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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칼럼]'위대한 영도자'라고 쓴 기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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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7-06-09 15:51:33  |  수정 2017-08-15 15:3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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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경 사회부장
【서울=뉴시스】김호경 사회부장 = 이낙연 국무총리가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곤욕을 치른 끝에 문재인 정부 초대 총리로 임명됐다. 야권에서 백화점식 의혹을 제기하며 집중포화를 날린 여러 사안들 가운데 특히 필자의 눈길은 끈 것은 이 총리가 현역 기자 시절 전두환 당시 대통령에 대해 '위대한 영도자'라고 표현하는 등 찬양 기사를 썼다며 "개혁성과는 대단히 거리가 먼 인물"이라고 했던 지적이었다. 본인과 가족을 둘러싼 다른 여러 의혹들이 비리 여부에 초점을 맞춘 것인데 비해 '위대한 영도자' 대목은 총리 후보자의 근본적인 정체성을 캐묻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이후 밝혀진 바에 따르면 문제의 표현은 이 총리 자신의 논평이 아닌, 1983년 1월 민정당의 한 행사에서 권익현 민정당 사무총장이 "이 나라의 위대한 영도자이신 우리당 총재" 운운한 부분을 기사에 옮긴 것이었다. 물론 아무리 기자의 주관을 담은 논평이 아니라 하더라도 저런 낯 뜨거운 언사를 거르지 않고 곧이곧대로 옮기는 건 문제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실제 <노동자연대>라는 단체는 '학살자 전두환 찬양한 어용기자-문재인은 이낙연 총리 지명 철회하라'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위대한 영도자' 시비가 이 총리의 이력이나 향후 행보에 어떤 오점으로 작용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문재인 정부 지지자들 중에는 이 총리의 정체성에 의구심을 품거나 꺼림칙한 느낌을 갖게 된 이들도 상당수 있을 수 있다. SNS 상에서도 이 문제가 꽤나 확산됐다. 그런데 과연 그 시절, 그러니까 이 총리가 기자 생활을 시작한 1979년이나 해당 기사를 썼다는 1983년을 전후해 주류 언론들은 당대의 대통령에 대해 어떤 식으로 보도를 했을까. 그 전반적인 흐름들 속에서 이 총리가 썼던 기사를 어떻게 봐야 할지 검토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래서 케케묵은 자료들을 찾아 들춰봤다.

결론적으로 '위대한 영도자'를 남발한 진짜 '어용기자'들은 따로 있었다. 이 총리가 썼다는 기사 정도는 그 무수하고도 심각한 곡필들 틈에 낄 여지도 별로 없다. 이 칼럼은 이 총리 개인에 대한 옹호나 비판이 목적이 아니다. 새 정부 초대 총리 인선 과정에서 불거진 '전두환 찬양 기사' 논란을 계기 삼아 '그때 그 시절' 이 나라 주류 언론들이 과연 어떤 보도 양태를 보였는지 반추해보고, 언론과 언론인의 정도(正道)를 함께 되새겨보자는 차원이다. 6월 항쟁이 들불처럼 일어날 때까지 주요 신문들이 '전두환 각하'를 어떤 식으로 서술했는지 환기해보자.

먼저 경향신문이 1980년 8월19일부터 3회에 걸쳐 <새 역사 창조의 선도자 전두환 장군>이라는 제목으로 내보낸 기획 기사를 소개한다. 최상의 미사여구가 그야말로 난무하는 제1회의 부제는 '서릿발같은 결단력 뒤에 훈훈한 인정 느낄 서민풍이…' '사생관(死生觀)선 의리와 정직의 성품' '나라 구하는데 가시밭길 못갈소냐' '구멍가게 즐겨찾아 애들 과자 선물' 등이다.

"(제11대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고 있는)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은 어려운 일에 앞장서지 않은 예가 없으며 만난(萬難) 극복의 의지가 넘쳐있고 위기에 강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숱한 위기에 대처하고 극복하는 탁월한 솜씨가 오늘의 전 위원장을 창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0·26 사태, 12·12 사건, 대규모 학생 시위, 사북 광부 난동 사건,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 김대중 연행조사, 광주 소요사태, 사회정화작업, 공무원과 공직자 대규모 숙정 등을 처리해나가는 과정에서 오랜 군인생활에서 신조로 삼아온 결연한 사생관의 일단이 엿보인다.

'나라를 구하는데 어찌 가시밭길과 불을 피해 갈 수 있느냐. 내가 주저하지 않고 이 길을 뚫을 수만 있다면 백번 죽어도 한이 없다. 책임을 나눠갖지 말고 최선을 다하다 죽으면 할 수 없다'

항상 명쾌하고 확고하며 눈치를 보지 않는 성격을 지닌 전 위원장은 국가 운영의 새로운 스타일을 창출할 새 시대의 지도자 자질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적재적소에 인물을 기용하는 판단력이 투철하다. 인맥과 지연, 학벌과 혈연을 중요시하지 않고…(중략).

영관급 지휘관 시절, 어느 부하와 탁구를 쳤으나 실력이 모자라 진 적이 있었다. 그 부하가 얼마동안 교육을 받고 돌아와보니 전 위원장은 왼손에 라켓을 들고도 자신을 굴복시키더라는 것이다. 단점의 보완에 전력투구하는 전 위원장의 성품을 읽을 수 있는 일화다.

전 위원장은 부정부패를 멀리하고 청렴결백을 몸소 솔선수범해온 표본이다. 좋은 음식과 좋은 물건을 즐기지 않는 생활 습성, 치즈와 오린지주스를 싫어하고 콩나물, 된장찌개 등을 즐겨먹는 식성 등을 지켜본 부하들은 항상 자기들과 고락을 같이하는 동지의식과 전 위원장이 명령하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하는 복종 의식에 젖어있다고 털어놓는다.

