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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 재발견②]이것은 민중의 선택이었다

등록 2012.06.08 06:01:00수정 2016.12.28 00:4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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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신동립의 '잡기노트' <296> 애국가의 재발견②  1919년 3·1운동 기간, 현 애국가는 태극기와 함께 하나의 이념으로 대오를 유지시키는 데 절대적으로 기여했다. 이전까지 여러 애국가가 불렸지만 민중이 선택한 최종 애국가는 현 애국가다. 애국가를 국가와 동일시했다. 임시정부는 물론 북한도 마찬가지다. 북은 1947년 박세영 작사·김원균 작곡의 국가를 '애국가'라고 명명했다. 신나라레코드(회장 김기순) 등이 보유한 애국가 명칭 자료는 30여종, 현 애국가의 맥을 잇는 자료는 10여종에 이른다.   문화부장 reap@newsis.com 

【서울=뉴시스】신동립의 '잡기노트' <296> 애국가의 재발견②

 1919년 3·1운동 기간, 현 애국가는 태극기와 함께 하나의 이념으로 대오를 유지시키는 데 절대적으로 기여했다. 이전까지 여러 애국가가 불렸지만 민중이 선택한 최종 애국가는 현 애국가다. 애국가를 국가와 동일시했다. 임시정부는 물론 북한도 마찬가지다. 북은 1947년 박세영 작사·김원균 작곡의 국가를 '애국가'라고 명명했다. 신나라레코드(회장 김기순) 등이 보유한 애국가 명칭 자료는 30여종, 현 애국가의 맥을 잇는 자료는 10여종에 이른다.  

 ○…최초의 애국가류는 '새문안교회 애국가'다. '국가' 또는 '애국가'라는 명칭을 사용하면서 개인 명의의 창작이 아닌 공공을 대상으로 애국계몽적 내용을 담은 노래가 국가 개념의 애국가라고 본다면, 1896년 9월9일 고종황제 탄신일을 맞아 새문안교회가 지어 부른 '새문안교회 애국가'(황제 탄신축가)가 시초다. '새문안교회 70년사'(1958)는 이 애국가의 영어와 한국어 가사를 나란히 기재하고 있다. 곡조는 '아메리카'로 알려진 현 '합동찬송가' 468장, 즉 '영국 국가'다.

 'Thine Almighty Power/ Our Royal Emperor has been Enthroned/ Thy Holy Spirit grant our Nation never fail/ Long Live our Emperor, Upheld by Thee.' 높으신 상쥬님 자비론 상쥬님/ 궁휼히 보쇼소 이나라 이땅을/ 지켜조옵시고 오쥬여 이나라/ 보호하소셔.'

 'To Thee the only Lord, Maker and King Divine/ We offer praise/ When all shall worship Thee, Happy our land shall be/ Powerful, rich, and free, Beneath Thy smile.' 우리의 대군주 폐하만세/ 만만세 만만세로다/ 복되신 오늘날/ 은혜를 나리사 만수무강케/ 하야주소셔.'

 나라와 대군주를 보호해 달라고 주(상주님)에게 기원하는 내용이다. 당시 군주는 고종, 곧 나라(국가)다. 기독교를 통해 애국가류가 창작되기 시작했음을 알려주는 동시에 '상주님'과 '하느님', '보호'와 '보우', 그리고 '만만세'와 '만세' 등에서 현 애국가가 보인다. '새문안교회 애국가'의 작사자에 대해서는 아직 확인된 바가 없다. 이유선 교수가 '한국양악 80년사'에서 윤치호 작사 가능성을 시사한 바 있을 뿐이다.

 ○…1899년 6월29일자 독립신문의 배재학당(1896년 11월 개교) 방학예식 기사는 '무궁화가'의노랫말 4절도 함께 게재하고 있다. '오늘 대죠션 독립협회 회원들이 독립문 주춧돌을 독립공원에서 오후 2시 반에 놓을 터이요, 례식과 축사를 연설하여 학교 학도들이 애국가를 노래할 터이요.' 이 보도에 언급된 '무궁화가'는 애국가의 역사에서 매우 의미 있는 노래다. 간절한 노랫말은 물론, 호소조의 후렴과 8·6조의 형식면 등이 매우 짜임새 있다. 후렴이 현 애국가와 동일하다는 사실, 9년 후인 1908년 윤치호 역술 '찬미가'(재판)에 다시 나타난다는 점에서 특히 관심을 끈다. 현 애국가의 작사자를 밝히는 결정적 단서가 바로 '찬미가'다.

