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이스북
  • 트위터
  • 유튜브

"애국가작사자 안창호? 흥사단 답하라"…7대의혹

등록 2012.08.30 06:31:00수정 2016.12.28 01:10:33

  • 이메일 보내기
  • 프린터
  • PDF
【서울=뉴시스】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 = 지난 22일 흥사단이 주최한 '애국가 작사자 규명 발표회-대한민국 애국가 작사자 도산 안창호'는 참으로 의외였다.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흥사단의 역사와 위상으로서는 그 정체성을 의심받을 만한 모호한 행사였기 때문이다.  art-arirang@hanmail.net   

【서울=뉴시스】김연갑 서지학자 = 지난 22일 흥사단이 주최한 '애국가 작사자 규명 발표회-대한민국 애국가 작사자 도산 안창호'는 참으로 의외였다.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흥사단의 역사와 위상으로서는 그 정체성을 의심받을 만한 모호한 행사였기 때문이다.

 그 모호함 속의 주제가 애국가 작사자 문제였다. 이는 누구나 참여하고 질의할 수 있는 공적 문제다. 그런데 행사 현장과 배포한 자료에서 다분히 비학술적인 방법과 인신공격적 언사로 글쓴이 김연갑과 저서 '애국가 작사자 연구'를 언급하고 호명하였다. 이에 글쓴이는 부득이 사적인 문제 제기에 앞서 공공의 문제로 흥사단의 애국가에 대한 이해, 작사자 규명 방법, 그리고 행사 취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만 제기하고자 한다.

 흥사단은 앞으로의 생산적인 논전을 위해 다음에 대해 분명하게 밝혀주길 바란다. 앞으로 상황에 따라 다른 작사자 관련자나 일반인들이 참여하게 될 경우, 이들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도 필요한 전제 사항으로 사료된다. 다음 일곱 가지를 묻는다. 

 1. 흥사단의 친일 성토대회 의도는 무엇인가?

 우선, 두 발표가 학술적인 논리에서 벗어나 단지 친일인물에 대한 성토대회였다고 본다. 당일 행사 참관과 두 편의 글을 통해 글쓴이는 이번 흥사단의 행사는 기존의 안도산 작사설에 대한 기억의 선택과 배제를 통한 재현·복원,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본다. 과연 주변적인 기억을 생산하는 절박함은 가치있는 진실에 근거하는 것인가?  

 행사장에서의 발언 내용과 배포 자료의 내용과 성격에서 확인되는 바이다. 총 321쪽 분량 중 목차와 자료를 포함한 70여쪽을 제외한 두 편의 글에서 안창호설 주장의 핵심적인 논의로 볼 수 있는 면수는 과연 얼마나 되는가? 흥사단이 새삼스럽게 안선생님의 애국사상을 내세울 당위성과 윤치호의 친일을 규탄해야할 명분이 어디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흥사단이 100주년을 맞아 이런 성토대회를 해야만 하는 이유를 답해주길 바란다. 

 2. 행사장 발언과 배포 자료에는 글쓴이 김연갑과 윤치호에 대한 기술은 차치하고, 애국가를 윤치호 작사라고 표기·언급·보도·기술했다는 이유로 악의적으로 기술했다. 흥사단은 이러한 이념 갈등을 조장하는 단체인가? 이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밝혀야 한다. 여기서 사례별로 일부만 제시하기로 한다,

 ㄱ. 1955년 작사자 조사를 담당한 국사편찬위원회에 대한 기술 "부왜반역 친일세력의 압력을 받은 문교부는 가사의 시상에 문외한이지만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출신의 친일세력 소굴로 되어있는 국사편찬위원회 사무국에서···."

 ㄴ. 1948년 9월, 작사자 문제를 처음 논의한 박은용 "좌익 음악평론가 박은용이 '애국가考'에서 고의적으로 우익성향의 안창호를 비판하고 윤치호의 '가사지'를 거론···."

 ㄷ. 1931년 LA 종우서관 발행 '세계명작가곡집-무궁화'의 편자 한석원 목사 "한석원 목사는 친일파의 한 사람이다. 친일의 증거로 친일 잡지···."

