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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군의 고문·성폭행 잊을 수가 없어요"···진실을 위한 38년만의 고백

등록 2018.05.08 11: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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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옥씨, 학생수습대책위 참여했다는 이유로 투옥

【광주=뉴시스】류형근 기자 =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수습대책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계엄군에 끌려가 고문 등을 당하고 풀려난 김선옥(60)씨는 그날의 고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8일 밝혔다. 2018.05.08. (사진=김선옥씨 제공) photo@newsis.com

【광주=뉴시스】류형근 기자 =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수습대책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계엄군에 끌려가 고문 등을 당하고 풀려난 김선옥(60)씨는 그날의 고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8일 밝혔다. 2018.05.08. (사진=김선옥씨 제공) [email protected]

【광주=뉴시스】류형근 기자 = "계엄군에게 당한 '폭행과 고문, 성폭행' 지워지지 않는 기억을 38년동안 안고 살았어요."

 5·18민주화운동 38주년을 앞둔 8일 유공자 김선옥(60)씨는 뉴시스와 통화에서 "계엄군에게 붙잡혔다 풀려난 65일동안의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김씨는 1980년 5·18 당시 전남대 음악교육학과 4학년에 재학중인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해 5월16일 금남로에서 열렸던 촛불집회에 참석한 적이 있지만 휴교령이 내려지자 집에서 나오지를 않았다.

 시내가 평온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5월22일 책을 사기 위해 광주시내를 나갔다. 하지만 총상을 입은 시체를 본 그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어 시위에 참여했다. 

 학생수습대책위원회를 맡아 옛 전남도청 상황실에서 출입증, 유류보급증, 야간통행증, 무기회수 등의 역할을 했다.

 음악 DJ를 했던 경험이 있어 "계엄군들이 무고한 시민을 총칼로 제압했다. 병원에 수많은 환자들이 누워있고 헌혈이 필요하다"는 내용으로 안내방송도 했다.

 계엄군이 무력진압을 시작한 5월27일 새벽 3시 옛 전남도청을 빠져나와 몸을 피했다.

 시국이 잠잠해질 무렵 교생실습을 나간 그는 그해 7월3일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 수사관들에게 붙잡혔다.

 이 때부터 그녀의 인생은 바뀌었다.

 옛 광주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간 뒤 당시 수사관이 했던 "여자 대빵 데리고 왔네. 얼굴이 반반하네"라는 말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폭행은 2개월여동안 이어졌지만 9월4일 한 수사관이 밖으로 데리고 나간 뒤 자신에게 했던 기억은 모진 고문보다 치욕스러웠다.

 김씨는 "소령 계급을 달고있었고 계장으로 불렸던 것 같다"며 "그가 밖으로 데리고 나가 비빔밥을 사준 뒤 여관으로 끌고 갔다"고 기억을 떠올렸다.

 이후 부터는 "정말 끔찍하다"며 "고문으로 몸이 만신창이가 돼 있어 제대로 저항조차 하지 못했었고 이후 풀려났지만 그날의 일은 입밖에 꺼낼 수 도 없었다"고 밝혔다.

 김씨는 붙잡힌 뒤 65일만, 기억조차 하기 싫은 치욕을 당하고 하루만인 그해 9월5일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바뀌었다. 음악교사를 꿈꿨던 시간이 모두 사라졌다는 생각에 방황을 했고 한 남자를 만나 임신까지 하게 되자 하지 말아야 할 행동까지 했다.

 그러는 사이 모친은 급성간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도 교직에서 쫓겨났다.

 1981년 세상에 나온 딸을 통해 희망을 찾은 그는 또래보다 1년 늦게 대학을 졸업하고 교육청 진정을 통해 1983년 중학교 음악교사로 발령 받았다.

 아버지가 쫓겨난 기억이 있기 때문에 동료 교사들에게도 5·18에 대해서는 이야기조차 하지 않았다.

 가슴에 품은 '한' 때문인지 지난 2001년에는 유방암 수술까지 했다. 이후 왼쪽 팔이 마비되는 증상까지 더해져 더이상 피아노를 칠 수 없어 교직에서도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또 후배에게 5·18 보상 이야기를 듣고 신청을 했지만 허무했다.

 그는 "신청서에 '무엇으로, 어떻게 내 인생을 보상하려고요'라는 문구를 넣어 저항아닌 나름의 저항을 했었다"고 회상했다.
 
 보상이 이뤄져 2000만원을 받았지만 인생이 송두리째 사라졌다는 생각에 처음에는 사용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2010년 10월 딸이 결혼을 하자 30년만에 국립5·18민주묘지를 찾아 눈물을 쏟았다.

 김씨는 "세상이 달라져 보상 이야기가 나오고 진실 규명이 진행되도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여기고 숨죽여 살았다"며 "나는 아직도 1980년 5·18에 머물러 있다"고 말했다.

 이어 "항쟁 이후 가족과도 헤어져 외톨이가 됐다는 생각에 수도없이 잘못된 생각을 했었다"며 "딸이 용기를 주지 않았다면 5·18을 가슴에 품고 평생을 살았을 것이다. 진실을 밝힐 수 있는 마지막 길에 보탬이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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