제1사단장 재직시 자녀들과 함께 있던 전방에서 부관에게 전화를 걸어 서울 집에 애들을 줄 과자를 사두었으니 보내달라는 연락을 받고 가보니 사과 몇 개와 흔한 상표의 빵을 구멍가게에서나 볼 수 있는 봉투에 넣어둔 것을 발견하고 전 위원장의 꾸밈없는 서민적인 생활태도에 다시 놀랐다는 에피소드도 화제에 자주 올려진다."

신문 한 면을 거의 다 장식한 장문의 기사 내용 중 몇몇 부분을 발췌했는데, 특별히 과도한 대목이 있는 게 아니라 시종 이런 식이다. '용비어천가'도 미치지 못할 경악스러운 찬양과 존숭으로 일관한다. 내친김에 2회 '출생과 가정환경' 편도 일부 소개하면 이렇다. 부제는 '어릴 때부터 비범…우애도 지극' '편견없는 성품은 항상 약자편' '하루 일과는 새벽 4시부터 독서로 시작' 등이다.

"이 마을 지강초등학교 진석렬 교감은 '예부터 상봉(上峰)에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천지(天地) 연못이 있는 용덕산 아래에서 큰 사람이 태어날 것이라고 전해왔는데 이 구전(口傳)은 전 장군을 두고 한 말이 아니었겠느냐'고 말한다.

천지 연못엔 순채라는 이상한 식물이 자라고 있다. 연꽃의 일종으로 줄기에 물때가 묻은 이 순채는 나라에 변이 생기면 없어지고 나라가 안정되면 다시 돋아난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동네 사람들은 '우리 마을 출신인 전 위원장이 드디어 우리나라의 대들보 같은 인물이 되어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게 해주었기 때문에 순채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고들 설명하고 있다.

김 여사는 전 위원장을 잉태했을 때 이상한 태몽을 꾸었다. 첩첩산중의 험한 산길을 가다가 큰 웅덩이가 보였다.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고 안을 들여다보니 크고 밝은 달이 있어 치마폭에 쌌다. 계속 달이 떠올라 정신없이 담다 보니 치마에서 흘러내려 온 세상을 환하게 비추었다는 얘기를 생전의 김 여사가 전 위원장에게 들려주었다고 한다."

이 시기 주요 일간지의 '전두환 찬가'는 대동소이하다. 같은 해 조선일보 8월23일자 <인간 전두환-육사의 혼이 키워낸 신념과 의지의 행동>은 그중에서도 가히 압권이어서 한국언론사를 다룬 책들에서 흔히 거론된다. "수도승에게서나 엿볼 수 있는 청렴과 극기의 자세"를 지녔다고 전두환 장군을 칭송한 이 기사에는 '사(私)에 앞서 공(公)…나보다 국가 앞세워', '자신에게 엄격하고 책임 회피 안해' '이해관계 얽매이지 않고 남에게 주기 좋아하는 성격'이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동기생일지라도 어쩌다 그를 대할 때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거대한 암벽을 대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으며,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천성적인 결단은 그를 군의 지도자가 아니라 온 국민의 지도자 상으로 클로즈업 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12·12 사건만 해도 그렇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쪽에 서면 개인의 영달은 물론 위험부담이 전혀 없다는 걸 그도 알았으리라. 그의 판단은 육사 선후배라는 사사로운 정리를 떠나 국가 장래를 내다보는 대승적 윤리관에서 내려진 결론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가 보여준 일련의 행위는 육사에서 익히고 오랜 군대생활에서 다져진 애국심을 바탕으로 한 도덕적 행위라는 게 주위의 얘기다.

전 장군에게 이 쓰라린 역경들은 오히려 견인불발의 인내심, 물욕에 대한 초탈, 체질화된 서민의식, 도덕적 겸허주의, 남의 고통에 대한 연민 등의 덕성을 길러 낼 수 있는 토양이 되었을 것. 양담배 한 갑 정도의 부조리도 참아 넘기지 못하고 바로잡았던 원칙장교로서 용명을 날렸다고 한다. 청년장교의 우국의 울분 속에 이미 개혁과 숙정의 의지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영관장교 시절 매일 새벽처럼 집을 나갔다가 밤늦게 돌아오는 그를 붙잡고 칭얼대는 어린 자식들에겐 군인이란 나라를 위해 죽는 거고 나랏일에 밤낮이 어디 있느냐고 달랜 적도 있다.

그의 투철한 국가관과 불굴의 의지, 비리를 보고선 잠시도 참지를 못하는 불같은 성품과 책임감, 그러면서도 아랫사람에겐 한없이 자상한 오늘의 '지도자적 자질'은 수도생활보다도 엄격하고 규칙적인 육군사관학교 4년 생활에서 갈고닦아 더욱 살찌운 것인 듯하다. 그의 밑을 거쳐간 부하장교는 그의 통솔 방법을 3분의 1만 흉내 내면 모범적 지휘관이란 평을 얻을 수 있다는 게 군내의 통설로 되어 있다."

동아일보가 8월29일 실은 <새 시대의 기수 전두환 대통령 우국충정 30년…군생활 통해 본 그의 인간상>은 위 기사들보다는 좀 약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전반적인 기조는 오십보 백보다. 훗날에 드러날 '5공 비리'를 미처 예견할 순 없었다 하더라도 전두환 대통령에 대해 '물욕을 초월했다'는 인물평을 과감히 개진한다.

"청렴결백의 성품은 전 대통령의 또 다른 특성이다. 그것은 사치를 모르는 물욕을 초월한 그의 성격 때문이다. 사치스러운 외국제 물건을 전혀 모를 정도로 청렴결백한 생활로 일관했다."

서울신문이 1980년 8월19일부터 무려 7회에 걸쳐 연재한 <새 시대를 여는 새 지도자 전두환 장군> 시리즈도 빼놓을 수 없다. 1회 '장군은 누구인가'를 음미해 보자.

