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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서 만난 영조시절 무관초상 '조완 좌상'···이태호 교수

등록 2017.06.07 15:15:44수정 2017.06.07 21:3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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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조완 좌상', 1774년 작, 비단에 수묵채색, 화면 : 66.4x43.4cm, 족자전체 : 112x58cm, 뉴욕 개인소장

【서울=뉴시스】'조완 좌상趙坐像', 1774년 작, 비단에 수묵채색, 화면 : 66.4x43.4cm, 족자전체 : 112x58cm, 뉴욕 개인소장

【서울=뉴시스】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초빙교수 = 나는 2017년 4월 9일 뉴욕 첼시에 있는 미술품보존연구소 Fine Art Conservation Group(소장:김수연)을 방문했을 때, 조선 후기 무관초상화 한 점을 만났다. 오사모(烏紗帽)를 쓰고 해치 흉배를 단 관복차림으로, 약간 우향으로 무릎을 꿇고 앉은 전신 좌상이다.

 새롭게 발굴한이 초상화에는 주인공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으나, 흥미롭게도 동일인물이 포함된 무관초상화첩이 존재한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등준시무과도상첩登俊試武科圖像帖》이 그것인즉,이 전신 좌상은 무과도상첩에서 세 번째에 실린 조완(1724-?)의 반신상과 같은 사람임이 확인된다. 이 무관의 초상화는 '조완 좌상'이랄 수 있겠다.
 
《등준시무과도상첩》은 영조 50년(1774년) 1월 15일(음력)에 시행했던 무과 과거시험에서 합격한 사람들의 반신상을 합첩合帖한 것이다. 영조의 어명으로 문무과 합격자의 초상화첩 문무과도상첩이 각각 제작되었으며, 당대의 화원들이 참여하여 초상화를 그렸다. 조덕성, 홍윤, 이득신, 홍양한(홍양호), 홍명한, 안집, 김응순, 이만회, 이휘중, 이해중, 윤상후, 송재희, 윤양후,조환 등 문과 급제자 15명의 문과도상첩은 현재 전하지 않고, 이춘기, 민범수, 조완 등 무과급제자 18명의 초상화첩만 전해온다.

‘등준시’는 현직관료들에게 일종의 승급시험처럼 치르게 한 과거시험으로, 세조11년(1465)에 이어 영조대에 경복궁 근정전 터에서 두 번째로 치러졌다. 조완이 참여했던 무과시는 130보에서 화살을 쏘아 과녁 한 중앙을 맞추는 것이었다.

◇《등준시무과도상첩》의 내력과 초상화법

‘등준시무과도상첩登俊試武科圖像帖’의 앞면에는 영조의 ‘전교傳敎’, 합격자 명단인 ‘등과시 무과방목登俊試武科榜目’, 그리고 초상화들의 맨 뒤에는 초상화를 그리는데 관여한 ‘화원좌목畫員座目’이 밝혀져 있다.

영조가 시험 3일 뒤 갑진년(1774) 정월 18일에 내린 ‘傳敎’는 “전일에 치룬 이번 등준시는300년 만에 다시 갖는 경사이다. 문과 15명의 도상은 예조에, 무과 18명의 도상은 병조에서수장하라. 8개월 후 전례대로 의정부에서 연회를 내리겠다. 정월 25일 약방 진료시 문무과도상첩 한 짝을 들여라’라는 내용이다. ‘傳敎’에 이은 갑과 1인, 을과 3인, 병과 14인의 ‘登俊試武科榜目’ 명단은 아래와 같다.

