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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대통령 취임] 박 대통령 어린시절은 … 이웃사촌 생생육성

등록 2013.02.25 18:22:42수정 2016.12.28 07:0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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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가 제18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당선됐다. 첫 여성대통령이 된 박근혜 후보는 서민경제를 살리고 국민행복 약속을 공약으로 내걸며 앞으로 5년간 국정을 수행하게 된다. 사진은 박정희 대통령, 육영수 여사와 함께 . (사진=박근혜 후보 캠프 제공)  photo@newsis.com

【대구=뉴시스】김재욱 기자 =  박근혜 정부가 25일 0시를 시작으로 정식 출범했다. 새 정부 출범을 맞아 박근혜 대통령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후 3년여 간을 대구의 한 한옥 한지붕 아래서 지켜본 시민을 만나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 보고 희망을 들어본다.

 대구에 사는 한금연(84·여)씨는 1930년생 말띠다. 6.25전쟁 후 몇 년간 대구에 자리잡았던 육군본부 인근 한옥집 몸채에서 살았는데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마침 그 집 사랑채를 관사용으로 얻어 함께 살았다고 기억하고 있다. 인터뷰는 한씨 자택에서 한씨의 1남4녀 중 넷째딸과 함께 진행됐다.

 ◇100칸 짜리 큰집서 박정희 가족과 함께 살아

 "결혼 후 형편이 어려웠는데 집안 어른의 소개로 커다란 한옥집 몸채에서 집값도 내지 않고 살게 됐다. (그곳이 육군본부) 관사용으로 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에는 그런 일이 흔했다.

 당시 중령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 같은 가옥 사랑채에 살고 있었는데 부관학교장이었다. 집은 한옥으로 지역 최고 부자였던 서병국씨가 지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100칸이 다 될 정도로 컸다. 앞에는 샘과 정원도 있었다.

 처음에는 조용했지만 이후 전쟁이 터지며 피난민이 주변 도로 등에 몰려들어 혼란스러웠다. 6년여 동안 그곳에서 미싱으로 재봉을 하며 살다 집을 구해 옮겼다."

 ◇박정희와 이웃사촌 잦은 왕래

 "자그마한 사람이 높은 군화를 신고 다니던 게 기억에 남는다. 군인들을 통해 1950년 12월쯤 결혼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계산성당에서 신부의 주례로 결혼했는데 주례가 신랑신부의 이름을 바꿔 불렀다고 들었다.

 육영수여사는 키가 컸고 가정적인데다 손재주가 좋았다. 무엇보다 아무하고나 잘 어울리는 살가운 사람이었다.

 우리 방에도 자주 왔다. 시댁이 마련해 준 미싱이 우리 집에 있었는데 (당시에는) 귀한 것이어서 그것을 이용하려고 많은 이들이 우리를 찾았다. 군인들 옷을 고쳐주곤 했는데 육영수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박정희가 거주한 사랑채가 내가 살던 몸채와 ㄱ자로 바로 옆에 붙어 있어 자주 왕래했다. 요즘식으로 이웃사촌이었다. 벽돌로 지은 집이었다."

 ◇박근혜는 대구서 태어난 것 맞다

 "육여사는 어느 해 여름 애가 들어섰는데 밥을 바꿔먹자고 하더라. 임신한 뒤 누른 끼가 도는 쌀을 도저히 먹지 못하겠다며 우리집 쌀보리와 바꿔먹자고 하더라. 당시 군에 지급된 쌀의 품질이 좋지 못했다.

 한상사로 기억되는 박정희 운전병도 기억난다. 당시 매우 귀했던 건빵도 자주 얻어 먹었다. 겨울이었는데 한상사가 땔감을 많이 가지고 가길래 물으니 사모님이 순산했다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구에서 태어난 것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삼덕동 5번지에서 태어난 것이 맞다. (지금은)당시와 많이 달라졌다. 병원이란 게 없던 시절이라 산파가 아기를 받았다고 했는데 그게 박근혜였다.

 당시 1층건물에 방이 4개였고 교편을 잡고 있던 육여사의 친정 오빠와 엄마가 함께 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뒤 아기 100일과 돌에 그 집에서 국을 끓여놓고 초대했는데 음식솜씨가 좋았다."

 ◇ "이런 애를 어떻게 키우나 갖다버려라"호통도

 "육여사가 박근혜 키우느라 고생했다. 이런 말 해도 되는지 몰라도 구시젖(함몰유두)이라 젖을 제대로 못줬다고 했다. 그래서 암죽(이유식으로 쓰이는 곡식으로 만든 묽은 죽)을 끓여 먹였다.

 우유가 없던 시기였다. 6.25 이후 미군이 오면서 우유도 들어왔다. 고생 많이 했다. 어려운 시기였다. 그런 이유에서라도 우리는 미국 괄시하면 안된다.

 모두 어려웠지만 관사에서도 물이 아침에만 나오고 전기도 낮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육여사도 물을 뜨러 나오곤 했다. 전쟁 후에는 피난민들과 군인들이 많아 자주 나오지는 않았다.

 젖동냥은 없었다. 박근혜는 젖을 제대로 먹지 못하니 쌀가루로 죽을 만들어 먹였다. 배고파서 울고 뜨거워서 울고, 맨날 울었다. 그러다 보니 또래보다 작고 까맸다.

 오죽하면 한번은 하도 울고 보채서 박정희가 어떻게 이런 애를 키우냐며 갖다버리라고 호통까지 쳤다고 육여사가 하소연까지 했다.

 박근혜가 엄마를 많이 닮았다. 하지만 엄마처럼 키가 크지 않은 점은 그때 젖을 제대로 먹지 못한 이유도 있었던 것 같다. 불쌍했다. 비쩍 마른데다 까무잡잡해 내 딸을 비롯해 다른 아기들에게도 인기가 없었다.