 ㄹ. 1952년 E R Griffith 편, 미국적십자사 발행 'National Antheme' "1951년이면 한국에는 6·25 동족상잔의 전쟁이 한참 진행 중 … 윤씨 가문에서 애국가 작사자가 윤치호라고 제공했거나 아니면 윤치호를 잘 아는 지인이 그렇게 윤치호 이름을 추천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ㅁ. 윤치호 관려 자료에 관한 보도를 한 조선일보 "윤씨 가문과 조선일보는 사돈관계라는 사적인 인연이 있다. 그 때문에 윤치호 애국가 관련기사는 조선일보의 후원이 크게 뒷받침해 준다."

 ㅂ. 윤치호로 명기된 '세계명작가곡집-무궁화'를 발굴한 신인수 "서울회현교회 장로인 기독교서지연구가 신인수와 윤치호 가문과 어떤 관계인지 알 수 없으나···."

 전혀 논리적이지 못한 기술이다. 글쓴이가 발표한 안창호 작사로 표기한 세광중학교 '음악교재'에 대해서 원텍스트를 보지도 않았으면서 다음과 같이 장황하게 기술한 것에서도 편파성은 드러난다.

 "친일파를 옹호하여 자유당 정권을 유지하던 이승만 대통령이 안창호가 세운 흥사단을 핍박하던 1950년대에 청주 세광중학교 황진섭 선생이 애국가에 자주·민주주의 정신을 발휘하여 안창호 작 프린트물 음악교재를 만든···."

 이런 정도의 사료 접근 태도와 이해력은 논외로 한다 하더라도 좌익 대 우익, 친일 대 애국으로 갈등을 조장, 집단적 정서를 이용하려는 논리는 애국가를 논하는 장에서는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안창호 선생이 결코 원하지 않을 것이며, 뿐만 아니라 애국가 작사자 규명 자료는 사상검증을 마친 것만 채택돼야 한다는 억지이기 때문이다. 흥사단의 입장을 요구한다.

 3. 명백한 역사왜곡, 흥사단의 본의인가?

 단적으로 인간의 탄생과 죽음에 대한 후인의 기술은 그 인간의 자체를 상징한다. 탄생은 인물의 배경을 말해주고, 죽음은 사후의 평가를 예견케 해준다. 그만큼 중요하기에 기술할 때는 재삼 확인해야 한다. 그런데 배포자료에는 윤치호의 죽음을 "친일로 그를 반길 수 없는 조국을 의식하고 윤치호는 자결로써 참회의 일생을 마첬다고 해두고는··"이라 했고, "친일신문 조선일보만 뇌일혈로 병사했다"고 하여 죽음을 악의적으로 기술했다. 당시 동아일보와 그 외 신문들도 지병으로 병사했다고 썼다. 부고 기사가 역사의 사실로 존재하고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하나는 흥사단이 의도적으로 윤치호를 '자결'로 몰아 '참회' 운운하며 작사자 문제로 연결하려는 치졸함을 노출시킨 것이다. 또 하나는 역사 문제를 너무 감정적으로 쉽게 생각하는 것을 넘어 자의적 해석이 가능하다는 심각한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 인물의 죽음까지 왜곡하여 단체와 문중의 정서를 집단화해서 역사를 가공하겠다는 만용을 부린 것이다. 과연 역사를 무서워하지 않는 이 만용은 피치 못할 절박감에서인가, 아니면 친일파는 그렇게 모독해도 된다는 입장에서인가? 이에 대해 묻는다.

 4. 애국가가 흥사단 단가인가?

 애국가 작사자 규명 이유가 흥사단답지 않다. 즉, 우리 민족의 수난사와 함께한 애국가의 기능과 역할, 3·1운동은 물론 항일민족운동 진영에서 불러온 역사성, 이를 계승하여 임시정부와 대한민국 정부가 불러오는 정통성, 이런 의미있는 애국가이기에 그 가치와 정신을 발현해 내자는 취지에서가 아니라, 친일파 윤치호의 작사라고 하니 규명해야한다는 논리이기 때문이다.

【서울=뉴시스】박문호 기자 = 22일 오후 중구 태평로 프레스센터에서 흥사단 주최로 '애국가 작사자 규명 발표회'가 열리고 있다. 이날 발표회에는 정영모 민족문화연구가(왼쪽부터), 오동춘 짚신문학회 회장, 박만규 전남대 교수, 안용환 명지대 교수, 정인교 서울신학대 교수가 토론자로 참석했다.   go2@newsis.com

 그래서 "가정이지만 친일파 윤치호가 애국가를 지었다면 국민이 애국가를 부르겠는가"라고 주장했고, "친일파 윤치호가 작사했다면 앞으로 부르지 않겠다"고 했고, 이에 환호와 박수로 동의한 사실이 그렇다. 애국가가 담지하는 의미와 가치는 무시된 것이다. 애국가 작사자 규명 이유가 흥사단만의 단가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한 문중의 총의로 결정할 수 있는 문중의 노래인가?

