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이스북
  • 트위터
  • 유튜브

[인터뷰]조봉암 서거 60주기…"그는 앞날 내다 본 정치인"

등록 2019.07.31 15:13:09수정 2019.08.01 09:28:39

  • 이메일 보내기
  • 프린터
  • PDF

곽정근 '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회장 인터뷰

"국내 정치·사회적 현실, 당시와 다르지 않아"

"죽산, 시대 앞서 평화통일·무상교육 등 외쳐"

곽 회장 "미래의 한국을 위한 정책을 편 것"

죽산 딸 "父 독립운동가 선정, 죽기 전 소원"

일제 헌금 이력 기사 탓 서훈 못 받고 있어

"당시는 옥살이 이후…낼 만한 여력 없었다"

추모제, 31일 오전 11시 망우리 묘역서 진행

【서울=뉴시스】박미소 기자 = 곽정근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이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교대역 인근 카페에서 뉴시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19.07.30. misocamera@newsis.com

【서울=뉴시스】박미소 기자 = 곽정근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이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교대역 인근 카페에서 뉴시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19.07.30.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최현호 기자 = 31일은 죽산 조봉암 선생 서거 60주기다. 최근 학계에서 근현대 한국 민주주의의 시발점을 3·1운동으로 보는 시각이 늘고 있는 가운데, 마지막까지 민주주의를 외치다 '진보당 사건'으로 희생된 죽산 선생의 서거 기일을 맞은 것은 의미가 깊다. 죽산 선생이 사형장에서 언급한 '많은 사람이 고루 잘 살 수 있는 정치 운동'은 여전히 요원하기에 더욱 그렇다.

한국의 정치·사회적 현실은 죽산 선생 생전인 60여년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최근 호전 기미를 보이곤 있지만 남북의 갈등 상황은 여전하고, 친일·반일을 둘러싼 논쟁도 치열하다. 노동계급과 자본계급 간의 거리감도, 과거엔 지주와 소작농의 갈등으로 나타났다면 지금은 대규모 비정규직 파업처럼 그 형태만 다를 뿐이다. 죽산 선생의 목소리는 그래서 지금도 유효하다.

뉴시스는 죽산 선생 서거 60주기를 하루 앞둔 지난 30일, 곽정근(87)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을 만났다. 그는 "오늘날 같으면 내 말이 맞지 않았느냐, 이런 얘기를 하지 않았을까"라고 말했다. 죽산 선생이 살아있었다면 현재 정치·사회적 현실을 보며 이런 말을 했을 것이란 의미다.

곽 회장은 죽산 선생의 신념에 대해 "크게 평화통일, 균등경제, 참신한 정치라는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죽산 선생은 두 번째로 도전한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이승만정부가 북진통일을 주장하던 당시로썬 파격적인 '평화통일'부터 '국민의료보장', '무상교육'까지 개혁적인 정책을 내세우며 출마했다.

곽 회장은 "그때 당시 현실로 보면 맞지 않는 내용도 있다. (하지만) 지금 와서는 결국은 평화통일론이 나오고 있고, 여나 야나 복지 정책을 들고 나오는데 그때 이미 죽산 선생은 부르짖은 것"이라면서 "앞날을 내다본 정치인이었고, 미래 한국을 위한 정책을 편 것"이라고 말했다.

곽 회장은 죽산 선생의 이같은 이념에 매료돼 대학 진학을 앞두고 제3대 대선 당시 선거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선거 운동에 형사가 따라붙고, 경찰 검문에서 선거차량 운전자 면허증을 빼앗기는 등 편파적이다"고 당시 선거 분위기를 회상하면서도 "조봉암 후보에 대한 노동자들의 지지는 대단했다"고 전했다.

곽 회장은 "선거 운동 사무실에 차량이 지프차 한 대밖에 없었는데, 유세 막바지에 운동원 몇 사람이 올라타 골목을 돌 때 조봉암이라니까 사람들이 놀라던 게 기억난다"면서 "해안 노동자들 많은 쪽에 가면 손을 흔들며 쫓아왔다. (연설이) 끝나고 차가 빠질 때까지 쫓아오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고 회고했다.

역사적으로 조봉암 후보는 당시 선거에서 이승만 후보 측의 부정선거로 낙선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처럼 많은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알려진 바와 같이 죽산 선생은 간첩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형장에서 생을 마쳤다. 죽산 선생은 유족들의 노력 끝에 2011년에야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서울=뉴시스】박미소 기자 = 곽정근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이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교대역 인근 카페에서 뉴시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19.07.30. misocamera@newsis.com

【서울=뉴시스】박미소 기자 = 곽정근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이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교대역 인근 카페에서 뉴시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19.07.30.  [email protected]

곽 회장은 "(유족들이) 완전히 명예회복이 되며 조금씩 위축된 감정을 벗어날 수가 있었다"면서 "그렇게 되니까 독립운동가로서의 서훈도 받게 될거라는 희망도 가질 수가 있었다"고 언급했다.

죽산 선생은 3·1운동 참여로 인한 서대문형무소 1년 복역, 한인청년동맹 항일활동으로 인한 신의주형무소 7년 복역 기록에도 아직까지 독립운동가 서훈을 못 받고 있다. 국가보훈처는 일제에 국방헌금 150원을 냈다는 점이 매일신보 기사를 통해 확인됐다는 이유를 들고 있다.

곽 회장은 현재 90세가 넘은 죽산 선생의 딸 조호정 여사가 "한 가지 소원(독립운동가 선정)을 풀고 죽는 게 소원이라고 한다"고 전했다. 이어 "1941년도(국방헌금 기부가 기록된 시점)면 (죽산 선생이) 신의주형무소에서 7년 옥살이를 하고 나와서 고향인 인천에 가 있을 때인데 몸도 쇠약하고 침체기였다"면서 "그걸 낼만한 여력이 없었다. 냈을 리가 없다는 서명도 여러차례 냈다"고 주장했다.

한편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는 2008년 창립총회를 가진 이후 추모제뿐만 아니라 죽산 선생 관련 강연회, 심포지엄, 생가터 발굴 등 다양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곽 회장은 "서울 종로구 낙원동의 사업회 사무실에서 죽산 선생이 국회의원도 하고 장관도 하고 했으니 국회 속기록을 다 뽑았다"면서 "올해 안에 어록·연설문 자료집을 낼 예정"이라고도 설명했다.

강화도 출신인 죽산 선생은 사회주의 중심의 항일운동을 하던 독립운동가다. 광복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에서 활동하다 전향해 중도 노선을 걸으며 1946년부터는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1948년 이승만정부에선 제헌의원과 초대 농림부장관을 지내며 농지개혁을 전개했다. 농지개혁은 당시 국민의 대부분을 이루던 소작농의 비중을 줄이고 자영농의 비중을 늘리는, 즉 토지소유권을 경작자에게 이양하는 정책이다. 농업 자본을 산업 자본으로 바꿔 한국 자본주의와 경제발전의 기틀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진보당 사건'에 휘말리면서 1959년 7월31일 형장에서 생을 마감한다. 이승만정부에 의한 죽산 선생의 죽음은 '헌정 사상 첫 사법살인'으로 기록됐다.

추모제는 31일 서울 중랑구 망우리 공원 그의 묘역에서 오전 11시에 진행됐다. 오전 11시는 그의 사형이 집행된 시각이다.


[email protected]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