 '셩신숀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 산슈 고려 동 반도는 우리 본국일셰/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죠션 사름 죠션으로 기리 보죤하셰/ 이천만 오직 한 마음 나라 사랑하여/ 사농공상 귀천 업시 직분만 다하셰.'

 '무궁화가'에 현 애국가 후렴이 등장한다. 후렴이 같으면 같은 노래로 보는 민요론을 따르면, 현 애국가의 출현은 1899년 이전이 되는 셈이다. 이 노래가 당시 애국단체나 기독교계에서 불렸음은 이승만·여운형 등과 더불어 배재학당 제1회 졸업생으로 러시아 공사관 서기였던 이익채의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 가능하다. 그는 '협성회 무궁화노래'라고 썼다. 협성회는 서재필이 주도한 배재학당 출신들의 모임이다. 공립신보 1908년 3월11일자는 '애국가'라고 표기하기도 했다.

 ○…1895년 조정은 홍범 14조로 군악대 창설을 논의하고, 1896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한 민영환과 윤치호는 황실 군악대 창설과 군악 제정 복명서를 건의했다. 조정은 1900년 12월19일 칙령 제68호로 군악대 설치령을 반포했고, 이에 의거해 시위대와 시위기병대에 군악대를 설치케됐다. 군악대는 1901년 9월9일 첫 연주회를 열었다. 조정은 다시 이 시기를 전후해 국가상징에 관심을 갖게 됐다. 1902년 국가·군기·국장(李花 紋章) 등을 관장하는 기장(旗章) 조성소를 운영했다. 이를 황성신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領旗聖諭 再昨日(영기성유 재작일) 황상폐하께옵서 詔勅(소칙)을 下(하)하셨난데 음악을 文臣中(문신중)으로 선정하라 하셨고.'

 이렇게 국가 제정 준비가 시작됐다. 관련 나라의 애국가(국가)를 참고했고, 기왕에 불리는 애국가류도 참고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대 국내에 서양식 악대 지휘는 물론 작곡을 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외국에서 담당자를 고빙해야했다. 주한 독일공사관 와이파트의 추천으로 일본에서 귀임한 프란츠 에케르트가 초빙됐다. 에케르트는 오랫동안 일본에서 군악대 지휘와 황실의전 음악을 정비한 인물로 조선 조정에도 알려진 인물이었다. 구한국관보 1901년(광무 6) 1월27일자를 보면, 고종은 의정대신 윤용선에게 국가를 제정하라고 명했다.   

 '인심을 感發(감발)케 하고 사기를 쉬려함으로써 충성심을 돋우고 애국심을 진작함에 있어 聲樂(성악)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마땅히 국가의 節奏(절주)를 제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문임(홍문·예문관의 제학)으로 하여금 찬진케 하노라.'

 이후 1년여인 1902년 7월1일 작곡이 끝났다. 민영환 서문·에케르트 작곡 '대한제국 애국가'(Kaiserich Koreanische Nationnal hymn) 총보를 완성, 악보 500부를 발행했다. 에케르트의 의견에 따라 독일에서 인쇄했는데 매우 호화롭게 장정된 악보집은 태극 문양과 무궁화를 국가상징으로 표지에 실었다. 대한제국이 흠정(欽定) 국가임을 웅변했다. 정식 명칭도 '애국가'다. 노랫말은 독일, 미국, 프랑스, 러시아 4개국어와 음역 가사 그리고 궁체 한글 가사로 적고 순한문의 서문을 넣었다.

