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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세 시대]"욕심 내려놓고 기쁘게 살아야"…이의재 할아버지의 상수(上壽) 잔치

등록 2017.02.21 10: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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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임재희 기자 = 지난달 100번째 생신을 맞은 이의재 할아버지. 2017.02.21.  (사진 = 강동구 제공)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임재희 기자 = 지난달 100번째 생신을 맞은 이의재 할아버지. 2017.02.21.  (사진 = 강동구 제공)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임재희 기자 =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이북에서 자랐어요. 6·25 전쟁중 1·4 후퇴때 남한으로 내려왔지요. 북에 두고 온 가족 만날 날을 기다리다 5·16쿠데타때 딸을 얻었는데 지금은 같이 늙어가는(?) 처지가 됐네요."

 이의재 할아버지는 올해 만으로 100세다. 1917년 1월10일 북한 평안남도 순천시에서 태어나 2017년 서울시 강동구에서 100번째 생일을 맞았다. 그의 삶은 한국 근현대 100년사와 맞물릴 수밖에 없다.

 100번째 생일을 기념해 시립고덕양로원이 20일 오후 개최한 '온세상 축하연'에서 할아버지를 만났다.

 이날 생신선물로 장수지팡이로 알려진 '청려장'을 받았으나 할아버지는 지팡이 없이도 양로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생신을 축하하는 친구들과 인사를 나눴다. 스스로 건강을 잘 관리해 양로원 관계자들로부터 '어르신들의 롤모델'이라고 불린다. 그는 29년째 매일 게이트볼을 즐기는게 자신만의 건강관리법이라고 전했다.

 할아버지는 또박또박 힘이 실린 어투로 지금으로부터 97년전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북한에서 살고 죽었던 사람입니다. 세살적에 마마(천연두) 예방주사를 맞았는데 약이 강했는지 가족들은 처음엔 내가 죽은줄 알았대요. 아버지가 나를 묻기 전에 밤새 술을 먹고 있는데 새벽녘에 우는 소리가 들리더래요. 죽다 살아난거죠."

 자신을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라고 말한 그는 34년간 평안남도 순천시에 살았다. 국민학교와 면사무소 등지에서 일하다 결혼하고 아버지의 농사를 도왔다. 고향을 떠난 건 전쟁 탓이다.

 1950년 6·25전쟁이 터졌을 때까지만 해도 고향을 지켰던 그는 이듬해 1·4 후퇴때 피난길에 올랐다. 처음엔 3일만 몸을 피하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줄 알았다. 66년이 지나도록 고향 땅을 밟지 못할 거라곤 상상조차 못했다.

 피난길에 가족들과도 헤어졌다. 따로 살았던 남동생은 피난길조차 오르지 못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당시 읍내 고모집에서 머무르겠다고 했단다. 아들을 어깨에 태우고 아내와 함께 대동강을 건넜다. 평양을 지난 세가족은 중화라는 지역에 다다랐다.

 "강을 건너면 자갈이 발바닥에 붙었다 떨어지면서 발에서 피가 나요. 그렇게 걷기만 해서 중화에 도착했는데 아내가 '죽으면 죽었지 더는 못 걷겠다'는 거예요. 아내가 못 간다니까 그때 여덟 살이었던 아들도 엄마한테 가겠다는 거야."

 할아버지가 기억하는 아들의 마지막 말은 '엄마 따라가겠다'였다. 아내와 아들은 친척들과 함께 북에 남았다.

 빈집에서 칼잠을 자며 할아버지는 남쪽으로 향했다. 기차 지붕위에 올라타기도 했던 그는 화재로 기차 안 피난민이 수도없이 죽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수원에 도착했다.

【서울=뉴시스】임재희 기자 = 이해식 강동구청장(오른쪽)이 지난 20일 오후 서울 시립고덕양로원에서 열린 '온세상 생신축하연'에서 지난달 100번째 생신을 맞은 이의재 할아버지에게 장수지팡이 '청려장'을 선물하고 있다. 2017.02.21.  (사진 = 강동구 제공)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임재희 기자 = 이해식 강동구청장(오른쪽)이 지난 20일 오후 서울 시립고덕양로원에서 열린 '온세상 생신축하연'에서 지난달 100번째 생신을 맞은 이의재 할아버지에게 장수지팡이 '청려장'을 선물하고 있다. 2017.02.21.  (사진 = 강동구 제공)  [email protected]

 남에서 구한 첫 일자리는 미군부대 목수였다. 목수 일은 해본 적이 없지만 일당이 많아 택했다. 옷장이나 빨래 건조대 등을 만들며 생활비를 벌었다.

 새로운 가족들을 만나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언제든 고향에 갈 수 있을 거란 희망 때문이었다. 헤어졌다가 만난 누나의 권유로 장가를 들게 됐다. 지금의 딸은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구데타로 정권을 잡은 1961년께 태어났다.

 "나는 나대로 짐을 짊어지고서 장사를 했고 마누라는 마누라대로 돈을 벌었죠. 그런데 딸이 국민학교에 들어간 해에 아내가 세상을 떠났어요. 누님에게 딸을 보내 그곳에서 학교에 다니게 했고 나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생활비를 마련했어요."

 딸에 대한 얘기를 늘어놓는 할아버지 얼굴에선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취직한 일부터 돈을 벌어 대학원에 들어간 일, 사위와 만나 결혼한 일까지 쉬지 않고 기억을 되짚었다. 요즘 말로 하면 '딸바보'가 따로 없었다.

 그가 시립고덕양로원에 들어온 건 30년전인 1987년이다.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이곳 양로원에 입소하게 됐다. 양로원 생활을 시작하면서 건강한 생활습관을 들였다고 한다.

 "우선 소식하고 싱겁게 먹어야 돼요. 고향에 있을 적에는 맛도 안 보고 무조건 간장을 한 숟가락 뿌려 짜게 먹었는데 지금은 아주 싱겁게 먹어요. 또 가볍게 운동을 하고 욕심을 다 버린 채 즐거운 마음으로 사니까 건강한 것 같아요."

 할아버지는 이처럼 건강한 삶을 포기할 수 없다. 이루고 싶은 소원이 남아서다. 북에 있는 가족들과 만나는 일이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산가족상봉 신청을 하고 있지만 번번이 기회를 잡지 못했다.

 이날 축하연에 참석한 이해식 강동구청장은 "어르신과 만나게 된 지 수년이 흘렀는데 아직 북에 있는 가족들과 만나지 못하신 점이 안타깝다"며 "오늘 축하연에 참석한 모든 분이 함께 응원해주시면 좋겠다"고 축하 인사를 건넸다.

 한편 이날 축하연에는 이 구청장과 양로원 노인 40여명, 후원 단체 회원 등 60여명이 참석했다. 생신 축하 노래는 주부음악봉사단 '쁘띠꼬숑'과 아동들이 연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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