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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립 잡기노트]“원조는 국악·트로트, 일본 엔카가 베꼈다”

신동립 기자  |  reap@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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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3-12-23 08:03:00  |  수정 2016-12-28 08:3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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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KBS 1TV ‘가요무대’
【서울=뉴시스】신동립의 ‘잡기노트’ <398>

박상진 박사(동국대 한국음악과 교수)는 가수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국악 휘모리 장단, 그룹 ‘소녀시대’의 ‘아이 갓 어 보이’는 동살풀이·휘모리 장단으로 작곡된 것이라고 해석했다. 악보를 바탕으로 한 증명이다. 이들 노래의 겉(보편성)은 서양음악이지만, 속(독창성)은 국악 장단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국악인들은 음악 없이 ‘뽕짝’을 부를 때 장고 장단에 맞춘다. 반주는 자연스럽게 동살풀이 장단을 친다. 어색하지 않게 잘 맞는다. 가사의 리듬에 따라 장단을 변화시킬 수준이다.

‘뽕짝’ 엔카나 트로트도 동살풀이 장단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박 교수는 1900년대 초 일본 엔카의 대부라고 불리는 고가 마사오 작곡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와 전수린 작곡 ‘고요한 장안’을 비교·분석했다.

1910년께 일본에서는 레코드가 일반적으로 보급되지 않았다. 번안곡이나 창작곡의 가사만 인쇄, 돌아다니면서 바이올린을 켜며 가사집을 팔던 거리의 악사들이 있었다. 이들을 엔카시(艶歌師)라고 불렀는데, 훗날 일본 유행가요에 이름을 붙일 필요에 따라 엔카(艶歌)와 발음이 같은 엔카(演歌)를 용어로 삼기에 이르렀다.

트로트는 2박자 볼룸댄스 리듬의 하나인 폭스트로트에서 파생했다는 설이 있다. ‘폭스’라는 수식어는 이 리듬을 고안한 무용가 헨리 폭스를 일컫는다. 미국에서 발원한 리듬이 일본에 상륙하면서 일본인 특유의 발음과 결합해 ‘도로토’가 됐다가 1960년대 이후 한국에서 트로트로 수정돼 하나의 장르로 굳어졌다.(신현준)

뽕짝이라는 별칭을 얻은 것도 이 시기다. 1960년대 중반 신문이나 잡지에서는 트로트와 뽕짝이라는 말이 혼용됐다. 뽕짝은 비칭(卑稱)이어서 점차 트로트로 대체됐지만, 여전히 대중 사이에 뽕짝은 살아 숨쉬고 있다.

트로트 장르는 리듬 패턴을 넘어 악곡양식을 지칭한다. ‘흘러간 유행가’는 모두 트로트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1950~60년대에 나온 악보들을 보면, 지금 트로트라고 부르는 음악을 모두 트로트 장르의 범주에 넣은 것은 아니다. 트로트는 왈츠, 블루스, 탱고, 맘보, 룸바, 부기우기 등처럼 하나의 리듬으로 간주돼 악보 앞에 씌어 있다.(신현준)

이러한 곡들은 트로트 리듬이 아닌 것이다. 1950년대까지 트로트를 하나의 장르나 형식으로 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뽕짝이라고 부르는 ‘엔카 스타일’의 ‘대중가요 트로트’는 현재 우리나라에만 있는 장르다.

일본 대중가요계에 큰 족적을 남긴 고가 마사오(1978년 작고)는 1904년 후쿠오카 현 오가와 시에서 출생해 1912년 홀어머니와 함께 인천으로 와 인천공립심상고등소학교에 다녔다. 12세 때 서울로 이주, 경성남대문소학교로 전학했다. 소학교 졸업 후 선린상업학교로 진학했다. 이때 밴드활동과 함께 합창단을 조직해 음악에 심취하며 재능을 보였다. 17세에 졸업하고 바로 1922년 가족과 함께 오사카로 갔다. 이듬해 메이지 대학에 입학하고, 1931년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를 발표하면서 두각을 나타낸다. 이후 고가 마사오는 엔카의 대부로 통하면서 사망할 때까지 4000여곡을 작곡했다.