登俊試武科榜目
甲科一人
嘉義前主簿 李春琦 聖章 丁巳生 丙子武科 咸平人
乙科三人
折衝前水使 閔範洙 字 君式 丁酉生 丁卯武科 驪興人
嘉善前兵使 趙 字 士瞻 戊辰武科 平壤人
嘉善咸春君 李昌運 聖喩 癸巳生 咸平人
丙科十四人
折衝前兵使 安宗奎 字 士昌 癸卯生 辛未武科 竹山人
折衝前水使 崔朝岳 字 覲鄕 己未生 辛巳武科 海州人
正憲行副司直 李章吾 字 子明 甲午生 辛酉生員 壬戌武科 全州人
嘉義副摠管 崔東岳 字 ㅇㅇ 丙寅生 壬午武科 海州人
嘉善行副司直 李潤成 字 集卿 己亥生 壬戌武科 全義人
嘉善行副護軍 李國賢 字 士賓 甲午生 庚申武科 全州人
嘉善行副護軍 柳鎭夏 字 子華 甲午生 甲戌武科 晉州人
嘉善行副護軍 閔趾烈 字 美卿 丁未生 辛未武科 驪興人
嘉善行副護軍 李明運 字 聖敏 丙申生 己未武科 咸平人
嘉善行副護軍 李邦一 字 貫甫 甲辰生 丙寅武科 全義人
嘉善行副護軍 李達海 字 汝大 辛亥生 癸酉武科 德水人
嘉善行副護軍 金相玉 字 溫叔 丁未生 庚午武科 海豐人
嘉善行副護軍 趙㠎 字 成之 乙卯生 己卯武科 平壤人
折衝前兵使 田光勳 字 楊鄕 壬寅生 庚午生員 癸酉武科 潭陽人

앞의 전교에 따르면, 과거시험이 끝난 후 10일 만에 영조가 초상화첩을 열람하게 된 셈이다.

최소한 문무과 급제자 33명의 반신상을 초본이라도 만들어야 했을 터인즉, 상당히 빠르게 제작을 진행하였던 듯하다. 화첩의 맨 뒤 ‘화원좌목畫員座目’에는 급하게 이 도상첩을 제작한 화원 7명의 명단이 밝혀져 있다. 총책임자인 ‘감동관監董官’은 한종유韓宗裕가 맡았고, 그 외에 한종일韓宗一, 신한창申漢昌. 장홍張糸弘, 김종린金宗獜, 최득현崔得賢, 한정철韓廷喆 등 참여화원 7명의 명단이 순서대로 밝혀져 있다. 제작을 살핀 ‘간역관看役官’은 윤철세尹喆世, 글씨를 쓴 ‘사자관寫字官’은 최종혁崔宗赫이었다.

 화원들 가운데 한종유는 1773년 영조 어진제작에 지목되기도 했으며, 1781년 정조어진 제작시 동참화사인 김홍도와 함께 주관화사에 발탁될 정도로 당대 최고였다. 한종유가 그린 초상화 대표작으로는 변상벽을 대신해 그린 <김원행 초상>(연세대학교박물관 소장)이 알려져 있다.

복건에 심의를 입은 반신상은 후덕하고 서늘한 문인의 기상을 잘 살린 걸작이다. 한종유의 친동생인 한종일은 1791년 정조어진 제작에 수종화사로 참여했다. 또 7명의 화원들이 대부분 의궤제작에 참여했던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영조·정조 시절에 활동했던 주요 화원들이 발탁되었음을 알 수 있다.

화첩의 18명은 모두 오사모를 쓰고 해치나 호랑이 흉배가 딸린 짙은 청록색 단령포를 걸친무관복 차림이다.  7명의 화원이 참여한 만큼 표현기법에 약간씩의 차이를 보인다. 크게 4유형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첫째 유형은 얼굴을 묘사할 때 주름 따라 음영을 살짝 넣고, 옷 주름의 입체감을 비교적 선명하게 넣은 경우이다. 민범수, 이창운, 민지열, 이명운, 김상옥, 전광훈 6명이 해당한다. 두번째는 첫째 유형과 옷 주름 묘사가 비슷하나, 비교적 강한 얼굴의 음영과 부분적으로 가미된 잔붓질이 특징적이다.

