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시민 학살 도청 재진압작전 두차례 점검·최종 결정"(종합)
"정호용·소준열 보안사로 불러 사실상 작전 지휘"
계엄군 외곽배치·자위권 발동 모임도 두차례 가져
식료·의약품 공급 차단 등 '광주 고사작전'도 자행
미 기밀문서도 '전두환이 군사행동 필요하다 결론'
【광주=뉴시스】신대희 기자 =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광주시민을 무참히 학살한 '옛 전남도청 재진압 작전(이른바 상무충정작전·5월27일)'을 두 차례에 걸쳐 점검한 뒤 최종 결정했다는 기록이 나왔다.
전두환씨는 1980년 5월26일 정호용 특전사령관과 소준열 전투병과교육사령관 겸 전남북계엄분소장을 보안사령부로 불러 도청 재진압 작전을 논의·점검한 것으로 나타났다.
5·18 기록관은 '12·12, 5·18 실록(1997년 5월 대한민국재향군인회 발간·이하 실록)', '제5공화국 전사', 검찰 수사·재판 기록 등을 토대로 전씨와 보안사의 5·18 관련 행적을 분석해 22일 공개했다.
실록 등에 따르면 전씨는 5월25일 오후 12시15분께부터 2시간가량 국방부 육군회관에서 주영복 국방장관, 이희성 계엄사령관, 황영시 육군참모차장 등과 상무충정작전 지침을 검토하고 5월27일 새벽 도청을 재진압키로 했다.
5월26일 오전 전씨는 보안사에서 재진압 작전과 관련한 두 번째 회의를 가졌다. 정호용 특전사령관, 노태우, 백운택 9사단장 등 하나회 회원들(이상 육사 11기)과 소준열 전교사령관(육사 10기)이 함께했다.
전씨는 5월26일 두 번째 회의 자리에서 정호용 특전사령관으로부터 작전 계획을 보고받고 작전에 필요한 가발(침투시 변장용)을 지원했다.
전씨는 당시 광주에 있던 정호용·소준열을 헬기로 호출, 회의에 참석케 한 것으로 5·18 기록관은 분석했다.
'광주의 투톱 지휘관'으로 불리는 정호용·소준열은 5월25일 황 육군참모차장에게 충정작전 지침을 전달받아 공수여단 특공조 운용계획(3공수여단 도청, 11공수 관광호텔과 전일빌딩 YWCA, 7공수 광주공원) 등을 공유해왔다.
정 특전사령관은 5월26일 오후 2시께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충격용 수류탄과 항공사진을 받아 같은 날 오후 9시께 광주 송정리 비행장에 도착했다.
이후 20사단장, 3·7·11공수여단장을 소집해 장비를 분배하고 '침투 시작 시간'을 27일 오전 4시로 밝힌 뒤 각 여단의 임무를 재확인했다.
소 전교사령관은 정 특전사령관보다 5시간 먼저(26일 오후 4시) 광주비행장을 찾아 공수여단 장병들을 격려하고, '27일 새벽 0시1분부터 작전을 개시하라'고 지시했다.
전씨가 5월26일 광주비행장과 전교사에 대기 중인 계엄군 사병들에게 중식용 소 7마리를 지원하는 '잔치판'을 열어주고 격려금(6300만 원 중 전씨는 300만 원) 전달을 지시했다는 기록(505보안대 작성)도 있다.
5월 25일(한국감시단 상황보고 7호)·26일자 미국 기밀문서에도 '교착상태를 종료하고 시내로 진입해야 한다는 극심한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다고 알려진 육군 실력자 전두환은 이제 군사행동이 필요하다고 결론지었다고 한다. 도시를 재장악하기 위한 군사작전이 24~36시간 내 실시될 것이라고 함'이라고 나와 있다.
이 같은 기록으로 미뤄 전씨가 재진압 작전 결정회의에 두 차례 참석해 사실상 작전을 이끈 것으로 5·18 기록관은 분석했다.