고가 마사오는 감수성이 예민한 유소년기를 한국에서 보냈다. 회고기 ‘고가 마사오 예술대관’에 “큰형의 가게에 60여명의 조선인이 있었는데, 나는 이들이 흥얼거리는 민요를 날마다 들었다”고 썼다. 세상을 뜨기 1년 전인 1977년 ‘저 꽃 이 꽃’이란 노래에 대해 말하면서 “만일 내가 유소년 시절을 조선에서 보내지 않았다면 이러한 곡을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고 고백, 한국의 정서와 전통음악이 음악적 기반이었음을 시인했다.(김열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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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MBC TV ‘나는 트로트가수다’
고가 마사오는 약 11년에 걸친 청소년기를 한국에서 보내면서 음악가의 소질과 재능을 키웠다. 한국 전통의 민요나 판소리, 풍물 장단과 대중가요 등이 음악 형성에 큰 밑바탕이 됐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고가 마사오의 음악에는 처음 들어보는 곡이라도 마치 예전에 즐겨 듣던 곡으로 착각할 정도로 멜로디가 친근한 것이 많다. 홀어머니와 사는 고가 마사오의 처지가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어려운 생활의 연속으로, 식민지 조선의 백성과 정서적으로 동질감을 느끼면서 조선의 음악에 더욱 호감을 갖게 됐으리라는 추정이다. 후일 고가 마사오의 음악에 한국의 정서나 가락이 상당 부분 반영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소리바위)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는 1932년 표절시비에 휘말렸다. 전수린 작곡 ‘원정’(한국에서는 ‘고요한 장안’으로 발표)을 베꼈다는 것이다. ‘원정’이 발표됐을 때 일본잡지 ‘신청년’에는 고가 마사오의 표절의혹을 다룬 기사가 실렸다. 당시 일본의 음악평론가 모리는 ‘고가 마사오가 조선에 살 때 들었던 전수린의 멜로디에 영향을 받은 것 같다’고 썼다. 가요평론가 겸 작사가 김지평은 ‘권부에 시달린 금지가요의 정신사’에서 이들 두 곡의 악보를 대조, “모든 점에서 흡사한 점이 많다”고 짚었다.(이호섭)

전수린은 1907년 개성에서 태어났다. 호수돈 여학교 교장인 루추 부인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우고, 어린 나이에 동요를 작곡했다. 15세 때 송도고보를 중퇴한 전수린은 서울로 가 연악회(硏樂會)를 주도하고 있던 홍난파와 함께 활동하게 된다. 이어 한국 작곡가 최초로 빅타에 전속돼 1932년 ‘황성옛터’와 ‘고요한 장안’을 발표, 일약 유명 작곡가가 된다.

일본에서 ‘원정’은 고가 마사오의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보다 약 6개월 늦게 발표됐지만, 한국에서는 1926년께 작곡됐다. 전수린과 고가 마사오는 어려서 같은 동네에 살면서 친교를 다진 것으로 전해진다. 성인이 돼서도 관계는 지속됐으며 양국을 오가며 만날 때는 서로 포옹까지 했다. 박 교수는 “일본의 유행가와 한국의 유행가는 닭과 달걀의 관계처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태동하고 성장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라고 풀이했다.

한국은 일본과 음악적으로 교류하기 전인 1870년께부터 교회를 중심으로 서양음악을 가르쳤다. 1901년부터 1916년까지는 독일인 프란츠 에케르트가 우리나라로 와 이왕직군악대장으로 복무하며 양악을 가르치기도 했다. 1910년께부터는 본격적인 음악학교들이 설립됐다. 조선정악전습소, 이화학당, 배재학당 등지에서 서양식 성악과 기악을 가르쳤을뿐더러 시카고 음악학교 등 미국이나 유럽으로 유학을 다녀오는 이들도 있었다. 창작가요를 작곡할 소양과 외국음악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갖춘 시절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바탕에서 1932년 전수린을 기폭제로 한국 작곡가의 전성시대가 열린다. 1926년부터 1936년 사이에 데뷔한 작곡가들을 살피면, 우리 가요가 독창적인지 아니면 일본 엔카를 표절하고 있는가를 즉각 파악 가능하다.

1927년 경성방송 개국을 계기로 홍난파와 더불어 관현악단을 창설한 ‘찔레꽃’, ‘직녀성’ 등의 김교성이 1932년 빅타 레코드에 전속됐다. 김정구의 형이면서 배우, 가수, 작곡가를 겸한 천재 김용환이 1932년 폴리돌에 전속됐다. 일본 무사시노 음악학교를 졸업한 ‘홍도야 울지마라’, ‘처녀총각’ 등 한국 서양음악의 선구자인 피아니스트 김준영이 이 즈음에 데뷔한다.

휘문고보를 졸업한 바이올리니스트 문호월은 ‘노들강변’, 이난영의 ‘봄맞이’, 남인수의 ‘천리타향’을 남겼다. 일본 음악학교를 졸업한 손목인은 고복수의 ‘타향살이’, ‘목포의 눈물’ 등 주옥같은 선율을 남겼다. 일생동안 ‘애수의 소야곡’, ‘이별의 부산정거장’, ‘신라의 달밤’, ‘삼다도 소식’ 등 히트곡을 양산한 작곡가 박시춘이 데뷔한 것도 이때다. ‘한국의 슈베르트’로 통하는 이재호는 일본의 고등음악학교를 졸업하고 20세에 오케레코드에 전속돼 ‘나그네 설움’, ‘번지없는 주막’ 등 불후의 명작을 쏟아낸다.