 조완 반신상을 비롯해서 이윤성, 이방일, 조집 4명이 해당한다. 여기의 조완과 병과 13등인 조집은 평양조씨에 이름이 ‘山’ 자 돌림이어서 친척 형제로 여겨진다. 셋째는 호랑이흉배를 단 안종규, 이국현, 이달해 3명이 해당한다. 이들의 경우 입체감이 두드러지고 육리문에 근사한 잔붓질의 얼굴 묘사에 비해, 옷 주름의 음영은 비교적 엷게 묘사했다.

네 번째는 앞의 세 유형과 한 방식이면서 조금씩 변형하거나 절충된 경우이다. 최조악, 이장오, 유진하, 최동악, 이춘기 5명의 초상화가 있다. 이러한 초상화법은 서양화의 영향이 뚜렷해지는, 1780-90년대 정조 시절의 노골적인 입체적 표현기법으로 옮겨가는 과도기 양상을 잘보여준다.

◇무관복장의 전신상 '조완 좌상'

무과시 과거시험에서 조완은 갑과, 을과, 병과 가운데 을과에 2등으로 합격했다. 이에 조완 반신상은 《등준시무과도상첩》에 갑과 1인이었던 이춘기, 을과 3인 가운데 1등이었던 민범수에 이어 2등에 해당해, 세 번째로 배치되어 있다.

【서울=뉴시스】 '조완 반신상半身像' 《登俊詩武科圖像帖》, 1774년, 비단에 수묵채색,47x35.2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서울=뉴시스】 '조완 반신상半身像' 《登俊詩武科圖像帖》, 1774년, 비단에 수묵채색,47x35.2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완은 1724년에 태어나 영조24년(1748) 정시무과武科에 급제한 뒤 관료생활을 하였다. 본관은 평양이고, 자字는 사첨士瞻이다.7) 벼슬은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通制使에 올랐다.

『일성록日省錄』 기사에 이름이 여러 번 보이며, 충무 세병관의 백화당을 1775년에 중수했다고 전한다. 아버지 조동점趙東漸(1700-1755) 또한 유명 무관이었다. 포도대장, 어영대장, 제주목사 등을 역임했고, 사후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8) 1739년 제주목사 시절 서문西門을 중수한 기록이 전한다.
'
조완 좌상'은 앞의 《등준시무과도상첩》에 실린 조완 반신상과 동일한 화가의 화법과 솜씨이다. 오사모에 해치 흉배가 달린 동일한 단령포 관복차림이며, 두 손을 검은색 단령포 소매 안에 넣어 가운데 모으고 양 무릎을 꿇고 정좌한 자세의 전신상이다. 앞의 초상화첩과 동일한 시기인 18세기 후반(1774년작) 도화서 화원 출신들의 초상화법이 잘 드러나 있다.
약간 우향한 자세, 뒷면에 흰색을 칠하고 그린 배채기법, 흉배와 관복 표현, 가볍게 입체감을 넣은 얼굴묘사의 음영기법 등은 손색없는 화원의 묘사기량을 보여준다.

 코가 직선적이며 길고, 깊은 안구 서클에 쌍꺼풀 진 눈, 굳게 다문 얇고 진한 갈색조 입술, 좌우로 날카롭게 뻗은 콧수염, 그리고 양 볼에 각이 진 모습은 무관답다. 다른 무관들에 비해서도 다부진 표정이 인상적이다. 50세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준수한 북방형으로, 얼굴이 갸름하다.

구름무늬와 칠보무늬가 있는 먹과 청록색의 단령포를 갖추었고, 관모인 오사모烏紗帽는 겹무늬의 각을 달았다. 가슴에 찬 흉배의 해치상과 구름무늬는 단령포에 직접 수를 놓은 것 같다.

붉은색 무늬가 있는 허리띠 학정관대는 초상화의 주인공인 조완이 등준시 과거시험에 합격해 승급한 벼슬의 품위대로 표현한 것이다.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 위상이 읽혀진다.