재진압 작전 때 도청에서 반독재와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최후 항쟁을 벌이던 시민군 16명은 3공수가 쏜 M16 총탄에 희생당했다.
전씨가 5월21일 오후 1시께 전남도청 집단발포가 이뤄진 직후 '자위권 발동과 계엄군 광주외곽 배치'와 관련한 회의를 주도한 것으로 보이는 기록도 나왔다.
실록 285쪽엔 '21일 오후 2시35분께 국방부장관실에서 시위가 극에 달했다는 보고를 받은 전씨 등이 시위대를 무장폭도로 규정하고 계엄군을 광주외곽으로 전환 배치해 봉쇄한 뒤 사상자가 발생하더라도 자위권을 발동, 신속히 진압키로 했다'고 기록돼 있다.
'21일 오후 4시35분께 열린 국방부 장관 주재 회의에 전씨를 대신해 참석한 정도영 보안처장 등이 계엄군 외곽 배치, 자위권 발동 등의 구체적인 실행방안을 결정했다'고도 적혀 있다.
앞서 국방부 과거사위가 기무사에서 찾은 육군 제2군사령부의 '광주권 충정작전 간 군 지시 및 조치 사항'에 '전(全) 각하(閣下) : 초병에 대해 난동 시에 군인복무규율에 의거 자위권 발동 강조'라고 명시돼 있는 점도 사실상 전씨가 자위권 발동 명목으로 발포 지시를 내렸다는 정황을 뒷받침하고 있다.
실록은 외곽 포위 작전의 기본 개념을 '광주를 고립시켜 생활필수품 부족으로 인한 장기 저항이 불가능하게 하려 한 것'이라고 기록했다.
미국 기밀문서도 '계엄사령부는 광주시내에 대한 식료·의약품 공급을 차단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전씨는 5월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와 동시에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시국 수습 방안 중 하나인 비상기구 명칭·군정기구) 운영분과위원회를 설치하고 5월26일 최규하 대통령을 압박해 다음 날 국보위 설치안을 의결시켰다.
실록 326쪽엔 '비상계엄 전국 확대와 동시에 국보위를 발족시키려던 것이 그들 주도세력의 원래 계획'이라고 적혀 있다.
실록 201쪽엔 '정치군인세력(전두환 그룹)은 국보위로 행정 각부를 조정·통제해 대통령을 하야시키는 합법을 가장한 불법 행위를 했다. 미리 짜여진 각본의 일환이었다'고 분석돼 있다.
'보안사가 5·17 특별조치 관련 대통령 특별성명 문안도 작성, 청와대에 제출했다. 전두환 명의로 언론통제 특별지침을 마련 시행토록 했다'고도 기록돼 있다.
전씨가 정권 찬탈을 위해 시국 수습 방안을 기획·설계해 공작을 펼쳤고, 5·18 무력진압을 정권 찬탈의 수단으로 썼다는 설명이다.
나의갑 5·18 기록관장은 "실록과 달리 전두환 지시로 1982년 5월 발간된 5공화국 전사에는 시국 수습 방안, 전두환이 재진압작전 결정 모임에 두차례 참석한 사실 등을 누락시켰다. 반드시 규명이 필요한 대목"이라고 밝혔다.
이어 "12·12, 5·18실록은 전두환·노태우가 구속된 상태서 편찬됐는데 역사적 사실관계를 비교적 바르게 기록하고 있다. 정권 찬탈을 미화하기 위한 왜곡·조작 기록물인 5공 전사에 대항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짚었다.
나 관장은 "출범을 앞둔 5·18진상조사위는 정권 찬탈이란 '못된 꿈'을 광주에 적용한 전두환을 '5·18 총사령관'으로 규정하고, 그의 보안사를 '공작 부대'로 설정해 '5·18 연관 행적'을 명명백백하게 밝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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