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복귀하는 '촛불 시민들'…"민심 왜곡 땐 다시 광장으로"
【서울=뉴시스】이혜원 기자 = 직장인 이모(30·여)씨는 결혼 준비에 애를 먹고 있다. 다음 달 결혼을 앞둔 이씨는 주말에 지인들을 만나 청첩장을 전달하며 인사하고 싶었지만 만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이 기간 동안 이씨의 지인들은 광장으로 나가 촛불을 들고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이씨는 최근 두 달 가까이 주말 저녁 약속을 잡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이씨는 "지인들이 촛불집회에 가야 한다며 늦게까지 이어지는 저녁식사 자리를 부담스러워 했다. 나 역시 집회에 참여하고 싶어 이른 저녁 약속을 잡고 끝나는 대로 광장으로 가곤 했다"면서 "이제 박 대통령 탄핵 심판도 진행되고 해서 주말에 마음 놓고 약속을 잡을 수 있게 됐다"고 안도했다.
지난 7주간의 '촛불 대장정'이 마침내 탄핵소추안 가결까지 일궈내면서 광장에서 주말을 보내던 시민들이 차츰 일상으로 복귀하고 있다.
전국 232만명(서울 170만명)이 집결해 역대 최대 규모를 기록했던 지난 3일 6차 촛불집회 때보다 절반 이하로 줄어든 규모다. 9일 박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과 함께 쌀쌀한 날씨 탓에 시민들의 참여율이 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퇴진행동은 "박 대통령 즉각 퇴진 때까지 촛불집회를 계속 이어가겠다"는 방침이지만 시민들이 100만명 안팎씩 참여하는 종전의 대규모 촛불집회로 이어지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탄핵소추안 가결과 추위, 연말 분위기 등이 겹치는 탓이다.
서울 중구에서 직장을 다니는 박모(32)씨는 "일 년 중 토요일 저녁을 집에서 보내는 날이 손에 꼽힐 정도로 술자리를 자주 갖는 편이지만 근 두 달간은 웬만하면 모임을 잡지 않았다"며 "주변에서도 '토요일=촛불집회' 공식이 생겨 되도록 그 시간을 피해 약속을 잡았다"고 전했다. 박씨는 "촛불집회도 사실상 끝나가고 이제 연말인 만큼 여러 송년회 약속을 잡을 계획"이라고 전했다.
4·5·6차 촛불집회에 참여했다는 김모(26·여)씨는 "거의 한 달간 토요일엔 광화문에 있었다. 원래 소개팅을 할 계획도 있었지만 취소했다"며 "집회 때마다 아는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탄핵이 안 되면 송년회를 광화문에서 해야 하나 생각도 들었다"고 돌아봤다. 이어 "탄핵안도 가결됐으니 이제 자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됐다"며 "당장 오는 토요일과 다음 주말 소개팅과 미팅, 송년회 등을 할 예정"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직장인 박모(32·여)씨도 "그동안 촛불집회에 빠져 살았는데 이제 집에서 가족을 챙겨야겠다"며 "연말은 가족과 오붓한 시간을 보낼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상인들도 달라진 주말 풍경을 체감하고 있다.
인근에서 전통주점을 운영하는 상인도 "지난주엔 친구들과 놀러 나온 손님들이 많았다"며 "이전과는 다른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시민들은 민심에 반하는 일이 발생하면 언제든지 촛불을 들고 다시 거리로 나갈 준비가 돼 있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2년 차 직장인 최모(27)씨는 "매주 촛불집회에 나갔지만 국회 탄핵안 가결로 국민의 뜻이 받아들여졌다는 생각에 지난주엔 광장에 나가지 않았다"며 "가결 후에도 정치권은 서로 책임을 돌리며 싸우고 있다. 지금은 가만히 두고보고 있지만 국민의 뜻이 관철되지 않는 상황이 된다면 그땐 횃불을 들고 나갈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남자친구와 '촛불집회 데이트'를 해왔다는 김모(27·여)씨는 "매주 토요일 집회에 나갔지만 이번 주엔 연말 및 휴가 계획을 짤 예정"이라면서도 "탄핵이 됐으니 일단 첫 번째 목적은 이뤘다고 생각하지만 차후 경과를 보고 언제라도 다시 광화문으로 갈 의지가 있다"고 밝혔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지난주를 기점으로 향후 열리는 집회는 종전의 규모를 유지하긴 쉽지 않을 것"이라며 "연말이기도 하고 일단 탄핵까지 지켜보자는 분위기"라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다만 "헌재 재판을 둘러싸고 정치판이 요동치고 있는 만큼 민심에 반하는 일이 발생하면 시민들이 의사 표현을 위해 다시 재결집될 소지가 있다"면서 "'구질서'라고 불리는 사회 문제들에 대한 시민의 분노는 지금도 용암처럼 끓고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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