"그렇다. 장군은 숨은 별이었다. 비록 그의 가슴에 그의 머리에 이 민족, 이 국가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무엇이 이 겨레를 살리는 길인가를 위해 위대한 경륜과 포부를 쌓고 있었더라도 그가 바로 우리의 지도자요 목자임을 우리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나대니얼 호돈'의 '큰바위 얼굴'은 장군 - 바로 그 자신이었다."

4회 '황강의 새벽' 편에서는 "장군의 고향인 내천 뒷산 용덕산과 이어져 하나의 지맥을 이룬다. 이 가운데 영봉 황매산의 정기를 타고날 인물이 세 사람 있다. 그중 두 사람은 이미 태어났고 한 사람은 뒤에 태어날 것이다. 이미 태어난 두 사람은 조식 선생과 무학대사이다"라고 기사가 아니라 위인전을 전개하는데, 특히 마지막 대목에 이르러서는 읽는 이의 모골을 송연케한다.

"서울신문 특별 취재반은 밤하늘 별빛을 받아 번쩍이는 황강의 물줄기를 끼고 참으로 험하고 먼 길을 돌아 나오며 이렇게 기원했다. 조국이여, 이 겨레여, 장군과 함께 광영 있으라…."

북한의 김일성 일가 우상화 뺨을 치는 이런 종류의 기사와 사설을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한국일보가 같은 해 8월23일부터 상·중·하로 실은 <전두환 장군 의지의 30년-육사 입교에서 대장 전역까지>, 중앙일보가 8월27일 전두환 대통령의 당선 다음 날인 8월28일부터 4차례나 연재한 <합천에서 청와대까지-전두환 대통령 어제와 오늘> 역시 제목만으로도 기사 내용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언론이기를 포기하지 않고서야 명색이 중앙일간지에 이처럼 기사를 가장한 '충성 구애'를 게재할 수 있는 것일까. 경향신문 출신 윤덕한은 심지어 다음과 같은 증언을 한다.

"광주에서 유혈극이 절정에 달하고 있던 1980년 5월22일 전두환은 각 언론사 발행인을 불러 계엄 확대 조치의 배경과 불가피성을 설명하고 언론계의 협조를 요청했다. 이어 사태 보도의 실질적인 책임자인 사회부장들을 요정으로 불러내 똑같은 당부를 하고 1인당 1백만 원씩 촌지를 돌렸다. 당시 중앙 일간지의 부장급 월급이 45만원 내외였으므로 1백만원은 큰돈이었다. 그래도 최소한의 양심이 있는 일부 사회부장들은 전두환으로부터 촌지를 받은 것이 부끄럽고 괴로워 부원들과 술자리를 가져 그 돈을 다 써버렸다. 하지만 상당수는 입을 씻고 너스레를 떨어 기자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다."

물론 언론이 전두환 대통령을 향해서만 유독 맹목적인 찬양가를 불렀던 것은 아니다. 직전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박정희 군사정권 때 수립된 언론의 용비어천가 기조가 전두환 군사정권이 들어서자 대상만 바꾼 채 그대로 재연된 것이다. 흔히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하지만 적어도 한국언론사에서는 일반화하기 어려운 당위론적 아포리즘이거나 결과론일 뿐이다. 단계 별로 들여다보면 아주 오랜 시기 펜은 칼 앞에서 한없이 초라하고 비굴한 모습을 보였다. 권력의 칼이 얼마나 광포했길래 펜이 저토록 심하게 구부러져 곡필이 양산됐던 걸까.

이낙연 총리가 기자 생활을 시작한 때는 박정희 대통령 집권 말기였는데, 그가 아직 입사하기 전 편집국 풍경을 들여다보자. 1970년 한여름 찌는 듯한 더위 때문에 숨이 막히던 어느 날 동아일보사 3층 편집국. 당시 석간이던 동아일보의 기사 마감시간은 오전 11시였다. 동아일보 해직 기자 김종철의 회고다.

"오전 11시쯤 교열부에서 가까운 편집부 쪽에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뭐요, 당신이 편집국장이요?' 나는 얼른 그쪽으로 달려가보았다. 나보다는 5~6년쯤 선배인 1면 담당 편집기자가 얼굴이 시뻘게진 채 어떤 중년 사내를 마주보며 고함을 치고 있었다. 편집부 맞은편에 앉은 편집국장은 놀란 듯이 그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문제의 중년 사내는 중앙정보부에서 '파견'되어 동아일보사에 '상주'하는 기관원으로, 기사 내용 가운데 박정희 정권에 불리한 것이 있으면 아예 빼거나 크기를 줄여달라고 주문하는 것이 일상적 업무였다. 대부분의 기사는 데스크의 손을 거칠 때 '자율적'으로 조정이 되지만, 아주 중요한 것은 기관원이 편집부에까지 따라가서 '점검'을 한다는 것이었다.

바로 그날 기관원은 1면 편집장에게 그런 주문을 하다가 호되게 망신을 당한 것이다. 편집부는 물론이고 모든 부서에서 일하는 내·외근 기자들이 그 사람 앞에서는 기를 못 펴는데, 결기가 대단하던 그 선배 기자는 오랫동안 쌓여온 분노를 터뜨린 것이었다. 기관원은 으레 통할 줄 알았던 자기 주문이 거절을 당하자 얼굴이 상기되었지만 애써 참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김종철의 증언대로 이 시절 전국의 모든 언론사에서는 기관원의 언론 통제가 일상화되어 있었다. 그런 압력에 저항하는 언론인은 알게 모르게 정보기관의 보복을 받기 마련이었다. 그런 외압과 순응 속에서 언론이 얼마나 상식 밖의 곡필을 휘둘렀는지, 지금으로서는 차마 옮기기에도 민망한 사례가 부지기수이지만 일례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1970년 <사상계>에 실렸던 김지하의 그 유명한 시 <오적>에 대해 한국일보는 같은 해 6월6일 사설 <우리도 할 말이 있다>에서 '광가(狂歌)의 광시(狂詩)'라고 규정한다. 우리 문학사에서 대표적 참여시로 꼽히는 <5적>을 당시 신문은 사설까지 동원해 어떤 식으로 매도했을까.

