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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 재발견①]현충일, 오늘 부르는 이 노래는?

등록 2012.06.06 07:21:00수정 2016.12.28 00:4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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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신동립의 '잡기노트' <295> 애국가의 재발견①  노래로 나라를 표상한 것이 국가다. 국호·국화와 함께 국가상징의 하나다. 상징은 인간·사물·집단 등의 복잡한 개념을 단순하게 표시하도록 만든 의사전달의 한 요소다. 추상적 개념을 구체적인 현상으로 나타낸 기호다.  문화부장 reap@newsis.com

【서울=뉴시스】신동립의 '잡기노트' <295> 애국가의 재발견①

 노래로 나라를 표상한 것이 국가다. 국호·국화와 함께 국가상징의 하나다. 상징은 인간·사물·집단 등의 복잡한 개념을 단순하게 표시하도록 만든 의사전달의 한 요소다. 추상적 개념을 구체적인 현상으로 나타낸 기호다.

 한 나라의 역사와 이념을 가사와 선율로 드러냄과 동시에 그 민족의 역사와 민족성, 그리고 미래상까지 반영한 국민적 노래가 국가다. 국가를 부르는 행위를 통해 국민들은 민족 정서에 공감한다. 이념을 일체화시켜 연대감과 동질감을 맛본다. 본질적으로 공동체적 유대를 공유한다.

 신나라레코드(회장 김기순)의 사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애국가는 전제국가나 근대혁명국가, 특히 북에서처럼 '공모→제정→공포→시행'을 거친 제도적 채택이 아니다. 1896년 '성자신손 천만년은··'으로 시작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란 후렴의 '무궁화가'로 불려오다 1907년 현재의 4절 가사로 바뀌었다. '무궁화가'는 외국노래(올드 랭 사인)의 곡조를 쓰다가 1935년 안익태 작곡으로 미주지역 독립운동 진영에서 불리기 시작했다.

 1940년 '북미대한인회 중앙위가 안익태 작곡 애국가 신곡보의 사용허가를 요구하였으므로 국무회의에서 그 사용을 허가하기로 의결한다'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공보 제69호에 따라 임시정부에서도 불려지게 됐다. 이어 1941년 광복군 성립식에서 공식 연주된 것을 기점으로 임시정부가 국가로 준용(準用)하기에 이르렀다. 광복 이후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계승한 대한민국 제헌국회는 이 애국가를 1948년 정부수립식에서 부르며 국가로 공인했다.

 국가는 순수·대중가요와 달리 음악성을 전제하지 않는다. 애국적인 내용을 중시한다. '국가는 음악성에서 우수하지 않은 것이 있으나 멜로디의 독자적인 매력과 가사에 열렬한 애국심이 반영돼 있다. 처음부터 국가로 작곡된 것도 있지만 기존의 곡이 국가로 사용된 경우도 있다.' (83개국 국가를 연주한 음반 '골드 스트림․재즈밴드'의 악장 R G 스위프트의 앨범해설 중)

 '열열한 애국심의 반영'이란 무엇인가. 나라와 시대마다 다르다. 대개 국가의 번영과 자유 기원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세 가지를 손꼽을 수 있다. 

 첫 번째는 전통적인 의미로 왕실이나 국왕을 찬양하고 영광을 기원하는 것으로 영국·네덜란드·덴마크 등의 국가가 여기에 속한다. 두 번째는 첫 번째와 대조적인 내용으로 군주제의 반대 내지 혁명을 노래한 것으로 전투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프랑스와 멕시코의 국가가 여기에 속한다. 세 번째는 역사를 회상하고 국토를 예찬하는 내용이다. 우리 국가가 여기에 속한다.(장호상, 브리태니커 세계대백과사전)

【서울=뉴시스】이동원 기자 = 19일 오후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2012 런던 올림픽 아시아지역 2차 예선 1차전 대한민국과 요르단의 경기가 열렸다. 가수 임재범이 경기시작전 애국가를 열창하고 있다.  dwlee@newsis.com

 우리의 국가는 애국가다. 이 애국가는 국가의 고유 곡명이다. 동시에 나라를 사랑하자는 '애국의 노래'의 범칭이기도 하다. 즉, 나라의 상징물인 국가(National Anthems)이면서 '나라 사랑의 노래'인 애국가(patriotic hymn)의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국가와 애국가를 동일시해 온 셈이다. (이를 더욱 명료하게 보여주는 것이 '증보문헌비고' 악고(今上 光武 四年 設軍樂)인데, '대한애국가' 외에 수교를 맺은 일본·영국·미국 등 9개국의 '애국가'를 싣고 있다)

 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는 "우리는 근대국가 성립기에 탄생한 나라의 국가와 다른 민중적이고 민주적인 국가를 갖게 됐다. 그 어느 나라 국가 못잖은 역사성과 정통성을 지닌 국가다. 그저 역사적인 음악 작품으로 인식해서는 안 된다. 작사·작곡자의 성향이나 음악성에 따라 나라가 위촉해 성립한 것이 아니다. 민중의 애국심으로 이뤄진 것을 특별한 계기에 민중적 합의로 채택했다. 애국가는 독립을 바라는 민중이 선택해 국가가 됐다. 역사성과 국가로서의 정통성은 그렇게 확보됐다"고 강조한다.

 애국가는 일제강점기 3·1운동 현장에서 불리며 항일구국이라는 이념을 실천했다. 이렇게 획득한 '민족적 합의'를 어떤 이유로든 손상해서는 안 된다. 분단 이전 민족구성원 모두가 부른 애국가는 민족 대통합을 위해 오늘도 절실히 필요하다. 상하이 임정시절 애국가 작사자가 누구인지를 묻는 동지에게 김구는 '우리가 3·1운동을 태극기와 애국가로 싸웠는데, 누가 지었는지가 왜 문제인가'라고 반문했다. 여전히 유효한 답변이다. 걸핏하면 북은 남을 위협하고, 남에서는 하루에도 몇번씩 듣고볼 수밖에 없는 단어가 '종북'인 현실이다.

 그런데, 애국가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과연 애국가는 작사자 미상인가. 개정 또는 제정 주장은 타당한가. 통일 후 국가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는 애국가의 작사자를 밝히고자 최남선 외 4인으로 위원회를 결성했고, '애국가 작사자 조사자료'를 펴냈다. 그리고 이 자료에 '작사자 미상'이라고 명기했다. 57년 전의 결론이다. 사실일까? <계속>

 문화부장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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