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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책] 세계의 책갈피 속 한국의 근현대 풍경

등록 2019.09.25 15:29:53수정 2019.10.28 17:5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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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겔리 '한국을 사랑한 세계작가들'

[오늘의 책] 세계의 책갈피 속 한국의 근현대 풍경



【서울=뉴시스】정철훈 기자 =
서울대 법대에서 33년간 '법사상사'를 가르치다 2013년 정년퇴임한 최종고(72) 교수. 평생을 법학자로 살았지만 그는 "문학은 인생의 대도(大道)"라는 생각으로 문학을 애호하여 정년 후에도 틈만 나면 도서관에서 서적을 뒤적였다. 그러다 이런 의구심이 들었다. "세계의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에 한국문화를 얼마나 녹여냈을까."

도서관에 틀어박혀 자료를 찾기 시작한 그는 깜짝 놀란다. 이럴 수가! 펄 벅(1892~1973)이 한국을 무대로 쓴 대하소설 '살아있는 갈대(The Living Reed·1963)' 외에도 두 편의  장편소설을 더 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사에 착수한 그는 한 번 더 놀란다. 무려 70명의 세계작가들이 한국문화를 자신의 명저들 속에 담아냈던 것이다.

70인 가운데 52인은 남성, 18인은 여성이었다. 국적별로 보면 미국인 23인, 영국인 13인, 독일인 8인, 프랑스인 7인, 일본인 5인, 캐나다인 3인, 이탈리아인 2인, 인도인 2인, 러시아인 1인, 오스트리아인 1인, 헝가리인 1인, 중국인 1인이다. 

최 교수의 말이다.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작가'의 개념은 소설가나 시인 같은 창작자로만 한정되어 있다. 독일의 경우 작가란  뭐든지 글로 쓰는 사람을 통칭한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독일작가 중에는 우리가 '역사가' 또는 '철학자'로 부르는 사람도 포함되어 있다. 결국 문학이든 비문학이든 글을 쓰는 사람들은 모두 작가다."
그는 이런 범주로 접근해 소설가, 전기작가는 물론 화가, 여행가, 법률가 등 한국에 대해 글을 쓴 외국인을 망라했다.

우리가 '세계 속의 한국'과 '한류'를 외치는 동안 이미 세계 작가들은 자신이 만난 한국인과 한국문화를 자신들의 저서에 써넣었다는 사실은 까마득히 몰랐던 것이다. 이제 책갈피로 들어가면 영국의 여행작가 이사벨라 비숍은 명저 '조선과 그 이웃나라'(1898)에서 자신이 왕궁에서 만난 고종과 명성황후의 인상을 이렇게 진술했다.

"왕비가 정중하고도 풍부한 재치를 보이며 나에게 여러가지 사사로운 이야기를 한 후 왕에게 무엇인가를 말했다. 왕은 즉각 왕비의 충고를 받아들여 약 30분가량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했다. 왕은 43세였으며 왕비는 그보다 약간 많았다."

명성황후(민비)는 아직까지도 초상화나 사진이 발견되지 않아 실제 생김새를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렇기에 미술계에서는 명성황후의 사진만 발견되면 대특종이 될 거라고 회자될 정도다. 다만 이사벨라가 쓴 인상기에 의해 그 이미지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사벨라는 겨우 시작일 뿐이다.

미국의 법률가요, 고종의 법률고문인 오웬 니커슨 데니(1838~1900)의 한국 이름은 덕니(德尼)이다. 1888년 한러수호통상조약을 주선해 한국 대표의 한 사람으로 조약문서에 서명한 그는 그해 2월 탈고한 '청한론(China and Korea)'에 이렇게 썼다.

"조선국왕은 성격상 나약하고 우유부단하다는 진부한 비난이 있는데 이에 대해 몇 마디 변명해볼까 한다. 고종은 청나라의 항의와 반대를 무릅쓰고 구미 각국으로 사절단을 파견하였는데 이로부터 조선 국왕의 행동거지에는 두려움이 있다거나 성격상 확고한 결의가 부족하다는 비난을 받지 아니하였다."

영국의 화가이자 작가인 아놀드 헨리 새비지 랜도어(1865~1924)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1895)에서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환의 초상을 그리던 과정을 이렇게 썼다.

"내가 자세를 취하자 그는 말을 단 한마디로 하지 않았으며 눈조차 깜박이지 않았다. 거의 세 시간이나 되는 동안 그는 조각과도 같이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내가 '끝났습니다'라고 말하자 그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으로 일어나 작품을 보기 위해 내 쪽으로 다가왔다. (...) 그는 당황한 것 같았다. '무슨 일이십니까?'라고 내가 묻자 그는 낙담한 표정으로 "당신은 비취 장신구를 빼먹었소?"라고 대답했다."

이밖에도 헝가리 민속학자 버라토시 벌로그 베네데크, 조선황실에서 살았던 독일여성 엠마 크뢰벨, 한국작가들에게 작품소재를 제공한 프랑스 외교관 이폴리트 프랑뎅, 조선으로 신혼여행을 온 독일인 칼 후고 루돌프 차벨 부부, 오스트리아의 여행가 에른스트 폰 헤세-바르텍 등 35명의 한국 인상기가 1권에 수록됐다. 2권(근간)엔 김산 일대기 '송 오브 아리랑'의 작가 님 웨일즈 등 또 다른 35명이 수록될 예정이다. 풍부한 도판이 시선을 '100년 전 한국'으로 잡아끈다. 최종고, 326쪽, 1만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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