"문제의 담시는 일종의 광가(狂歌) 광언(狂言)에 속하는 것이라 생각되며 인인현자(仁人賢者)로서는 정면으로 상대할 것이 못된다고 여겨진다. 우리의 견해로는 이 맹랑한 헛소리는…(중략) 그 담시가 우리 국가와 국민체제를 도매금으로 전면 부정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폭력혁명'을 선동하는 북괴도당에 부종하려는 결과로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전문되는 바에 의하면 담시 작자는 북괴도당의 대남정책인 '전면부정'의 결의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함부로 붓재주를 놀리는 피해의식과 과대망상에 젖은 노이로제환자였다 한다. 만일 그렇다면 그 작자는 무당의 물이 내렸거나 귀신잡기에 홀린 정신의 소유자가 아니면 그 작품은 소위 무당들의 '대감놀이' 넋두리나 미숙한 판소리 흉내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언론이 권력에 예속된 지리멸렬한 행태를 반복하며 제 역할을 못하자 대학생들이 들고일어났다. 각 대학 교내에서 '언론 화형식'을 여는 등 언론의 타락과 무기력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급기야 1971년 3월26일 서울대 학생 50여 명이 광화문 동아일보사 앞에서 '민주의 소리 외면한 죄 무엇으로 갚을 텐가'라는 플래카드를 펼쳐 들고 '언론인에게 보내는 경고장'과 '언론 화형 선언문'을 낭독했다. '5적'을 넘어 '6적'과 '7적'을 지목하는 피 끓는 대학생들의 경고장 내용은 자못 엄중했다.

"우리는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어 이 쓰러져 가는 민주의 파수대 앞에 모였다. 나오라, 사이비 언론들이여, 나오라. 이 민주의 광장으로 나와 국민·선배에게 속죄하라. 선배 투사의 한 서린 해골 뒤에 눌러 앉아 대중을 우민화하고 오도하여 얻은 그 허울 좋은 대가로 안일과 축재를 일삼는 자들이여! 나오라, 사이비 언론 뒤에 도사린 너 정보원이라는 이름의 제6적 나오라. 민주 정신의 혈맥을 빨아먹는 흡혈귀여!

안타깝다, 그 자리 그 건물이건만 민주 투사는 간 곳 없고 잡귀만 들끓는가. 사자의 위용은 어디 가고 도적 앞에 꼬리 흔드는 강아지 꼴이 되었는가. 이것이 일컬어 제7적이런가. 정치 문제는 폭력이 무서워 못 쓰고, 사회 문제는 돈 먹었으니 눈감아 주고, 문화 기사는 판매 부수 때문에 저질로 치닫는다면 더 이상 무엇을 쓰겠다는 것인가.

듣건대 일선 기자의 고생스런 취재는 겁먹고 배부른 부차장 선에서 잘리기 일쑤고, 힘들게 부차장 손을 벗어나면 편집국장 옆에서 중앙정보부원이 지면을 난도질하고 있다니 이것이 무슨 해괴한 굿거리인가.

동아야, 너도 보는가.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올라만 가는 조선의 저 추잡한 껍데기를. 너마저 저처럼 전락하려는가. 동아야, 너도 알맹이는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았는가. 우리는 신문 경영자가 이미 정상배로 전락했음을 단정하고 또한 신문을 출세의 발판으로 이용하려는 가짜들이 적지 않음을 알고 있다."

학생들은 경고장 마지막 부분 '결의'에서 "언론은 권력으로부터 독립하라. 특히 자주적인 편집을 방해하는 중앙정보부원을 신문사에서 축출하라"고 촉구했다. 학생들은 유인물을 낭독하면서 이를 행인들에게 나누어주다가 경찰에 의해 해산되고 연행됐다. 이 광경을 편집국에서 내려다보던 동아일보 기자들은 큰 충격과 자극을 받았다. 독재권력 앞에서 침묵과 굴종을 거듭하던 젊은 언론인들의 양심을 쇠망치로 두들기는 듯했다.

이후에도 학생들의 언론 비판이 대학별로 지속적으로 제기되자 얼마 뒤인 1971년 4월15일, 동아일보의 젊은 기자들은 김상만 사장과 간부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언론자유수호선언'을 발표했다. 선언대회에는 기자들과 문제의식을 공유한 당시 송건호 논설위원, 김중배 사회부장 등도 합류했다. 편집국장 박권상은 중앙정보부에 전화를 걸어 중정요원의 철수를 요구했는데, 그는 이날 일을 다음과 같이 상기했다.

"15일 아침 일찍 중앙정보부 보안담당 차장보에게서 기자들의 선언 경과를 묻는 전화가 걸려왔다. 그때 동아일보를 출입하던 중정요원이 문화부 쪽에서 왔다갔다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나는 차장보에게 '젊은 기자들이 당신들의 출입금지를 결의했다. 나로서는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으니 당장 철수시켜달라'고 말했다. '지금 철수시키지 않으면 우리가 쫓아내겠다'고 경고했다. 그는 '15분만 기다려달라. 부장(이후락)의 허락을 받아 철수시키겠다'고 말했고 곧 그 요원은 사라졌다. 이날부터 8개월 후인 12월의 국가비상사태 선포까지 기관원의 출입은 중단됐다."

이 같은 움직임은 서울 소재 신문·방송사들은 물론 각 지역 언론사들에까지 번져나갔다. 동아일보 기자들의 선언에 힘입어 한국일보 기자들도 4월16일 언론자유수호선언을 했으며 17일엔 조선일보, 대한일보, 중앙일보 기자들이 속속 대열에 합류했다. 그러나 이 시기 언론 독립 투쟁은 조직적이지 못하고 일회성으로 그쳐 그 의의에도 불구하고 한계가 분명해 실질적인 성과는 미약했다.

