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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이어령 "지구에 종말 닥쳐도 최후의 증인 되고 싶다"

등록 2022.02.27 10:22:12수정 2022.02.27 10:3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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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통해 '메멘토 모리' 다시 깨달아"

삶의 끝자락에서 '탄생' 이야기…"생명은 소중한 선물"

"움직이는 파도도 결국 수평으로 돌아가…죽음도 같다"

[서울=뉴시스]책 '메멘토 모리' (사진 = 열림원) 2022.2.27.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책 '메멘토 모리' (사진 = 열림원) 2022.2.27.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이현주 기자 = 노태우 정부때 신설된 초대 문화부 장관이자 문학평론가, 언론인, 교수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며 '우리 시대 최고 지성'으로 불렸던 이어령 이화여자대학교 명예석좌교수가 26일 별세했다.

고인은 2017년 암이 발견돼 두 차례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항암치료 대신 저서 집필에 몰두했으며 영화, 강연에 참여하는 등 마지막까지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지난 1월 출간된 '메멘토 모리'는 고(故) 이병철 삼성 회장이 죽음과 대면했을 때 가톨릭 신부에게 던진 종교와 신과 죽음에 대한 24가지 질문에 대해 이 전 장관이 답을 내놓은 책이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의미의 라틴어다. 죽음·신·종교가 핵심 키워드로 등장하지만, 과학·예술·문명·문화 등 여러 영역에 걸친 이야기도 담겼다.

"우리는 낭만적인 메멘토 모리, 술 먹고 인생을 논하는 메멘토 모리쯤으로 죽음을 생각했잖아요. 이모털(immortal·죽지 않는)한 존재는 하나님뿐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거지. 하나님 이외의 존재는 다 죽어. 그게 원죄야. 이게 모털(mortal·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인 거지. 생명이라는 것은 다 죽어. 코로나19 바이러스를 통해 메멘토 모리를 다시 깨닫게 된 겁니다."

이 전 장관은 코로나 이후의 세계를 눈앞에 그렸다. 그는 "죽음이라는 것이 바이러스, 질병을 통해 개개인의 마음속에 들어와 경험하게 된다. 직접 경험하지 않더라도 죽음이 자기 일로 비치기 시작했다"며 "죽음을 통해 황폐화된 개인을 응시하게 된 것이다. 이 죽음이 우리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두고 볼 일"이라고 진단한다.

그는 "지구에 종말이 닥쳐도 최후의 증인이 되어 '지구는 이렇게 끝났다'는 기록을 남기고 싶다"고 밝혔다. "종말에 대해 쓰면 그 기록은 종말 뒤에 오는 것이니까 종말보다 0.1초 더 사는 거지. 그래서 나는 글을 쓰고 한마디 말로 남길 겁니다. 사과나무가 아니라 언어의 씨앗을 우주에 뿌리는 것입니다."

[서울=뉴시스]책 '한국인 이야기' (사진 = 파람북) 2022.2.27.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책 '한국인 이야기' (사진 = 파람북) 2022.2.27.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한국인 이야기'는 고인이 77세였던 2009년 시작해 88세에 첫 권 '탄생'을 내놨다. 현재를 살아갈 우리에게, 미래를 살아갈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담았다.

10년 이상의 시간이 걸린 데 대해 그는 "희수(77세)에 잉태해 미수(88세)에 늦둥이를 얻은 셈"이라며 "고통 끝에 얻는 그 '황홀한 산통'의 역설을 직접 체험해봤다"고 언급했다.

그는 삶의 끝자락에서 오히려 '탄생'을 이야기한다. 생명을 생각하고 텅 빈 우주를 관찰하면서, 모든 것을 부정해도 살아 있는 자신은 부정할 수가 없으며, 숨을 쉬고 구름을 본다는 건 놀라운 일이라고 한다. 그에게 생명은 소중한 선물 그 자체다.

"사람들의 일생을 종교적으로 보면, '흙에서 흙으로'이고 사회복지적으로 보면 '요람에서 무덤까지', 자연 생물학적인 시각에서 보면 '자궁에서 무덤까지'다. 하지만 스토리텔링으로 하자면 사람의 일생은 태어날 때의 기저귀 천에서 시작하여 수의의 천으로 끝나는 이야기다."

[서울=뉴시스]책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사진 = 열림원) 2022.2.27.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책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사진 = 열림원) 2022.2.27.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지난해 출간된 이후 장기간 베스트셀러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은 김지수 기자가 이 전 장관과 나눈 인터뷰를 담은 책으로 이 전 장관이 공저로 이름을 올렸다.

이 전 장관이 들려주는 삶과 죽음에 대한 지혜로운 이야기가 담겼다. 삶과 죽음에 대해 묻는 제자에게 스승 이어령은 은유와 비유로 가득한 답을 내놓으며, 인생 스승으로서 세상에 남을 제자들을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낸다.

그는 "영화가 끝나고 'the end' 마크가 찍힐 때마다 나는 생각했네. 나라면 저기에 꽃봉오리를 놓을 텐데. 그러면 끝이 난 줄 알았던 그 자리에 누군가 와서 언제든 다시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을 텐데. 그때의 라스트 인터뷰가 끝이 아니고, 다시 지금의 라스트 인터뷰로 이어지듯이. 인생이 그래"라고 털어놓는다.

"바다에 일어나는 파도를 보게. 파도는 아무리 높게 일어나도 항상 수평으로 돌아가지. 아무리 거세도 바다에는 수평이라는 게 있어. 항상 움직이기에 바다는 한 번도 그 수평이라는 걸 가져본 적이 없다네. 하지만 파도는 돌아가야 할 수면이 분명 존재해. 나의 죽음도 같은 거야. 끝없이 움직이는 파도였으나, 모두가 평등한 수평으로 돌아간다네. 본 적은 없으나 내 안에 분명히 있어. 내가 돌아갈 곳이니까."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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