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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에 당한 고통 80대까지"···잊을 수 없는 日 강제노역

등록 2017.08.11 15:48:57수정 2017.08.11 15:5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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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뉴시스】신대희 기자 = 일제 강제노역 피해자들이 전범기업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제기한 2차 손해배상 소송에서 승소한 11일 오후 광주 동구 광주지방법원 앞에서 근로정신대 피해자 양금덕, 김재림(87·여) 할머니, 고 오길애 할머니의 유족 오철석씨가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2017.08.11.   sdhdream@newsis.com

【광주=뉴시스】신대희 기자 = 일제 강제노역 피해자들이 전범기업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제기한 2차 손해배상 소송에서 승소한 11일 오후 광주 동구 광주지방법원 앞에서 근로정신대 피해자 양금덕, 김재림(87·여) 할머니, 고 오길애 할머니의 유족 오철석씨가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2017.08.11.   [email protected]

【광주=뉴시스】류형근 기자 = 10대에 일본의 전범기업에 끌려가 인생을 빼앗긴 강제노역 피해 할머니들의 고통은 해방 이후에도 잊혀지지 않고 있다. 
 
 이들은 80대 고령의 나이에 세상에 나와 일본의 사과를 촉구하며 역사 바로잡기 선두에 서고 있다.
 
 11일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이 공개한 일본 미쓰비시 중공업 상대 손해배상 소송 8명의 기록은 이들의 처참한 80여년의 세월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 '가족 지키기 위해' 일본 끌려간 소녀들  
 
 3남매의 막내로 태언난 박해옥(87) 할머니는 1944년 3월 전남 순천의 한 초등학교를 졸업했지만 가정 형편상 진학을 포기한 채 일본 헌병의 말에 속아 끌려갔다.  
 
 헌병대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가족들을 형무소로 끌고 갈 것 같아 박 할머니는 "6개월 뒤 돌아올게"라는 말을 남긴 채 일본행 배에 올랐다.

 박 할머니는 미쓰비시 공장에서 비행기의 기체를 구성하는 부품을 목형에 맞추는 일을 하던 중 발을 크게 다쳤지만 치료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채 고된 노동을 강요 당했다.
 
 이동련(87) 할머니는 "어린 딸을 일본에 보낼 수 없다"는 가족의 만류에도 불구, 일본행을 택하지 않을 경우 부모님이 형무소에 잡혀 갈 수 있다는 말에 전남 나주에서 일본행 배에 몸을 실었다.

 공장에 도착한 뒤부터는 물로 배를 채우는 생활이 반복됐지만 "돈을 벌어 부모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고된 노동을 견뎠다.

 공장의 라디오를 통해 해방 소식을 들었지만 함께 갔던 친구를 잃은 채 돌아와야 만 했다. 아직도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 "공부하며 돈 벌 수 있다"는 말에 속은 10대 소녀들
 
 양영수(88) 할머니는 당시 14살의 나이에 "일본에 가면 공부도 공짜로 하고 돈도 벌 수 있다. 좋은 학교도 갈수 있다"는 일본 교사의 말에 속았다.
 
 나고야의 미쓰비시중공업 항공기제작소에서 감옥과 다를바 없는 고통을 겪었다.
 
 식사는 빵이나 감자가 대부분이었고 밥은 한 숟가락 정도였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목욕이 가능했지만 이마저도 일본인들이 먼저 한 뒤 이뤄졌다.
 
 편지조차 감시를 당해 "편안하게 잘 있다"는 내용을 고향 어머니에게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
 
 가족 품으로 돌아온 이후 스무살에 결혼했지만 "일본에 갔다 왔다"는 얘기는 하지 않은 채 수십년을 숨죽여 지냈다. 지난 2012년 9월부터는 건강이 좋지 않아 요양원에서 생활하고 있다.
 
 전남 화순의 한 초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김재림(87) 할머니 역시 "공부하고 많은 돈을 벌수 있다"는 꼬임에 넘어가 1944년 늦은 봄 미쓰비시 공장에 끌려가 하루 종일 군용 비행기의 부속품을 깎는 일 등을 했지만 끼니도 먹지 못하는 상태에서 월급마저 받지 못했다.
 
 "월급은 언제 주느냐"고 감시하던 사감에게 묻기도 했지만 심한 매질과 함께 "통장에 다달이 저축되고 있다"는 한마디만 들었을 뿐 한푼도 받지 못한 채 해방이후 고향에 돌아왔다.
   
 #. 치료받지 못한 강제노역 상처

 김성주(88) 할머니는 일본에서 일 하던 중 손 왼쪽 손가락 끝이 절단기에 잘리는 사고를 당했지만 함께 작업하던 일본인이 잘린 손가락을 주워 손 위에 올려놓고 공기놀이를 하며 "손가락이 크구나" 하는 놀림을 받던 기억을 잊지 못하고 있다.

 대지진 당시 다리까지 다친 김 할머니는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결혼 뒤 이혼의 아픔을 겪었고 당시의 부상이 제대로 치료되지 않아 현재까지 아픈 몸을 이끌고 어렵게 생계를 잇고 있다.

 김영옥(85) 할머니는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속아 혼절한 할머니를 뒤로 하고 일본으로 넘어가 강제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무엇보다 밤마다 이어진 공습을 피하던 중 폭탄 맞은 기름통이 몸에 튀어 양쪽 팔에 화상을 입은 채 해방 이후 고향에 돌아왔다.
 
 팔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흉터를 보이기 부끄러워 한여름에도 긴팔 옷을 입어야 했고 최근에는 청력마저 나빠져 병원을 오가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다.
 
 14살에 일본에 끌려가 강제노역을 당한 심선애(87) 할머니 역시 돌아와서도 폭력과 대지진 당시 목격한 처참한 모습, 노동의 고통을 잊지 못하고 파킨스 병을 얻어 지난 2015년부터 요양원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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