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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언의 책과 사람들] 암흑의 시대에 핀 동백꽃 여인, ‘춘희’

등록 2022.03.12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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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춘희 (사진= 한상언 영화연구소대표 제공) 2022.03.07.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춘희 (사진= 한상언 영화연구소대표 제공) 2022.03.07.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영화 ‘봉황의 면류관’의 연출을 끝낸 이경손은 1927년 초부터 조선일보에 영화소설 ‘백의인’을 연재했다. 연재가 끝날 무렵 이경손이 묵고 있던 영성여관으로 반가운 얼굴이 찾아왔다. ‘봉황의 면류관’을 직접 제작하고 주인공 역할까지 맡았던 영화배우 정기탁이었다.

그는 배우 김정숙과 연애를 하다 헤어지고 실연의 상처를 또 다른 여인으로 메우고 있다고 했다. 기생 김일송이 바로 그의 새로운 인연이었다. 이경손은 정기탁의 새로운 연애 이야기를 듣고 기생과 부잣집 청년의 사랑 이야기가 꼭 알렉산더 뒤마 피스의 그 유명한 ‘춘희’와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동백꽃이 활짝 피기 시작했다.

정기탁과 김일송을 주인공으로 ‘춘희’를 영화로 만들면 좋겠다는 이경손의 이야기에 정기탁은 귀가 솔깃해졌다. 이미 ‘봉황의 면류관’을 제작한 후라 자금이 부족했던 그는 김일송과 결혼을 하겠다며 어머니에게 결혼자금을 지원해 달라 부탁했다. 그 돈으로 영화를 만들 셈이었다. 밖으로 돌던 아들이 결혼을 하겠다고 하니 천만 다행이라는 마음에 어머니는 목돈을 마련해 주었다. 하지만 그 돈으로도 영화를 제작하기에는 부족했다. 정기탁은 평양의 부호 김동평에게 동업을 제안했다. 그는 소설가 김동인의 동생이었다. 그렇게 정기탁과 김동평의 영화회사인 평양키네마가 설립되어 영화 ‘춘희’가 만들어지게 된다.

연출을 맡은 이경손은 프랑스 배경의 원작을 각색해 조선 배경으로 바꿨다.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이루어진 로케이션 촬영은 여러 계절의 풍경을 담기 위해 해를 넘겨서까지 이어졌다. 그 사이 평양에서는 이경손이 주재하는 ‘문예영화’라는 잡지가 창간되었다. 평양의 유지들과 이경손의 친우들이 합심해서 만든 잡지였다.

이 시기는 나운규의 전성기였다. 영화제작 자금을 지원하던 단성사에서는 몸값이 뛴 나운규를 대신하여 이경손이 나운규가 이뤄낸 성과를 이어가길 바랐다. 특히 대중들이 좋아하는 고소설을 영화화하길 원했다. ‘춘희’를 연출하고 있던 이경손은 자신의 이름을 딴 이경손프로덕션을 세웠고 단성사의 자금을 받아 ‘숙영낭자전’을 영화로 만들기로 한다.

이경손이 연출한 ‘춘희’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숙영낭자전’ 역시 나운규의 작품들만큼의 성과를 얻을 수 없었다. 이 시기 이경손은 영화 연출 보다는 다른 쪽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하와이에서 온 또래의 조카 현앨리스와 함께 카카듀라는 카페를 내고 카페 운영에 몰두했던 것이다. 카카듀는 프랑스혁명 당시를 배경으로 한 오스트리아의 극작가 아르투어 슈니츨러(Arthur Schnitzler)의 희곡 ‘푸른 앵무새’(Der grüne Kakadu)에서 혁명가들이 경찰의 눈을 피해 몰래 만나던 장소였다.

미국과 상해, 조선을 오가며 임시정부의 전령 역할을 하던 미국 국적의 현앨리스는 서울에 근거지가 필요했다. 그 장소로 카페를 선택했고 이경손에게 카페 운영을 부탁했다. 독립운동에 큰 뜻을 품은 이경손은 영화 연출보다는 현앨리스와 함께 카페를 세워 독립 운동가들의 아지트를 제공하는데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급기야 일제의 감시로 활동이 여의치 않자 이경손과 현앨리스는 상해로의 탈출을 계획했다.

미국 국적의 현앨리스는 쉽게 상해로 떠날 수 있었지만 조선인 이경손은 그러지 못했다. 이때 상해로부터 뜻밖의 초청장이 왔다. ‘춘희’를 제작했던 정기탁이 어느 틈에 상해로 건너가 있었는데 그가 이경손에게 이곳 영화회사에서 함께 영화를 하자는 제안을 해온 것이다. 정기탁의 초청장을 받은 이경손은 곧 서울 생활을 접고 상해로 떠났다.

이경손이 서울을 떠난 직후 영화소설 ‘춘희’가 발행됐다. 영창서관에서 박루월의 이름으로 발행된 이 책은 이경손이 번안한 그 작품은 아니었다. 하지만 표지 사진은 이경손이 연출한 영화 ‘춘희’의 스틸 사진이 그대로 사용됐다.

상해 영화계에서 활동하던 이경손은 1932년 1차 상해사변이 발발한 직후 태국으로 이주해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정기탁은 중국의 영화계에서 계속 활동했으며 현앨리스는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와 우여곡절 끝에 평양에 정착했지만 미국이 심어 놓은 간첩이라는 이유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어김없이 동백꽃 필 계절이 찾아 왔다. 동백꽃 여인이라는 이름의 ‘춘희’와 더불어 역사의 기로에 서 있던 여러 사람들을 생각하게 되는 요즘이다.

▲한상언영화연구소대표·영화학 박사·영화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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