어깨너비와 크게 벌어지지 않은 하반신의 폭으로 보아 무릎을 꿇고 앉은 자세임을 알 수 있다. 두 손을 소매에 감추고 공수자세를 취한대로 형성된 옷 주름은 가볍게 음영이 표현되어 있다. 방석 없이 아래 단을 세워서 접힌 모습을 그려 놓은 탓에 인물이 공중에 떠있는 듯하다.

 위와 아래 축이 없어지고 보존상태가 나쁘지만, 1774년 초상화를 그렸을 당시 족자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표장방식 연구에도 좋은 자료이다. 족자 전체의 구성과 비례 등 영조와 정조 시절 초상화 표구와 흡사하다.

'조완 좌상'은 1774년 1월 영조가 시행한 특별과거시험의 무과 합격자 18명의 초상화를 그린 《등준시무과도상첩》과 동일시기, 같은 화원의 솜씨로 그려진 영조 후기의 무신 전신상이다. 이 초상화의 가치는 《등준시무과도상첩》에 포함된 18명의 급제자 가운데 유일하게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이외에 도상첩의 동일인물 초상화가 또 출현하기를 기대케 한다.
1774년 영조의 어명으로 초상화첩을 제작할 때 급제자 모두의 전신상을 별도로 제작하라는 어명은 없었지만, 과거급제 기념으로 소장하기 위해 각 집안이 별도의 전신상 초상화를 그렸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예컨대 전광훈의 경우 무관인 아버지 전운상田雲祥과 삼촌 전일상田日祥의 초상화 관복본 전신의좌상全身椅坐像 정면상(담양 전씨 보령공파 장충영각)이 집안에 보존해온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그렇다. 특히 <전일상 초상>은 <석천공한유도石泉公閑遊圖>와 함께 1748년 화원 김희겸이 그린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 1774년 18명의 무과시 합격자 가운데 별도의 초상화가 전해오는 인물은 이장오와 이창운이 있으나 후대작이다. 이장오 초상은 밑그림 유지초본을 모은 《명현화상첩名賢畫像帖》(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가운데 한 점으로 전한다.11) 이창운 초상화는 정조 시절 1782년에 이명기식 초상화풍의 관복본과 군복본 두 점으로 전신의좌상(이건일 소장)이다.
【서울=뉴시스】이태호 교수

【서울=뉴시스】이태호 교수

'조완 좌상'처럼 바닥에 앉은 자세의 좌상은 조선 후기 초상화에 가끔 등장하지만, 대체로 문인 초상화에서 발견된다. 1719년 작 김진여의 <권상하 초상>(안동 권씨 화천군파 소장)은 맨바닥에 정좌한 복건에 유복차림이며, 18세기 초의 <김만중 초상>(김성순 소장)은 둥근 방석에 앉은 평상복 차림이다. 그리고 1750년 작 변상벽의 <윤봉구 초상>(L.A.County Museum,안동 권씨 화천군파 소장 소장)은 정자관의 심의를 입고 돗자리 위에 앉은 좌상이다.

여기서 소개한 '조완 좌상'은 이들 문인 초상화를 따랐으나, 관복본 좌상으로 첫 사례인 듯하다. 헌데 이 <조완 좌상>과 연계되는 비슷한 시기의 초상화 한 점이 관심을 끈다. ‘1777년에 한씨 화원이 그렸다’라고 밝혀놓은, 복건에 포를 입은 일상복차림의 전신좌상 <정경순 초상>(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다.

 가부좌를 한 양 무릎에 양손을 얹고 앉은 자세는 약간 다르지만, 여기의 한씨 화원이 《등준시무과도상첩》에 참여한 한종유나 한종일 형제로 추정된다. 이를 감안하면 '조완 좌상'도 한종유나 한종일의 솜씨일 법하다. 두 초상화를 비교하면 약간 화풍의차이가 져, '정경순 초상'이 한종유의 그림이라면 '조완 좌상'은 한종일이 그리지 않았을까 싶다.

[email protected]

이태호 교수의 위 기고문은 오는 10일 오후 4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동양미술사학회 2017년 춘계학술대회에서 발표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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