 한번은 박근혜에게 내가 젖을 물렸다. 그런데 빨줄을 모르더라. 1주일에 2~3번씩은 놀러왔다. (육여사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찾아왔다. 나보다 5살 많았다. 박정희와 선봤을 때 26살이었다. 박정희와 나이차가 있었다.

 육여사는 아주 양반이었고 한복맵시도 좋았고 바느질 솜씨도 좋았다. 인품 등 됨됨이가 됐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육여사는 박정희가 키도 적고 인물도 없었지만 사람됨됨이가 됐다는 생각에 결혼을 결심했다는 얘기를 했다. 육여사의 올케도 함께 우리집에 왔다. 53년 여름께 전남 광주로 전근가며 소식이 끊겼다."

【대구=뉴시스】김재욱 기자 = 한금연 씨가 28일 자택에서 딸에게 당시 관사 위치를 설명하고 있다. jukim@newsis.com

 ◇김종필씨는 부인과 사교댄스

 "후임으로 육사출신에 박정희 질녀사위였던 김종필씨가 왔다. 부인이 박영옥씨였는데 박정희의 형 박상희의 딸이었다. 육여사와 달리 선머슴같았다.

 맏이여서 동생들이 자주 들락날락했다. 박영옥이 1살 나이가 많지만 비슷한 연배라 역시 친하게 지냈다.

 김종필은 멋쟁이였다. 어느날 집에 갔더니 사랑채 넓은 방에서 박영옥과 춤을 추고 있었다. 나중에 보니 그것이 사교댄스였다. 요즘도 낯선데 그때 그걸 봤으니 얼마나 놀랐겠나.

 나는 육여사가 나이가 많아 사모님이라고 불렀다. 육여사와 박영옥은 모두 내 딸의 이름을 따서 날 희야엄마라고 불렀다. 첫딸은 1948년생이고 둘째딸이 50년생이다. 모두 뒷이름에 희자가 붙었다.  

 박정희가 대통령이 된 뒤 대구를 자주 찾은 박영옥을 몇 번 봤다. 그때마다 나를 청와대에 초청하려고까지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박정희 상에 묵반찬 빠지지 않아

 "육여사가 박정희의 식사 챙기는 모습을 자주 봤다. 박정희는 메밀묵을 좋아했다. 조그마한 소반에 묵은 빠지지 않았다. 인근 반월당 염매시장에서 청포묵을 많이 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복에 앞치마를 하고 작은 뚝배기 된장찌개와 김치, 밥, 묵만 올렸다. 전형적인 경상도식 밥상이었다. 육여사와의 겸상은 없었다. 일하는 사람 없이 육여사가 모두 챙겼다.

 박정희 밥상을 차리는 것을 보고 하도 볼품없는 상이라서 누군가가 촌놈은 별 수 없다는 얘기까지 했던 것이 기억난다.

 나중에 라디오를 듣고 5.16이 일어난 것을 알았다. 박정희가 대통령 되는 것도 봤다. 박정희와 김종필을 옆에서 지켜본 기억이 있어 '이 사람들은 틀림없다. 제대로 정치할 것'이라고 주위에 말했다.

 육여사가 49세에 총에 맞아 비운으로 갔을 때 정말 슬펐다. 어려울 때 모습을 잘 알다보니 불쌍했다. 애들은 어떻게 클 지 걱정스러웠다. 나중에 대학생이 되고 의젓하게 영부인 역할을 하는 모습을 보고 눈물이 났다."

 ◇엄마 많이 닮아 서민보살폈으면

 "지병으로 바깥외출이 힘들 정도지만 지난번 대통령 선거날엔 휠체어를 타고 자녀들의 도움까지 받아 투표하러 갔다. 예전의 기억이 남아서인지 꼭 투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근혜의 철두철미한 성격은 아버지를 닮은 것 같다. 박정희는 말이 적은 편이었다. 오죽하면 주변에서 1년에 2번 말소리 들으면 많이 듣는다는 얘기까지 있었다.

 하지만 모습은 엄마를 많이 닮았다. 육영수 덕분에 박정희가 인심을 잃지 않았다. 소록도 가서 나환자와 모두 꺼려하던 악수하는 것 보지 않았나.

 육여사를 평가하자면 온순하고 인정많고 재주가 많은데다 가정적이었다. 내가 직접 겪어 잘 안다. 정말 살가운 성격이었다.

 솔직히 노인들이 박근혜를 지지하는 것은 엄마에 대한 향수가 강한 것 같다. 비운으로 갔지만 아직도 국모다운 그녀의 품성은 존경을 받고 있지 않는가.

 마음씨와 성격이 어머니와 똑같은 것 같아 성공에 대한 기대감을 갖는다. 여성대통령으로서 아빠보다 엄마를 많이 닮았으면 좋겠다. 권력보다 품성있게 서민을 하나하나 돌봤으면 좋겠다."   

 ◇각종 사료와 일부 어긋나는 내용도 있어

 인터뷰 내용이 그동안 발표된 사료와 일부 맞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뉴시스를 통해 최초로 공개된 것도 있다. 세월이 오래됐지만 상당히 구체적인 증언이라는 점에서 추후조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각종 사료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50년 부산에서 피난온 육영수 여사를 만났고 그 해 12월12일 대구 계산성당에서 결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례도 대구시장이 한 것으로 전해진다.

 또 박 전 대통령은 육군본부 정보과에서 근무한 것으로 알려진다. 신혼 살림은 대구로 이동해 왔던 육군본부 인근 삼덕동 옛 동인호텔 인근 개인 소유의 사랑채에 살았는데 방이 3개이고 운전병과 부사관이 함께 사용했다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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