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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효령의 BOOK소리]박범신 "소설가로 45년, 고단한 아나키스트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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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7-11-30 16:00:59  |  수정 2017-11-30 16:3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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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소설가 박범신. 2017.11.30. (사진=은행나무 제공) photo@newsis.com
■등단 44년, 43번째 장편소설 '유리' 출간

【서울=뉴시스】신효령 기자 = 1973년 소설 '여름잔해'로 문단에 등단해 44년간 소설가로 살아왔다. 글로 먹고 사는게 쉽지 않은 세상에서 해마다 소설을 내며 살아냈다.

 소설가 박범신(71)이다.  그가 최근 43번째 장편 소설 '유리'(은행나무)를 냈다.

 "'소설'이라는 게 일종의 정글 같아요. 가다가 길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장편을 쓰면 2~3번씩 좌절하면서 그동안 쓴 것을 다 버리고 싶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번 소설은 길이 훤히 열리는 것 같았어요. 크게 좌절하지 않고 거침없이 끝까지 써낼 수 있었어요."

 박범신은 "지난 44년동안 연습하고 단련해온 문장들이 이제 작가로서 어느 정도 완성됐다는 행복감을 갖고 이번 소설을 썼다"며 미소를 지었다.

'유리'는 20세기 초 유랑자의 운명으로 태어난 '유리(流離)'라는 남자의 한 세기에 걸친 맨발의 여정을 그린 작품이다. '어느 아나키스트의 맨발에 관한 전설'이라는 부제가 붙었다.

한국·일본·중국·대만 등으로 상징화된 동아시아의 여러 가상 국가가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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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는 1915년, 화인국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던 수로국에서 태어난다. 7살에 천자문을 떼고 화인국 글자도 읽고 쓸 정도로 영특한 아이였지만, 아버지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면서 운명의 소용돌이가 펼쳐진다.

살 길을 도모해주겠다는 큰아버지 제안에 따라 유리는 큰집에 양자로 들어간다. 큰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유리는 그가 수로국 인신매매 조직 수장이며 화인국의 착취·수탈에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고 부끄러움을 느낀다.

작가는 어떤 한 개인이 체제 속에서 어떻게 유린되고 쓰러져 가는지에 초점을 맞췄다.

"유리는 어떤 트라우마적인 사건을 겪고 난 뒤에 자기 이름을 잊어버려요. 이름에는 역사성도 있지만, 개인이 갖고 있는 고유한 가치도 있는 거잖아요. 그런 것들이 존중받지 못했던 시대가 이른바 '짐승의 시대'고, 소설의 역사적 배경입니다. 집단주의에 의해 만들어진 전체 체제와 개인의 가치와의 격렬한 충돌, 이에 대한 비판이 소설의 주제입니다."

소설은 허구(사실이 아닌 일을 사실처럼 꾸며서 만듦)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허구가 끝나는 곳에서 사실이 시작되는 듯 싶다.

2015년 죽음을 맞이하는 유리의 100년 인생은 작가가 '짐승의 시대'로 명명한 동아시아의 근대 100년 역사에 다름 아니다. 전쟁의 포화로 얼룩진 20세기 초 국제정세와 한국 전쟁·남북 분단, 냉전, 급변하는 중국·대만의 정치 사회적 상황, 현재의 패권을 잡기 위한 과거사 왜곡 등 다양한 역사 문제들이 담겼다.

결국 허구를 통해 현실 세계의 진실을 추구한 셈이다.

"작가가 비판적인 관점을 버리면 존재할 수가 없지요. 현상을 넘어 구조를 보는 눈을 가지려고 해요. '통찰력'이라고나 할까요. 이 소설은 이를테면 1931년부터 유신시대까지의 이야기이지만요. 왜 2017년에 이런 소설을 냈냐면 그 시대에 있었던 문제들이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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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은교' '고산자' 등이 영화화되면서 대중문화계에서도 주목을 받았던 그는 이번 소설에서 처음으로 판타지 기법을 차용했다.

서커스단 외다리 여인과의 동화 같은 사랑 이야기나 사막에서 만난 큰마님의 귓병을 치료하는 마법 같은 장면 등이 등장한다. 구렁이, 은여우, 원숭이, 햄스터 등의 동물들은 유리의 여정에 동반자로 등장해 유리가 위기를 극복하도록 도와준다.

"매우 우화적입니다. 동물들도 말을 해요. 짐승의 시대라 인간들과 말이 안 통하니까 동물들하고 통하게 되더라구요. 우화와 은유·판타지를 통해 한계를 극복해보려는 전략을 갖고 쓴 소설입니다."

사실 '유리'는 지난해 3월부터 7월까지 모바일플랫폼 카카오페이지에서 '웹소설' 형식으로 연재됐다. 9만 명 이상이 소설을 구독했다. 

