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이스북
  • 트위터
  • 유튜브

[한상언의 책과 사람들]정치의 계절 시작, 눈에 띈 '역사극집'

등록 2022.01.01 06:00:00

  • 이메일 보내기
  • 프린터
  • PDF
[서울=뉴시스] 유치진의 '역사극집' 제1집 (사진=한상언 제공) 2021.12.27.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유치진의 '역사극집' 제1집 (사진=한상언 제공) 2021.12.27.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책을 수집하다 보면 여기저기서 소중하게 보관하던 책과 자료들을 넘겨받기도 한다. 그럴 적마다 고맙게 잘 보관하겠다는 인사를 드리고 받아오게 되는데 그 고마운 마음에 비해 내가 보답해드릴 만한 게 없어서 항상 미안한 마음이 든다.     

비장하던 책을 넘겨준다는 것은 다른 소중한 물건들을 넘겨주는 것만큼이나 의미 있는 일이다. 책을 사기 위해 들렀던 서점의 풍경, 그날의 날씨, 책을 읽었을 때의 감정까지도 그 책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기에 그렇다. 시간의 떼가 묻은 낡은 책을 받아와 책 하나하나를 넘길 때마다 책 소장자의 소중한 기억까지도 색이 바랜 책에 담겨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난겨울 한국체대의 유임하 선생이 소중하게 간직하던 책 30여 권을 내게 주었다. 유 선생은 내가 연구소를 열고나서 두 번 정도 방문해 내가 가진 책들을 둘러본 후 선뜻 극작가 유치진의 '역사극집'을 선물로 주겠다고 했다. 내 전공이 영화사였기에 유치진의 책이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게 해서 유 선생의 연구실에서 받아온 책들 중에는 선생의 관심을 반영하듯 대게 국문학과 관련된 책들이 많았는데 이중 '세계기문선'(청년사, 1948), '영시백선'(백양당, 1950)과 같은 양주동 선생의 책들이 여러 권 있었다. 모교에 오랫동안 근무하셨던 원로 학자에 대한 존경과 흠모의 마음을 그 책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역사극집'(제1집)은 유치진이 해방 후 '마의태자'와 '자명고' 두 편의 희곡을 묶어 낸 희곡집이다. 초판은 1947년 발행했으며 1953년 10월 '마의태자'를 시공관에서 공연하면서 그간 미완이던 이 작품의 마지막 장을 완성 후 새롭게 추가된 내용을 더해 1955년 증보판을 발행했다. 내가 유 선생에게 받은 책은 1955년 발행된 증보판이다.    

해방 후 친일 연극인으로 지목된 유치진은 펜을 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한동안 자숙의 시간을 보내던 그는 다시 연극계의 전면에 등장했고 분단과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혼란한 당시에 우익 연극인의 구심점이 되었다.     

일제가 몰락하고 미소 양군이 분단된 한반도를 지배하던 해방 직후 각 정파들은 통일된 정부의 수립을 준비하며 활발하게 움직였다. 일종의 정치의 시절이었다. 그러다 보니 해방 후 많은 수의 역사물들이 무대에서 공연되었는데 작품 하나하나가 정치적 의사표현으로 보였다.     

다시 펜을 잡은 유치진 역시 역사물에 손을 댔다. 낙랑의 신고인 자명고에 얽힌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의 이야기는 그에 의해 분단된 조국과 외세의 방행에도 통일을 기원하는 일종의 민족의식을 강화하는 작품으로 만들어졌다. 또한 1937년 창작된 '마의태자'를 한국전쟁 이후 개작하면서 금강산에 들어간 마의태자가 금강산의 봉오리가 되었다는 식의 결말을 채용했다. 이러한 민족적 생사관은 말할 수도 제대로 듣고 볼 수도 없는 상황이 된 북한의 상황을 알레고리 하며 자연스럽게 반공주의와 결합하였다.     

연극학도도 아닌 유 선생이 유치진의 희곡집을 소장했다는 점이 내심 궁금했다. 수집벽이 있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판단하기에는 열정적인 수집가처럼 보이지 않았기에 궁금증이 더했다. 내가 지닌 수수께끼는 유 선생의 책 '반공주의와 한국문학'(글누림, 2020)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해소되었다. 분단과 전쟁으로 강화된 한국사회의 반공주의가 문학 속에서 어떻게 발현되었는지를 탐구한 선생의 책에서 해방 후 일연의 '삼국유사'에 담긴 설화들이 어떻게 문학작품으로 전유되었는지를 탐구했다. 유치진의 작품들이 바로 '삼국유사'에 담긴 설화들을 토대로 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역사극집'을 소장했던 것은 단순히 수집가의 호기심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대통령 선거에 관한 뉴스가 크게 늘었다. KBS에서 대하사극 '태종 이방원'을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권력의 변동을 극화한 드라마가 인기를 끄는 것을 보니 또다시 정치의 계절이 시작된 것 같다. 책장에 꽂힌 『역사극집』이 보다 크게 눈에 들어온다.

▲한상언영화연구소대표·영화학 박사·영화사가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