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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책]러시아에 대한 편견을 날려버리는 탐방기

등록 2019.09.20 14:51:07수정 2019.10.28 17:5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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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창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두 도시 이야기'

[오늘의 책]러시아에 대한 편견을 날려버리는 탐방기


【서울=뉴시스】정철훈 기자 = 열네 살 무렵, 추풍령 언저리 시골 중학교를 다니던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수업 시간에 "너희 공부하기 지루하지?"라고 운을 뗀 선생님으로부터 "소련 여자들은 고춧가루를 들고 다니니까 조심해야 한다"라는 말을 듣는다.

그때부터 소년의 가슴엔 소련이라는 머나먼 나라가 들어와 묘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1980년대 대학생이 된 그는 '소련혁명사'를 읽으면서도 선생님이 들려준 고춧가루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 때는 소련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다. 북극곰이 보드카에 취해 길거리에서 자고 있다느니, KGB가 스파이를 증기기관차 화실에서 태워 흔적도 없이 처리한다느니···.

 마침내 2001년 첫 러시아 여행을 다녀온 그는 이후 시간만 나면 배낭을 메고 시베리아대륙을 횡단하며 러시아의 풍광에 심취한다. 여행자 K의 이야기이다.

 볼셰비키와 혁명의 나라, 도스토예프스키와 문학의 나라, 차이코프스키와 음악의 나라, 어쩌면 가눌 곳 없는 마음의 유형지일지도 모를 러시아. 이렇게 열거하면 러시아는 여전히 신비감에 둘러싸인 미혹의 땅이다. 하지만 여행자 K는 이런 추상적 통념을 뒤집고 자신이 몸으로 체험한 러시아의 실감을 문장으로 승화시켰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팜므파탈이었다. 뱃사공이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세이렌의 노래에 어쩔 수 없이 빨려가듯 나는 그녀의 치명적 유혹에 질질 끌려갔다. 나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구경한 것이 아니라 그녀가 부르는 곳으로 쫄랑쫄랑 따라갔을 뿐이다. 그러나 그 길은 고통과 죽음의 길이 아니었다. 환희와 마법의 길이었다."

 K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러시아 도시에 대한 편견을 한 방에 날려버리는 매혹적인 도시"로 소개한다. "도시 전체가 문화유산으로 가득 찬 박물관"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k는 이 도시에서 여러 길을 만난다. 황제의 길, 문화의 길, 혁명의 길, 조선 독립의 길이 그것이다. 대한제국이 망하자 1911년 1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초대 러시아 공사 이범진의 묘소는 차량으로 한 시간 정도 달려야 나오는 '북방묘지'에 있었다.

"낯선 키릴 문자의 비문과 얼굴도 확연히 다른 이국인들의 무덤 속에 이범진 공사를 그대로 남겨주고 다시 발길을 돌려야 했다. 하늘에서 갑자기 비가 억세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국인은 이범진뿐 만 아니다. 해방 후 월북 인사 이태준과 백남운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찾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여정을 마친 K는 모스크바행 기차에 오른다. 그 철길을 달린 민영환, 이범진, 이상설, 이준, 이태준 등을 떠올린 그는 묘한 긴장감에 휩싸인 채 모스크바로 향한다. 차이콥스키가 살았다는 클린을 지나 모스크바의 레닌그라드 역에 도착한다.

자본주의에 대항해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해 만들었으나, 흉물스러운 건물의 상징이 된 '스탈린의 7자매'가 여전히 서 있는 도시. K는 이 도시 외곽에서부터 중심부로 여정을 잡는다. 우주 박물관과 오스탄키노 타워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길은, 공포의 상징과도 같은 옛 KGB 건물과 바로 맞은편에 있는 아먀콥스키 박물관으로 이어진다. 퇴색한 이념의 그림자와도 같은 풍경들이 마치 추억인 듯 K를 슬며시 스쳐간다. 혁명 광장의 카를 마르크스 동상, 크렘린의 입구에 있는 레닌 도서관···.

그는 크렘린을 뒤로 하고 붉은 광장으로 발길을 옮긴다. 이곳에 있는 피라미드 모양의 건물에는 그 유명한 레닌이 방부 처리되어 누워 있다. 죽어서도 죽지 못한 레닌이 보여주듯 공산주의 정권의 통치 기간 동안 이곳은 이념의 휘장에 갇혀버렸다. 일찌기 이태준과 오장환이 열광한 도시, 그러나 나혜석에게는 너절한 도시. K는 이상에 가로막혀 현실감을 잃게 하는 도시의 붉은 광장이 아프기만 하다. 하지만 형형색색의 빛깔로 마법처럼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성 바실리 성당 역시 그곳에 있다.

모스크바강을 건너도 온 도시가 역사의 현장이다. 강변의 '10월 호텔', 고리키 공원을 끼고 뻗은 레닌스키 대로, 솔제니친이 묻힌 돈스코 수도원에 이어 가가린 광장이 연이어 나타난다. 조금 더 가면 비운의 사회주의 혁명가 주세죽이 잠든 다닐로프 공동묘지가 있다. 박헌영의 첫 부인인 그녀는 치열한 삶을 살다가 모스크바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았다. 

K의 섬세한 감성이 이끄는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이국의 땅 곳곳에 숨은 위대한 역사와 문학과 예술, 그리고 우리 민족의 편린들이 마치 긴 여행을 한 듯, 머리를 지나 가슴에 시나브로 스며든다. 그렇다면 K는 소년 시절에 들었던 ‘고춧가루를 들고 다니는 소련 여자’를 만났던가. 궁금하면 책장을 펼칠 수밖에 없다. 시대의창, 319쪽, 1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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