"우리 역사를 삶에서 지울 수는 없으니까 젊은 독자들도 함께 공유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컸어요. 100년의 역사 이야기가 젊은이들에게 잘 읽힐 수 있을지를 고민했고, 재미있게 쓰려고 노력했습니다. 연재 당시에 반응이 좋아서 감사하고 반가운 마음이었습니다. 젊은이들도 역사에 대한 뜨거운 관심과 애정, 비판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연재 이후 작가는 소설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문장을 다듬고, 위안부 여성의 이야기와 한국현대사의 질곡이 담긴 500여매 분량의 이야기를 추가로 집필하는 등 많은 시간과 공력을 들였다. 내용이 방대하고 역사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유려한 필치와 문체에 페이지가 술술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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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럭 위의 그 여자가 바로 운지산의 붉은댕기, 걔였어.' 유리는 중얼거렸다. 그녀가 자신을 알아보고 '오라버니!' 하고 부르짖었을지도 몰랐다. 댕기를 풀어 바람 속에 날려 보내는 그녀의 손짓이 보이는 것 같았다. 트럭을 붙잡아 세울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이 가슴에 사무쳤다. 유리는 그래서 햇빛 쏟아지는 도로 한가운데 무릎 꿇고 앉은 채 눈을 부비며 조금 울었다. (…) 유리는 그날부터 그 댕기를 손목에 언제나 묶고 다녔다."(160~161쪽)

"한국의 현대사를 관통하는 이야기가 굉장히 축약돼 있어요. 앞부분에서 '붉은 댕기'라는 여자를 찾아서 유리가 거의 평생 떠돌아요. 소설에서 중요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붉은 댕기' 어린 시절만 잠깐 등장했어요. 처음부터 위안부 문제를 다루려고 했던 것은 아니지만, 안 쓸 수가 없겠더라구요. 그래서 뒷부분에서 위안부였던 점순이라는 여자의 이야기를 넣었습니다."

점순이가 '붉은 댕기'의 분신과 같은 존재라면, '유리'는 작가 자신을 표상하는 듯한 인물이다.

그는 "소설 한 편을 쓸 때마다 전혀 새로운 길"이라며 "소설이라고 하는 것은 연습해서 좋아지는 것도 아니고, 한 두 편을 썼다고 해서 더 자신이 있어지는 것도 아니다. 늘 두려움 속에서 새로운 길을 가는 것"이라고 했다.

 자신의 인생을 주인공 '유리'의 삶에 비유했다. "유리가 그 험한 시대에 낯선 길을 끝없이 걸어가면서 두려움을 견디듯이 저도 그랬습니다. 돌아보니 고단한 아나키스트의 길을 걸어왔다는 느낌입니다."

그도 그럴것이 40여년의 시간동안 거의 1년에 한 편씩 소설을 출간했다. 장편소설 '죽음보다 깊은 잠' '풀잎처럼 눕다' '불의 나라' '더러운 책상' '나마스테' '촐라체' '소금' '주름' '소소한 풍경' '당신' 등 다수의 작품을 발표했다.

이 시대 최고의 이야기꾼으로, 한국 사회의 본질적인 문제와 동시대인의 삶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작품을 통해 한국 문단을 이끌어왔다.

그는 "작가는 영원히 단독자"라며 "어쩌면 모든 작가들은 다 아나키스트일 것이다. 아나키스트 삶을 닮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어떤 정파나 이데올로기에 소속되지 않고자 하는 사람들이 작가를 하는 것이란 말이에요. 남들이 경험하지 못하는, 작가만 가질 수 있는 고유한 영역 같은 것이 있어요. 지난 삶을 돌아보니 '어떤 세계나 체제에 편입되지 않고 내 고유한 이름으로 자유롭게 살아왔어', '그것이 힘들었지만 다행이야' 뭐 이런 느낌입니다."

그는 독자들에게 감사한 마음도 표했다. "평생 자기 상상력을 앞세워서 살아올 수 있는 삶이라고 하는 게 현상적으로 보면 고단할 수 있겠지만,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축복은 아닌 것 같습니다. 독자들 덕분에 축복받은 삶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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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꼭 하고 싶은 이야기를 묻자 후배 문인들을 걱정하는 마음을 드러냈다.

"1970~80년대에는 베스트셀러의 대부분이 소설이었는데 요즘에는 기획도서나 정치인의 회고록이 베스트셀러가 되잖아요. 작가를 오래한 선배로서 마음이 아파요. 후배들이 어떻게 문학을 계속할 수 있는 동력을 어디서 얻을지 걱정이 많이 됩니다. 대중들이 책을 많이 읽을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됐으면 좋겠습니다."

점점 각박해지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그가 작가 지망생들에게 전하는 조언도 묵직했다. 문학의 길을 걷고자 한다면 '간절한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원론적으로 근본을 말하면 간절해야 하는 것 같아요. 간절한 마음이라는 게 두리뭉실한 이야기인지 모르겠어요. 어떤 테크닉이나 은유, 상징을 다루는 법 등은 누구나 연습하면 습득할 수 있어요. 문제는 글에 대한 간절함입니다. '자기가 얼마나 간절하게 그 문장 속에 있고 싶은가', '자기 문장을 갖고 싶은가' 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너무 고독하거나 부자연스럽다고 느낀다거나 결핍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이 있으면 간절해져요."

 '어떤 작가로 기억되고 싶은가'를 묻자 '영원한 청년작가'로 불리는 작가다운 답변이 돌아왔다.

"제 평생을 관통하는 이념 같은 게 있다면 '문학 순종주의'인 것 같아요. 지금 45년 가까이 작가로 살아왔는데도 여전히 변하지 않고 뜨거운 마음입니다. 물론 독자들이 '좋은 작가'라고 기억해주면 좋겠지만, 거기까지는 바라지도 않아요. 단순히 '그는 작가야'. '평생 다른 길을 가려고 하지 않고 순정을 가진 작가였어'라고 기억해주면 좋겠어요. 그냥 문학에 대한 순정을 평생 유지했던 작가로 기억되고 싶어요."

snow@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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