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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아우슈비츠 찾은 교황 "주여, 이들의 잔학함을 용서하소서"

등록 2016.07.30 06:51:49수정 2016.12.28 17:2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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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비엥침=AP/뉴시스】프란치스코 교황이 29일(현지시간) 폴란드 오시비엥침에 있는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폴란드어로 오시비엥침-브제진카) 나치 유대인수용소에 홀로 걸어들어가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곳을 방문한 세번째 교황이다. 2016.07.29

【오시비엥침=AP/뉴시스】프란치스코 교황이 29일(현지시간) 폴란드 오시비엥침에 있는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폴란드어로 오시비엥침-브제진카) 나치 유대인수용소에 홀로 걸어들어가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곳을 방문한 세번째 교황이다. 2016.07.29

【서울=뉴시스】박상주 기자 = “주여, 이토록 잔혹함을 용서하소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29일(현지시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이 벌어졌던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폴란드어로 오시비엥침-브제진카) 나치 유대인수용소를 떠나면서 이렇게 기도했다. 폴란드를 방문 중인 교황은 이날 “홀로 들어가서 기도(Alone, enter, pray)”를 하고 싶다면서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범죄현장인 아우슈비츠를 찾았다.

 영국 가디언의 29일 보도에 따르면 교황은 이날 차를 타고 아우슈비츠수용소에 도착했다. 교황은 수용소 정문 앞에서 내렸다. 수용소 문에는 "노동이 자유롭게 하리라(arbeit macht frei)"는 독일어 글귀가 걸려 있었다. 교황은 수행원들도 물린 채 홀로 걸어서 수용소 안에 들어섰다.

 이틀 동안 퍼붓던 비는 어느새 말끔하게 그쳐 있었다. 지구상 가장 어두운 역사를 지난 아우슈비츠수용소의 하늘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

 11번 블록에서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들 10여명이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교황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우슈비츠 생존자들이었다. 교황은 이들에게 다가가 일일이 양 볼에 입을 맞추고, 손을 잡아주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생존자 중 한 사람이 빛바랜 흑백 사진 한 장을 교황에게 건넸다. 수용소 시절 동료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그는 교황에게 사진 속의 한 사람을 가리키면서 자기라고 말했다.

【크라쿠프=AP/뉴시스】프란치스코 교황이 28일(현지시간)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트램 안에 앉아 창문 밖의 신도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2016.07.29

【크라쿠프=AP/뉴시스】프란치스코 교황이 28일(현지시간)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트램 안에 앉아 창문 밖의 신도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2016.07.29

 이날 교황을 만난 생존자들 중에는 올해 101살인 헬레나 두니치 니왼스카(Helena Dunicz Niwińska) 할머니도 있었다. 바이올리니스트였던 그는 1943년 10월 어머니와 함께 아우슈비츠에 수감됐다. 어머니는 캠프에서 사망했다.

 교황은 지하 감방으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한 감방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침침한 램프가 교황의 어깨 위에 한 줄기 빛을 던지고 있었다. 감방의 쇠창살이 돌바닥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감방 벽에는 희미하게 그려진 십자가 표식이 남아있었다.

 교황이 꿇어앉은 방은 75년 전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가 갇혀 있던 방이었다. 당시 콜베 신부의 수인번호는 16770번 이었다.

 폴란드 주두니스카 볼라에서 태어난 콜베 신부는 1907년 콤벤챠르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들어갔다. 콜베 신부는 로마에서 공부를 하고 사제서품을 받았다. 1930~1936년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폴란드로 귀국했다.

콜베 신부는 1941년 2월 28일 아우슈비츠에 수감됐다. 수감 중에도 콜베 신부는 동료 수감자들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끊임없이 호소했다. 그러던 중 1941년 7월 말, 한 수감자가 수용소를 탈출했다. 나치에 의해 지목된 열 명의 처형자 중 한 폴란드 사람이 자기에게는 가족과 아이들이 있다고 울부짖자 이를 본 성 콜베 신부는 자원하여 대신 죽겠다고 자청했다. 결국 성 콜베 신부는 다른 아홉 명과 함께 지하 감옥에 갇혀 아사형에 처해졌다.

【쳉스토호바=AP/뉴시스】폴란드 쳉스토호바에서 28일(현지시간) 프란치스코 교황이 집전하는 미사에 참여하려는 가톨릭 신도들이 발디딜 틈없이 도로를 메우고 있다. 2016.07.28

【쳉스토호바=AP/뉴시스】폴란드 쳉스토호바에서 28일(현지시간) 프란치스코 교황이 집전하는 미사에 참여하려는 가톨릭 신도들이 발디딜 틈없이 도로를 메우고 있다. 2016.07.28

 콜베 신부는 다른 동료들이 모두 죽을 때까지 2주 이상을 물과 음식 없이 생존했다. 나치는 결국 그에게 독극물을 주사했다. 그는 1941년 8월 14일 아우슈비츠의 감방에서 세상을 떠났다. 콜베 십누는 1971년 시복된 데 이어 1982년 성인으로 추존됐다.

 교황은 콜베 성인을 포함한 110만 명의 희생자들을 기리면서 침묵 속에 기도를 올렸다. 희생자들 중에는 18만 5000명의 어린이들까지 들어있었다. 나치 독일의 만행이 저질러지고 있던 75년 전 교황은 아르헨티나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사는 호르헤(Jorge)라는 이름의 4살짜리 어린 아이였다. 

 프란치스코 교황 이전에 다른 2명의 교황이 아우슈비츠를 찾았다. 폴란드인 요한 바오로 2세가 1979년 6월7일 이곳을 찾았으며, 독일인 베네딕토 16세는 2006년 5월 28일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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