【서울=뉴시스】허경 기자 = 1일 오후 서울 정동 미국대사관저에서 열린 미국 독립기념일 축하연에서 소리꾼 장사익이 애국가를 열창하고 있다.  neohk@newsis.com

 '상뎨는 우리 황뎨를 도으사 셩수무강하사/ 해옥듀를 산갓치 받으시고 위권이 황영에 떨치사/ 오쳔만새에 복녹이 일신케 하소셔/ 샹뎨는 우리 황뎨를 도으소셔/ 상뎨는 우리 황뎨를 도으소셔.' 'gott beschutze unsern Ksiser/ Dass sich Jahre mehren/ Zahlos sich Jahre mehren/ Der sich hoch zur Dune haufet/ Weithin uber alle Weiten/ Und das Gluck des Herrscherh/ Tausendmal zehntausend Jahre/ Neu mit jedem Tag erbluhe.'

 군주와 국가를 일체로 보고 그 영광이 곧 나라의 번영을 뜻한다고 노래했다. 매우 간절한 기원의 반영이다. 노랫말 첫 절과 끝 절의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우소서'와 '해옥주를 산같이 받으시고 위권이 환영에 떨치사'는 그 무렵 애국가류의 일반적 표현이다. 전자는 '무궁화가'중 '우리나라 우리황실 황천이 도우샤'나 '새문안교회 애국가'중 '오 주여 이 나라 보호하소서'와 같은 것이다.  

 총 34소절 바단조다. 제1소절에서 16소절까지 안단테 MM♩=112, 17소절에서 25소절까지 알레그레토 MM♩=64, 26소절부터 아템포, 30소절부터 리타르단도, 32소절부터는 디미누엔도로 돼있다.

 ○…'찬미가'에 수록된 '패트리어틱 힘(hymn) 14'는 현 애국가다. 애국가의 탄생이 확인된다. '찬미가'를 주목해야하는 이유다. 아울러 '찬미가'의 역술자가 윤치호이기 때문에 현 애국가의 작사자를 윤치호로 단정하게 된다. 제1절은 영원성을 나타내는 전통적인 표현법을 써서 다소 과장되게 '우리나라'의 존립을 기원하고 있다. 반면, 제4절은 한편의 서정시를 대하듯 매우 정갈한 은유로 나라 사랑의 의지를 다짐시키고 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 달토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대한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남산 우헤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이슬 불변함은 우리 긔상일세….'

 '가을하날 공활한대 그름업시 높고/ 밝은 달은 우리가슴 일편단심일세….'

 '이 긔상과 이 마음으로 님군을 섬기며/ 괴로우나 질거우나 나라사랑하세….'

 1996년 노동은 교수는 '1905년의 찬미가에서 매우 중요하게 주목할 또 하나의 사실은 곡명 없는 애국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 달토록'이 제14장으로 게재된 점이다. 치열한 민족현실에서 민중들이 합의해 낸 이 애국가는 현행 애국가 가사와 한 획도 틀리지 않고 같다는 점에서 그러한데, 어차피 역술한 윤치호 이름으로 밖에 확인할 수밖에 없지만, 이것이 무궁화래(가)와 별도로 발표하였다는 점에서 애국계몽운동 시기가 바로 애국가 짓기와 부르기 운동 시기이었음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짚었다.(한국근대음악사1·한길사)

 윤치호는 1945년 12월 사망 직전 가족에게 남긴 자필 '가사지' 말미에 작사 연대를 1907년이라고 밝혔다. 윤치호의 직접 진술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결국, 애국가는 애국 계몽시대인 1890년대에 싹이 터 을사늑약 체결을 전후해 민중이 택했고, 3·1운동 기간에 불린 것이다. 여느 나라의 국가와 달리 밖(외적)을 의식하지 않고 안에서의 애국을 강조하기 위한 노래였다. 평화 애호적이다. '대한제국 애국가'의 '상제는 우리황제를 도우사', 애국가의 '하느님이 보우하사'와 같은 노랫말이 그렇다. 일부 노랫말이 호전적인 타국가들과 딴판으로 애국가는 평화를 스스로 외치고 있다.

 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는 "이토록 많은 애국가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형성, 불려오다 역사성과 정통성을 획득한 현 애국가가 국가가 된 것"이라며 "1세기 이상된 애국가는 근대 신생국들의 국가 역사와는 또 다른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고 설명했다. <계속>

 문화부장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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