이에 따라 박정희 대통령이 이른바 유신헌법 개헌안을 공고한 1972년 10월27일부터 12월 말까지 모든 신문의 1면과 7면에는 '통일을 위한 구국영단 너도 나도 지지하자' '새 시대에 새 헌법, 새 역사를 창조하자' '뭉쳐서 헌정 유신, 힘 모아 평화통일' 등 문공부가 정한 표어들이 날마다 6단 크기로 실렸다. '언론자유수호선언'을 했지만 달라진 건 없었고 편집국에는 여전히 기관원들이 무시로 들락거리며 지면 구성을 좌지우지했다. 다시 김종철의 회상.

"종합면이자 신문의 얼굴인 1면 편집을 맡고 있던 기자가 갑자기 중앙정보부로 연행되었다.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유신헌법 개헌안에 대한 '찬반 토론을 금지한다'는 내용을 1면 머리기사 제목으로 뽑은 것이 여론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것이었다. '남산(중앙정보부의 통칭)'에서 고문과 매질을 당하고 나서 편집국으로 돌아온 그는 다리를 심하게 절었다. 그 기자는 결혼식을 며칠 앞두고 있었다. 수사관들은 "이런 악질은 평생 사내구실을 못하게 해야 한다"면서 발바닥을 몽둥이로 마구 때렸다고 한다."

"사회부 사건기자로 일하다 회사 내규에 따라 순환근무제가 실시되면서 나는 그 무렵 편집부에서 일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석간신문이 나오는 오후 1시까지 편집국 안에서 일하다 보니 중앙정보부에서 나온 기관원의 움직임을 낱낱이 볼 수 있었다. 방(方)이라는 성을 가진 그 40대 남자는 중앙정보부에서 상당히 힘을 쓰는 직위에 있다고 했다. 10월 유신이 발표된 날부터 그는 편집국장의 책상머리와 정치부를 비롯한 취재부서, 그리고 특히 편집부 데스크 앞에서 아예 살다시피 했다.

편집국장, 부국장, 편집부장과 함께 신문 대장을 보면서 이 기사는 줄이고 저 기사는 아예 빼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이 아닌 지시를 했다. 그것을 바라보는 젊은 기자들의 속은 부글부글 끓었지만 드러내놓고 항의를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편집부 기자들은 기관원이 그렇게 사전검열을 한 대장을 들고 서울 시청에 자리 잡은 계엄사 공보장교들에게 검열을 받으러 가야 했다. 군인들은 빨간 펜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기사를 난도질하곤 했다. 당국이 허용하지 않는 기사는 한 줄도 보도하지 못하는 반면에 계엄사령부의 발표문이나 정부당국이 배급하는 해설기사는 토씨 하나 고치지 못하고 그대로 대서특필해야 했다."

그러나 기자 개개인이 언론의 자유와 편집권 독립을 외치기에는 현실적 환경이 너무 엄혹했다. 권력의 요구를 거부하고 맞서 싸우려면 해직과 감옥살이는 물론이고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했다. 더욱이 고참 기자들이나 간부급 중에는 정권의 강압에 치열한 고뇌는커녕 이에 고분고분 순종하고 적극적 협력을 아끼지 않으며 보신과 영달에나 골몰하는 이들이 상당수였다. 이런 상황에서 지면이 어떻게 나올지는 명약관화한 일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초헌법적인 국가긴급권을 발동해 국회 해산, 정치활동 금지, 전국적 비상계엄령 선포 속에 밀어붙인 유신헌법이 통과되자 조선일보는 1972년 11월23일자 사설 <새 역사의 출범-유신헌법안 확정의 의의와 평가>에서 '새 역사의 아침'을 맞는 벅찬 심정과 '뛰어난 영도력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대담하게 기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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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80년 8월19일자 기사 '새 역사 창조의 선도자 전두환 장군'(출처=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

"우리가 안고 있던 비능률과 국력의 분산과 각종 낭비와 퇴폐 등 부조리는 10월유신을 계기로 제동이 걸렸고, 국민투표에 의한 유신헌법안의 확정으로써 그것들은 완전히 역사적 폐기물로 화하게 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새 역사의 아침을 맞았다. 역사적 문제의식과 사명감에 불타는 박 대통령의 영단에 의하여 태동된 10월유신은…(중략). '조국의 통일과 민족중흥의 제단 위에 모든 것을 바친' 그의 뜨거운 애국심과 뛰어난 영도력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성원의 발현이라고 풀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경향신문은 12월27일 <역사적 유신헌법 공포와 제8대 박정희 대통령 취임>이란 사설에서 "박 대통령의 유신질서 확립을 위한 신념이 덕과 능력과 비전을 겸비한 정치가로서의 지도력을 통해 이 나라 이 사회에 깊게 그리고 넓게 구현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마지 않는다"며 "우리는 이제 안정과 번영과 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역사적인 새 출발을 하게 되었다. 이 위대한 전진을 위해 우리는 범국민적인 총화대열을 구축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국민들에게 역설했다.

같은 날 서울신문은 <통일과 번영을 우리는 확신한다-제8대 대통령 취임식에 부쳐>란 사설에서 "여기에 무슨 왈가가 있고 왈부가 있으며 회의가 있고 주저가 있겠는가. 우리 모두가 유신의 주체로서 역사적 사명감과 확고한 신념과 행동철학을 신조로 하는 박 대통령을 구심으로 우리 세대의 역사적 과업에 뜻을 모으고 땀을 같이 흘려야 할 것이다"라며 "박 대통령의 신념과 멸사봉공의 모습을 보아왔기에 제8대 대통령으로 박 대통령이 취임함을 커다란 기쁨으로 반기는 것이다"라고 일말의 의심도 용납지 않는 뜨거운 환희를 아낌없이 표출했다.

10월 유신을 구국의 영단, 박정희 대통령을 구국의 영도자로 단언하는 언론의 이런 어용적 논법이 전두환 대통령 우상화에서도 그대로 이어진 것임을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보다 앞선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는 어땠을까. 우리 언론의 궤적을 비교·검토하는 차원에서 간단하게나마 훑어보고 싶지만 이 글에선 생략한다. 아무튼 실로 눈을 의심케 하는 기사와 사설들이 자유당 시절 신문에도 즐비하다.