 상대를 자료와 논리로 설득하여 얻어지는 결론이 상대의 주장 인물을 거짓말쟁이로 만들지 않는 방법이다. 이는 후대인들이 고려해야 하는 역사인물에 대한 예의이다. 과연 흥사단은 안창호 선생을 한 단체와 한 문중의 인물이라고만 인식하고 있는가? 답변하기 바란다.

 5. 누가 "애국가는 내가 지었다"고 했는가?

 이번 흥사단의 비학술적인 행사는 작사자로 거명되는 네 사람(안창호·윤치호·김인식·최병헌) 중 세 사람을 거짓말쟁이로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가 다 알고 있고, 배포자료에서 강조했듯이 안창호 선생은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라'라고 하였다. 과연 도산 선생께서는 "애국가는 내가 지었다"고 했는가? 아닌가? 전자건 후자건 반드시 그 한편의 논리를 견지해야 옳다. 편의적 선택이어서는 안 된다.

 이 문제는 바로 흥사단이 안 선생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 수도 있다는 심각성을 갖고 있다. 도산안창호 기념사업회 서영훈 전 상임부회장의 "도산선생이 직접 애국가를 지었다는 기록이 없다면, 오히려 선생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라는 지적을 경청해야 하는 이유이다.

 1910년 9월21일자 신한민보는 '윤티호'를 작사자로 표기한 애국가 가사를 '국민가'란 제명으로 발표했다. 국민가 발표는 안 선생의 아이디어라고 본다. 왜냐하면 안 선생이 1909년 2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공립협회 등을 통합하여 창립한 대한인국민회 공립신보를 개제(改題)하여 발행한 신문이 신한민보이기에 대한인국민회 회가로 사용하기 위해 국민가를 발표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물론 안 선생이 발행자나 편집자는 아니지만 발행 단체를 창립한 분이기에 맥락상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단순하게 윤치호 작사를 입증하는 또 하나의 자료라는 가치문제가 아니라 안 선생이 국민가의 보급 필요상 발전적으로 활용하였다는 기지와 작사자를  밝히는 정확성을 입증해 주고있다는데 방점이 주어져야 한다. 이를 환언하면 안 선생의 애국가 사랑과 정직성에 누를 끼치는 것은 물론, 흥사단을 거짓말쟁이로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도산선생께서 "애국가는 내가 지었다"라고 했는가, 안 했는가는 매우 중요하다. 이에 답해주길 바란다. 

 6. '안창호 작사 애국가'라는 객관적 텍스트는 무엇인가?

 애국가 작사자 문제는 정서나 감정의 호소 대상이 아니라 엄정한 역사적 진실 규명의 문제다. 그래서 철저하게 자료와 그 정확한 해석에 의거해야 한다. 작사자가 누구냐라는 진부(眞否) 규명 문제를 구분하지 못하고 작품의 내적 평가·분석을 위한 '전기적 비평방법' 운운하는 비논리적인 접근은 안 된다는 말이다. 이런 방법은 최남선의 '독립선언서'도 재단하는 칼이 된다. 이를 전제로 할 때 과연 이번 행사의 핵심 자료는 무엇인가 의문시된다. 즉, 1998년 발행한 김연갑의 '애국가 작사자 연구'에서 논의된 안창호설의 범위와 논리를 넘어설 만한 자료가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글쓴이는 안창호 작사로 주장할 여지 정도라도 있는 4절 애국가 텍스트를  요구한다. 이미 행사장의 발언과 배포자료에서 "바꾸고" 또는 "고치고"라고 한 그 기준의 객관적 자료를 말한다. 이것을 제시해야 이번에 내세운 소위 '윤형갑 CD증언 2011.12'가 방증 자료로 효력을 갖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이번에 제시한 자료는 단지 '의도적 기억의 재현'일 뿐임은 물론, 안창호설의 반복과 답습일 뿐이다. 그러니 객관적으로 검증이 가능한 원자료가 제시되어야 한다.