홍난파도 이 시기에 데뷔하는데 안옥경의 ‘여인의 호소’, 이규남의 ‘유랑의 나그네’ 등을 발표하지만 가곡 분야에서 더 주목받으며 ‘성불사의 밤’, ‘봉선화’ 등 명곡을 남겼다.(이호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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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박상진 동국대 교수(작곡가·지휘자)
박 교수는 ‘고요한 장안’과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의 악보를 분석했다. ‘고요한 장안’은 모티브가 정확히 2마디 구조를 취하고 있다.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는 4마디 구조다. ‘고요한 장안’은 V화음이 자연단음계로 돼 있다.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는 화성 단음계를 사용하고 있다. 속7화음을 쓴 것이다. 코드의 사용과 진행이 대체로 두 곡 모두 비슷하다. 1, 3, 15, 20, 21번 마디의 리듬 패턴도 흡사하다. 리듬은 어김없이 두 곡 모두 뽕짝이다.

박 교수는 “전수린은 자연 단음계를 사용해 국악적, 즉 민족음악적 분위기가 느껴지도록 작곡했다. 고가 마사오는 코드 사용과 진행에서 전수린과 흡사하다. 다만, 속7화음(화성단음계)을 사용함으로써 서양음악적 느낌이 나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리듬 패턴이 5개의 마디가 비슷한 것이므로 표절이라고 단언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화성 진행으로 보면 듣기에 따라 얼마든지 비슷한 음악으로도 들릴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박 교수는 엔카(뽕짝) 리듬과 국악의 동살풀이 장단을 비교했다. 결론은 “거의 유사한 리듬 패턴”이다. “4분의 4박자로 템포도 거의 똑같다. 엔카 리듬과 동살풀이 장단은 2분박으로 동종의 리듬”이라는 것이다. “동살풀이 장단은 훨씬 많은 변형장단을 보유하고 있다. 4분의 4박자로 2분박 계통이며 템포도 같은 같은 종류의 리듬이라고 볼 수 있다”고 못박았다.

1980년대 일본에서 엔카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다. 엔카를 토착적 문화라고 말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일본에서 엔카의 원류가 한국이라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많은 엔카 가수가 한국계(재일한국인)라는 사실이 알려졌고, 엔카의 거장 고가 마사오도 한국계일지 모른다는 설이 나돌았다. 또 고가 마사오의 경우, 한국계 혈통과는 무관하지만 한국에 오랜 기간 체류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한국문화의 영향’과 밀접한 부분에 대해 논하는 사람도 있었다.(신현준)

음계이론(都節)을 잘못 적용해 트로트를 왜색이라고 주장하는 한국인은 많아도, 트로트나 엔카를 일본 고유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일본인은 별로 없다.(민경찬)

박 교수는 엔카의 대표적 작곡가 고가 마사오가 어린 시절 한국에서 한국음악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 미소라 히바리 등 엔카 가수들의 상당수가 한국계라는 점, 엔카에 한국 전통적 음악 요소가 많이 내포돼 있다는 점, 호소력을 요구하는 창법이 일본가수보다는 한국가수들에게 더 어울린다는 점 등의 이유로 엔카의 원류가 한국이라고 여기는 일본인이 의외로 많다고 전했다. 트로트는 한국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역수출됐다는 것이 일본 가요계의 정설이라는 것이다.

1930년께 인기를 누린 유행가들이 방증이다. 전수린 작곡 ‘황성옛터’(1932), 손목인 작곡 ‘목포의 눈물’(1935), 이시우 작곡 ‘눈물젖은 두만강’(1938) 등 이 무렵 유행가들은 나라 잃은 슬픔을 그린 것들이 대부분이다. 일제강점기에 순응한 것이 아니라 애국심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에 대중이 공감한 것이다.(장유정)

박 교수는 “그 후부터 1960년대에 한국의 트로트가 하나의 장르로 정착되기까지 일본의 엔카가 한국 트로트계에 끼친 영향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라면서도 “2007년 일본의 어느 평론가는 ‘일본의 가요계, 특히 엔카는 지금도 고가 마사오의 음악을 답습하고 있다’고 비판했다(소리바위)”라는 점을 특기했다.

“창의성과 끼의 민족인 한국은 트로트에서 한류인 K팝을 창조해 전 세계인들을 들썩이게 하고 있다. 21세기에는 세계의 문화중심이 한국으로 이동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박 교수가 전망하는 논거들이다.

문화부장 reap@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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