독재 정권 시절 언론 굴종의 내력이 아무리 유구했다 하더라도 도저히 억누를 수 없는 양심과 양식으로 이에 저항하려는 기자들이 없었을 리는 만무하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74년 동아일보에서 나온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이었다. 유신 체제하에서 이미 1년 전부터 폭발한 각 사의 기자들은 잇따라 언론자유 연판장을 돌리고 사내에서 집회와 농성을 벌이곤 했는데, 가령 MBC 기자들이 1973년 11월28일 발표한 '언론자유선언'은 비장감이 남다르다.

"열 개의 손을 가진 괴물이 우리의 기사를 난도질하고 빼앗아 가도 우리는 목을 움츠리고 항거도 하지 못한다. 굴종과 타협 그리고 좌절과 무관심이 어느새 우리의 생리로 굳어져 가고 있다. 말할 수 있는 마지막 혀뿌리가 끊기기 전에, 글 쓸 수 있는 마지막 손가락이 잘리기 전에 우리는 모든 권력과 비리의 사슬을 끓고 감연히 일어서야 한다. 우리는 더 이상 침묵을 강요당할 수 없다."

이런 언론계의 일련의 흐름 속에서 나온 중심적 선언이 바로 74년 10월24일의 동아일보 '자유언론실천선언문'이다. 선언이 나오기 전날 중앙정보부는 동아일보에 보도된 서울대생들 시위 기사와 관련해 송건호 편집국장을 비롯해 간부 3명을 연행했고, 이에 항의하기 위해 기자들은 연행된 간부들이 돌아올 때까지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한국기자협회 동아일보분회는 24일 오전 9시15분 '자유언론실천선언대회' 개시를 선포했으며, 여기에는 동아일보 편집국·출판국·방송국 소속 기자 180여 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정보기관에 연행돼 모진 고문을 당할 것을 각오하면서도 언론 자유의 깃발을 높이 들고 '저승사자'나 다름없던 기관원의 출입을 단호히 거부하고 나섰다.

"우리는 교회와 대학 등 언론 밖에서 언론의 자유회복이 주장되고 언론인의 각성이 촉구되고 있는 현실에 대하여 뼈아픈 부끄러움을 느낀다. 본질적으로 자유언론은 바로 우리 언론 종사자들 자신의 실천과제일 뿐 당국에서 허용받거나 국민 대중이 찾아다 쥐어주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유언론에 역행하는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자유민주사회 존립의 기본요건인 자유언론 실천에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을 선언하며 우리의 뜨거운 심장을 모아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1. 신문 방송 잡지에 대한 어떠한 외부 간섭도 우리의 일치된 단결로 강력히 배제한다.
1. 기관원의 출입을 엄격히 거부한다.
1. 언론인의 불법연행을 일체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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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투위 자료사진
지금으로서는 지극히 당연하고 상식적인 내용이지만 그때는 절실하기 짝이 없던 그야말로 절규의 목소리였다. 편집국장이던 송건호는 저서에서 이 시절을 이렇게 기록한다.

"1974년 가을 이런 일이 있었다. 이것은 필자가 직접 경험한 사실이다. 특권층 여성들의 보석 밀수사건이 터졌다. 돈은 남아돌고 쓸 곳은 별로 없고 그래서 이런 특권층 여성들이 보석을 밀수했으며 이것이 적발되어 MBC 방송에 한번 나가 버렸다.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당국도 당황해 이를 보도관제하려고 했다. 그 논리는 이러했다. '만약 이같은 사실이 보도되어 세상에 알려지면 대한민국 고관들이 극도로 부패되어 있다고 판단, 북괴의 남침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 당시 언론은 법률 외적 통제를 받아 거의 제구실을 못하고 있었다. 기관원이 무상 출입하여 일상적으로 신문 제작에 압력을 가했으며 조금이라도 말을 안 듣거나 비위에 거슬리는 기사를 썼을 경우에는 '임의동행'이라는 형식으로 연행하여 조사·위협했으며, 걸핏하면 기자들에게 폭행을 가해 공포에 떨게 했다."

사회부 기자였던 박종만의 기억은 참담함으로 얼룩져있다.

"그렇게 힘들여 취재한 기사가 날이 갈수록 쪼그라들더니 마침내 71년 10월15일 서울 일원에 위수령이 선포된 이후엔 아예 한 줄도 반영되지 않는 현실을 보면서 끓어오르는 울분을 억제할 길이 없었다. 특히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이 고려대학교에 난입하던 현장에서, 군인들이 비슷한 또래의 학생들을 곤봉으로 사정없이 후려친 뒤 트럭에 가마니때기 싣듯이 쌓아올리는가 하면, 최루가스를 발사하며 4층 강의실까지 학생들을 쫓아올라가는 바람에 달아나던 학생이 결국 4층에서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는, 최루탄 때문이 아니라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격정 때문에 진짜 눈물을 흘리며 기사를 송고해야 했다. 그런데 그 기사가 한 줄도 보도되지 않을 때는 정말로 기자라는 직업을 그만두고 싶어졌다."

"1973년 3월, 나는 아주 사소한 기사 하나 때문에 육군 제3범죄수사대에 연행되어 치욕스러운 욕설과 협박을 당하는 어처구니없는 경험을 했다. 기사 내용은 '한 방위병이 변심한 약혼녀의 집에 방화했다'는 것이었다. 그 기사가 보도되자 육군범죄수사대는 나를 포함해서 11명의 언론인들을 연행해 조사했다. 그들은 내가 조사실에 들어서자마자 '야, 이 빨갱이 새끼야. 너 군·민을 이간질시키는 간첩새끼지?'하는 욕설을 퍼부어대며 협박했다."