 7. 흥사단의 접근 방식, 이 뿐인가?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 애국가 작사자조사위원회는 표결에서 9대 2 또는 11대 2로 윤치호설에 대한 만장일치가 되지 않아 '작사자 미상'으로 결론을 내렸다. 진부의 문제를 거수로 결정해야 할 만큼 고심이 컸음을 알 수 있는데, 그만큼 당시는 곤란한 문제였던 것이다. 그 원인은 당시 위원회의 인식 부족과 무원칙 조사방법 등이 있지만 당시 언론에 제시한 원인은 사료 부족이었다. 조사보고서에서는 ①관련 문헌 및 신문기사 ②가족과 제자들이 제출한 문건 ③가족과 제자들의 증언, 이 세 가지가 중심이었다.

 그런데 이때 조사방법과 절차상에 문제가 있었다. 매일매일 진행상황이 언론에 노출되어 제출 자료에 대한 정확인 판단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친일' 같은 집단 정서가 반영되어 과학적 결론을 얻지 못하게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윤치호 측이 제시한 '찬미가'와 '자필 가사지'에 대한 검토를 과학적으로 정확하게 할 수 없게 하였다. 이로써 조사위원 주요한은 표기법에 대해서 잘못 판단했고, 황의돈은 필사 시점과 작사 시점을 구분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여 결정적으로 두 자료의 상호 보완성이란 자료 가치를 놓치고 만 것이다.

 부연한다면 전자 '역술(譯述)'의 12편 서양찬송가 '번역'과 3편의 '지음(저술)'-일부 번역과 일부 지음-에서 3편 '저술'의 방증 자료가 후자 '자필 가사지'로 상호 보완적 관계임을 판단하지 못했다는 점을 말한다. 당시 가족들의 자료 제출 시차와 미참석 조사위원에게 전달한 극히 상태가 불량한 '자필 가사지' 사진 등에 의해 판단의 기회를 놓치게 된 것이다. (출간 예정인 '애국가 연구'에 당시 최남선 소장 '자필 가사지' 사진이 소개된다)

 또한 황의돈은 '자필 가사지'에 침을 묻혀 문질러 먹물이 묻어나니 1907년에 쓴 것이 아니라고 판단하여 위작(僞作) 운운하였다. 가족 증언대로 단지 기념하기 위한 요청으로 쓰여졌는데, 여기에 자신이 지은 것을 옮겨 쓴 일시를 쓰는 것은 오히려 부자연스럽고 의도적이다. 특히, 서예 작품이 아니기에 더욱 그렇다. 이러한 판단을 당시 하지 못한 것인데, 이는 매일 같은 기자들의 성급한 결과 요청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상의 사실에서 귀감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가족이나 제자 등 직접 이해 관계자들의 증언은 1차 문건 자료 효력의 보완 또는 방증 자료로만 활용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당시 증언이 중심이 되어 혼란을 야기시켰던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말이다. 사실 증언은 1세대(30년) 이상 지난 기억이라면 선택과 배제라는 구비성(口碑性)에서 그 증거력은 매우 희박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면밀한 교차 검토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므로 이런 문제점은 흥사단의 접근 방법에서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도 흥사단은 60여년 전의 진부한 접근법, 다시 말해 주요한과 황의돈의 오판 사실을 의도적으로 반복 인용하고, 주변적인 기억(CD "윤정경 4형제분 중 윤형주 종조부 부인인 종조모 김정수(1894~1976) 권사의 구두 증언을 1957년경 듣고···")에 의한 또 하나의 설을 제시였다. 과연 이러한 방법이 이 시대의 접근법으로 가능하고 유효하다고 보는가? 또한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증언으로 채택했다면 객관적 워딩이 가능한 자료로 제시했어야 하고, 그 자체만으로 논증했어야 한다.  

 이번의 소위 'CD-1907년 3월 선천예배당 안도산 '애국찬미가'는 흥사단만 소유하고, 흥사단만 '~하더라'로 활용했다. 또한 구익균님의 증언도 이미 오래 전에 알려진 것을 마치 흥사단이 처음 확보한 것인듯 처리하는 것도 바람직하진 않다. (글쓴이도 오래 전에 인터뷰한 바 있다. 이에 대하여는 출간 예정인 '애국가연구'에 인용되어 있다)

 과연 이번과 같은 '증언의 증언'의 사료적 가치, 그리고 증언 누적 횟수로 작사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가?

 이상, 흥사단의 행사 참관과 배포 자료에서 기존 논의를 넘어서, 누구에게도 명예가 훼손되지 않는 방향으로 작사자를 규명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반드시 객관화해야 할 기본 입장을 요구했다. 정중하게 답변을 청하는 바이다.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 [email protected]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