인회 회장의 추진력이 일궈낸 작품이다.

 그는 1958년 LG전자의 모태가 되는 금성사를 설립, 국산 라디오 생산에 박차를 가했고 1959년 제 1호 국산 라디오인 'A-501'을 생산, 금성사는 이후 1966년 국내에서 최초로 흑백TV 생산에 성공하기도 했다.

 고 구 회장은 에너지 사업 개척에도 적극적이였다. 그는 미국 칼텍스와 5대 5 비율로 합작해 만든 호남정유를 설립, 우리나라 산업의 근대화를 이끌었다는 평을 받았다.  

 연암 구인회 회장이 현 LG 그룹의 모태를 이끌었다면 변화와 도약의 전기를 마련한 것은 그의 장남인 구자경 회장(LG그룹 명예회장)이라는 평가가 높다. 

 구자경 회장은 '안정적인 성장'이라는 기본 방침아래 화학사업과 전자산업을 양축으로 각종 사업에 뛰어들었고 성공을 이뤄냈다.

 석유화학, 정밀화학, 에너지 등 현재 LG 그룹이 유지하고 있는 사업들의 기반은 구자경 회장 시절 만들어진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구자경 회장 시절 그룹명은 '럭키', '럭키금성 등으로 변경되기도 했다.

 1995년 3대 회장으로 경영 바통을 이어받은 구본무 회장은 '일등 LG그룹'을 만들기 위한 시기로 평가를 받는다.

 LG라는 이름은 구본무 회장이 취임한 이후 만들어졌다. 그는 1995년 회장으로 취임하기 전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해 'LG'라는 그룹명을 사용했다.

 구본무 회장이 취임한 이후 이동통신, LCD, 반도체, 에너지 및 유통사업에 도전, 큰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이후 2003년에는 국내 대기업 최초로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해 투명한 지배구조를 갖췄다. LS그룹과 GS그룹의 계열분리로 구ㆍ허 양가의 57년 동업경영도 마감했다. 또한 지주사 체제로 전환했다. LG그룹의 지주사 체제 전환은 순환출자 고리를 기업 스스로 끊고 사업에만 열중하기 위해 내놓은 자구책으로 통한다.

 구본무 회장 체제 이후 LG는 전자, 화학, 통신·서비스 등 핵심사업으로 육성해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고 있다.

 70주년을 맞은 LG는 '혁신과 변화를 통해 영속하는 기업'이라는 비전을 제시했다. 프리미엄 제품 중심으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구축해 수익성을 높이고, 자동차 부품과 에너지 솔루션 등 신성장 사업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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