툭하면 '북괴의 남침 유발', '빨갱이 새끼' 운운하는 협박과 그로 인한 극심한 공포심을 뚫고 터져 나온 자유언론실천운동은 각계에 반향을 일으키고 시민들로부터도 큰 호응을 얻었다. 자유언론선언은 24일 당일 밤 곧바로 조선일보와 한국일보로 번졌으며, 이틀 사이에 서울과 지방을 망라한 31개 신문과 방송 및 통신사가 선언문을 채택했다. 언론은 유신체제의 실상을 알려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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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8월23일자 기사 '인간 전두환-육사의 혼이 키워낸 신념과 의지의 행동'
그러나 이후 사태는 기자들에게 참혹하게 전개됐다. 박정희 정권은 광고주들을 압박해 '자유언론실천선언'이 나온 지 두 달도 안 된 시점인 74년 12월16일부터 동아일보 광고 게재를 중단시켰다. 광고 탄압과 이에 대한 저항이 점점 거세지는 와중에 동아일보 사 측은 75년 3월8일부터 경영난을 이유로 자유언론 투쟁의 핵심 역할을 해온 기자들을 포함해 사원들을 무더기 해임하기 시작했다.

이에 항의해 신문·방송·잡지 실무 제작진의 절반이 넘는 160여 명의 사원들이 제작 거부와 사내 농성에 돌입한 가운데 3월15일 편집국장 송건호는 집단 해직 사태에 책임을 지고 스스로 사의를 표명했다. 농성 엿새째인 17일 새벽 3시께 폭도 200여 명이 산소용접기와 해머, 각목을 들고 동아일보 2~4층으로 난입해 날이 부옇게 밝기까지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기자, PD, 아나운서, 엔지니어 등 165명을 폭력으로 모두 쫓아냈다. 사회부 기자였던 김동현의 증언은 이렇다.

"폭도들은 기자 한 명에 3, 4명씩 달려들어 몽둥이질, 주먹질, 발길질을 하며 창밖으로 끌어내었다. 단식에 지친 기자들이 양쪽 겨드랑이를 잡힌 채 아래층 차고까지 끌려내려가는 동안 조금이라도 반항을 하면 그들로부터 돌아오는 것은 주먹질이었다. 정연주 기자는 각목에 맞아 안경이 두 동강이 났다. 폭도들의 구타로 이광석, 임채정, 심재택, 성유보, 정연주 기자가 부상을 당했다. 이미 5일째 단식 중이어서 기자들은 쇠잔해졌는데도 보릿자루를 옮기듯 거칠게 다루었던 것이다."

3월8일부터 4월11일까지 해직 또는 무기정직처분을 받은 사람은 모두 132명에 달하며 끝까지 회사로 돌아가지 못한 113명이 결성한 단체가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다. 실업자가 된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건 정보기관의 감시와 미행, 취업 방해, 공민권 제한, 연행과 고문, 구속과 투옥 등이었다. 이 때문에 많은 해직 기자와 그 가족들은 김밥 장사, 날품팔이 번역, 단행본 외판원, 바둑 월간지 영업사원, 우동장사, 복덕방, 세탁소 운영 등 전혀 경험이 없던 직업 전선에 뛰어들어 닥치는 대로 생계를 이어야 했다.

동아투위 사람들의 체험기를 모은 책 <1975>에는 그들의 간난신고가 읽는 이를 고통스럽게 할 정도로 절절하게 담겨있다. 문화부 기자 출신 문영희의 경험담을 읽어보면 당국의 집요한 감시와 취업 방해 실태가 어땠는지 곧바로 이해된다.

"내 고교 동창 가운데 대신증권 총무과장을 하던 친구가 있었다. 1977년 여름 그에게 취직을 한번 부탁해 보았다. 이력서가 전달되고 곧 양재봉 전무를 면담했다. 양 전무는 이 회사의 오너 격이었다. 한 달쯤 지나 친구가 나를 불렀다. '어, 미안해서 으짠당가. 우리 회사에는 중부경찰서 정보과 형사가 출입한단 말이네. 양 전무가 그 사람에게 자네 문제를 상의했더니 그런 불순분자를 채용하면 회사가 다친다며 무조건 반대했다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증권회사 취직 길은 막혔다."

끝내 복직을 못한 이들은 각자 어떻게든 생업을 찾아 몸부림쳤고 일부는 본의 아니게 거리의 투사가 됐다. 고(故) 홍종민 동아투위 총무는 1980년 5월18일 남영동으로 연행됐다가 23일만에 풀려났는데, 몸무게가 13kg이나 빠져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날 정도였다고 한다.

"계속 잠을 안 재워 미칠 것만 같았어. 태어나서 지금까지 일어났던 일을 전부 쓰라고 해서 쓰면 핵심이 빠졌다고 더 쓰라 하고 쓴 내용을 가지고 심문하고 이렇게 하다 보니 비몽사몽이 되어 수시로 졸면서 쓰러졌나 봐. 수사관들이 그때마다 마구 때리거나 물을 끼얹어 깨어나곤 했지. 그들의 관심은 동아투위와 김대중 씨의 관계였어. 어떤 각본을 만들어 놓고 캐묻고 캐묻고는 했지. 석방돼서 알고 보니 그건 '김대중 내란 음모'란 어마어마한 각본이었어. 옆방에 송건호 선생이 잡혀왔는데 수시로 소름 끼치는 비명이 들려왔어. 수사관들은 나에게 '송건호 저 새끼 머리에 총을 대고 쏴 죽여 버릴까 말까 한다'고 겁을 주었어. 그땐 죽을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

경영진의 탄압에 맞서다 편집국장에서 자의에 의해 해직기자가 된 고(故) 송건호는 생전에 이렇게 토로했다.

"두 번이나 울었어요. 기자들 앞에서 울고, 또 이제 그만두면 다시는 언론계에 들어올 수 없을 것 같아 울고. 그만둘 것인가 말 것인가를 며칠을 두고 고민했습니다. 있으려면 그냥 있을 수도 있었는데…하여간 사주에게 백 몇 명은 복직시키라고 요구했는데 복직시켜주겠어요? 동아일보를 나와서는 생활고에 몹시 시달렸어요. 그때는 내일은 또 어떻게 사느냐가 제일 고민이었습니다. 아주 고민했어요. 심지어 자식들 대학 공부도 못 가르치고…."

졸지에 실업자가 됐을 때 송건호는 49세였으며 학교를 다니는 6남매를 둔 가장이었다. "대책 없는 실직은 현기증을 일으키는 공포였다"고 했던 송건호는 생전에 한길사 대표 김언호와 나눈 대화에서 자신이 '투사'가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직접 뵙게 되면 투사적인 모습이라곤 전혀 없는데요.

"나는 천성적으로 투사가 될 수도 없고 운동가도 될 수 없습니다. 나는 가만히 놔두었으면 평범한 신문기자로 늙어 죽을 사람입니다. 이 경우 없는 시대가, 이 더러운 세상이 나를 가만히 놔두질 않고 재야운동가로 만들었습니다. 나는 본의 아니게 투사 아닌 투사가 되었습니다. 나를 처음 보는 사람들은 당신이 정말 송건호냐고 물어요. 그렇다고 하면 의외라는 표정입니다."

-(80년 5·17 직후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강제로 연루돼) 저 이름난 남영동에서 고문당하실 때 무엇이 머리에 떠올랐습니까?'

"매일처럼 두들겨 패는데, 이러다간 내가 여기서 죽고 말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마나 억울한가, 어떻게 하든지 살아서 나가야 되겠다는 독한 생각을 하게 되었고, 우선 살기 위해 저들이 하라는 대로 허위자백했습니다. 나는 고문을 당하면서, 여자를 남자로 만드는 것은 못할지 몰라도 무엇이든 다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영양실조로 머리가 한 움큼씩 빠져나갔습니다. 권력의 유지를 위해서 얼마나 반인간적인 짓을 자행하는가를 그 속에서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규모와 정도 차이는 있지만 1975년 3월 조선일보에서도 언론자유 투쟁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무더기 해고된 32명이 '조선투위'를 만들었다. 동아투위와 조선투위는 연대해 언론자유수호투쟁위원회를 결성한 후 지속적인 언론민주화 운동을 펼쳤다.

박정희 대통령 사망으로 언론의 암흑기였던 긴급조치 시대가 끝나자 언론계는 일정 수준 자유를 누렸지만, 12·12 사태 이후 전두환 신군부가 등장하면서 도로 급속히 위축됐음은 위에서 본 <새 역사 창조의 선도자 전두환 장군> <인간 전두환> 류의 기사들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1980년에도 많은 기자들이 신군부에 순순히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연행돼 고초를 겪고 상당수가 재판에서 실형을 선고받았으며 끝내 해직됐다.

80년 8월16일 당시 이수성 문화공보부 공보국장이 작성한 공식 문건 '언론인 정화 결과'에 따르면, 언론인 대량 해직 조치의 희생자는 총 933명이었다. 이중 보안사 언론대책반이 소위 '정화조치'를 요구하며 작성한 명단으로 해직된 언론인은 298명이었다. 933명 가운데 298명을 뺀 나머지 635명은 보안사의 정화조치 요구에 편승해 언론사주들이 소위 '끼워 넣기'를 한 것이었다. 80년도 해직기자들은 1984년 3월24일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를 발족시켰다.

'위대한 영도자'를 찬미하며 '땡전 뉴스'를 일삼던 언론의 암흑기는 87년 6월 항쟁 때까지 지속됐다. 위에서 열거한 해직 기자들을 포함한 수많은 시민들의 희생을 거름 삼아 꽃을 피우기 시작한 민주화로 인해 이후 언론은 편집권 독립을 향유하며 정권에 대한 감시와 비판 활동을 아낌없이 벌여왔다. 하지만 과거의 '흑역사'에 대한 고해성사나 해직 기자들을 향한 사과 및 복직 노력에는 극히 인색하거나 아예 입을 다물어왔다.

민정당 사무총장의 발언을 기사에 한 번 인용했을 뿐인 이낙연 총리가 "떳떳하지 않습니다. 부끄럽습니다"라며 "해직되어서 큰 고통을 겪으신 선배들께 늘 죄송하게 생각합니다"라고 공개석상에서 밝힌 반면, 곡학아세의 극치를 보이며 권력자에 대한 적나라한 아부를 일삼던 언론인들은 지금까지 무엇을 했던가.

내일이면 6·10 항쟁 30주년이다. 언론인들도 그 이전 굴종의 시기를 되돌아보고 성찰하며 숱한 이들의 피와 눈물로 얻어낸 언론 자유의 소중함을 다시금 곱씹는 날이 됐으면 좋겠다. '위대한 영도자'라는 표현이 예사로 기사에 등장하던 그런 시절이 있었는지조차 모르는 젊은 기자들도 마찬가지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면 언제고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 지난 정권에서 '공정언론'을 실천하려 애쓰다 해고 또는 징계를 당한 언론인들이 수백 명에 달하는 만큼 '자유언론실천선언'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지도 모르겠다.



■ 참고문헌
송건호, <민주언론 민족언론>, 두레, 1987.
김삼웅, <한국곡필사 1>, 신학문사, 1989.
김삼웅, <한국곡필사 2-유신시대의 곡필>, 신학문사, 1990.
강준만, <한국대중매체사>, 인물과사상사, 2007.
김언호, <책의 공화국에서>, 한길사, 2009.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엮음, <한국민주화운동사 2>, 돌베개, 2009.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엮음, <한국민주화운동사 3>, 돌베개, 2010.
송건호·최민지·박지동·윤덕한·손석춘, <한국언론 바로보기 100년>, 다섯수레, 2012.
윤활식·장윤환 외 23명, <1975>, 인카운터, 2013.
김종철, <폭력의 자유>, 시사IN북,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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