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이스북
  • 트위터
  • 유튜브

쌀 수십 가마니 값 오동나무로 ‘작품 이력 상자’…간송이 남긴 ‘상서’

등록 2026.10.06 16:05:06수정 2026.10.06 16:08:14

간송미술관 특별전 '상서(箱書), 컬렉션을 읽다' 7일 개막

작품명·감식·전래 내력 적은 ‘상서’ 첫 대규모 공개

오세창 등 4인의 필적…51건 106점, 전형필 탄신 120주년

[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 간송미술관 특별전 '상서'에 선보인 김정희 <직성수구> 2026.10.05. hyun@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 간송미술관 특별전 '상서'에 선보인 김정희 <직성수구> 2026.10.05.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명작에도 족보가 있다.

누가 만들었는지, 무엇을 그렸는지, 누구의 손을 거쳐왔는지. 때로는 작품을 본 당대 최고 감식가의 평가까지 적혀 있다.

그 기록이 남은 곳은 그림이 아니다. 그림을 담았던 오동나무 상자다.

서울 성북구 간송미술관 보화각에서 7일 개막하는 특별전 '상서(箱書), 컬렉션을 읽다'는 작품과 함께 그 작품의 ‘이력’을 꺼내 보인다.

‘상서’는 유물을 보관하는 상자에 작가와 작품명, 재료와 기법, 전래 내력 등을 적은 기록이다.

간송 전형필(1906~1962)은 1930년부터 일본으로 유출되던 우리 문화유산을 경매와 거간을 통해 수집하고, 스승 오세창 등의 감식을 거친 뒤 유물에 꼭 맞는 오동나무 상자를 제작해 기록을 남겼다. 입수에서 감식, 보존과 전승으로 이어지는 간송컬렉션 수장 체계의 마지막 단계였다.

상서가 본격적으로 기록된 것은 전형필이 1934년 성북동에 북단장을 조성하고 종로 본가의 소장품을 옮기면서부터다. 습기 조절과 방충·방부에 뛰어난 오동나무로 유물마다 맞춤 상자를 만들었다. 상자 하나의 제작비가 당시 20~200원대로 쌀 수십 가마니 값에 달했다.

[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간송미술관 특별전 '상서' 오동나무로 제작된 상서. *재판매 및 DB 금지

[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간송미술관 특별전 '상서' 오동나무로 제작된 상서. *재판매 및 DB 금지



현재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오동나무 상자는 약 700건. 이 가운데 상서가 확인된 것은 258건이다. 상서에는 작품명과 재료·기법뿐 아니라 감식가의 평가와 당대 열람자·소장자의 기록 등이 담겼다. 작품만으로는 알 수 없는 ‘이력’을 복원하는 자료인 셈이다.

글씨를 남긴 사람은 위창 오세창을 비롯해 관재 이도영, 무호 이한복, 일본 한학자 나가오 우잔 등이다. 당대 권위 있는 감식가들이 작품을 직접 보고 판단한 흔적이다.

상자는 작품을 보관했고, 상자 위 글씨는 작품의 시간을 보관했다.

추사 김정희의 '직성수구'가 대표적이다.

김정희가 30대 중반이던 1820년 무렵 청나라 문인 고순에게 직접 시를 지어 써준 행서 대련이다. 작품은 고순에게 건너간 뒤 베이징 시장의 한 수장가 손에 들어갔다. 육당 최남선의 매부 박석윤이 베이징에서 이를 발견해 구입했고, 다시 전형필의 수장품이 됐다. 그림이나 글씨만 들여다봐서는 알 수 없는 한 작품의 긴 이동 경로가 상서에 남아 있다.

1939년 겨울 오세창은 이 여정을 상자 위에 적으며 추사의 작품이 전형필의 보화각 소장품이 된 것을 두고 "참으로 기이한 인연”이라고 기록했다. 이국을 떠돌던 추사의 글씨가 다시 고국으로 돌아온 데 대한 감회까지 상자에 함께 보존된 셈이다.

상서는 작품의 잃어버린 이름도 찾아낸다.

조선 중기 화가 김시의 '선록완월'은 1934년 전시에서 단순히 ‘신선도’로 소개됐다. 그러나 작품을 입수한 뒤 오세창이 상자에 ‘고사완월도’라고 적었고, 이후 연구를 통해 신선과 사슴이 달을 감상하는 장면이라는 뜻의 현재 제목 ‘선록완월’로 자리 잡았다. 한 작품의 이름이 변해온 과정 자체가 상서에 남은 것이다.

감식가의 평가도 생생하다. 김홍도의 '낭원투도'를 본 오세창은 1934년 비 내리는 창가에서 “단원 인물의 걸작으로, 근래 보기 드문 가품(佳品)”이라고 적었다. 한 세기 가까이 전 당대 최고의 감식안이 작품을 펼쳐보고 내린 평가가 오늘날 관람객 앞에 다시 놓인다.

이번 전시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소림 조석진의 '인물고실지도'다.

소동파 등 중국 고사 속 인물과 일화를 그린 작품인데, 1907년 한 살배기 전형필의 돌사진 뒤에 놓였던 바로 그 병풍이다. 사진을 대조하면 작품 네 폭이 뚜렷하게 확인된다. 전형필이 훗날 미술품 수집가가 된 뒤 사들인 작품이 아니라 적어도 1907년 이전부터 종로 본가에 있었던 초기 소장품이라는 사실이 사진과 기록을 통해 확인된 것이다.
 간송미술관 특별전 상서에 선보이는 조석진 '인물고실지도(人物故實之圖)'. 2026.10.05. hyun@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간송미술관 특별전 상서에 선보이는 조석진 '인물고실지도(人物故實之圖)'. 2026.10.05.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현재 병풍은 열두 폭의 족자로 재장황됐다. 2층 구조의 특이한 오동나무 상자에는 오세창의 묵서와 함께 1934년 북단장으로 작품을 옮기며 기록한 열두 폭의 제목과 시대, 등장인물 정보까지 담겨 있다. 한 살배기 전형필 뒤에 놓였던 병풍에서 훗날 간송컬렉션의 체계적인 기록물로 이어진 작품의 생애가 한눈에 펼쳐진다.

길이 10m에 가까운 조석진의 '행행도권'도 기록이 작품의 역사를 복원하는 사례다. 폭 23.5㎝, 길이 990.7㎝의 긴 두루마리에 국왕의 행렬을 수백 명의 사람과 말로 묘사했다. 구식 군복과 별기군 창설 이후의 신식 군복이 함께 등장해 1880년대 초 행행 장면으로 추정된다. 두루마리 끝에는 1925년 오세창의 발문과 이듬해 이도영의 칠언시가 남아 있다. 이한복이 그림을 표장했고 1930년 조선미술관 전람회에서 공개된 뒤 1938년 전형필이 수장했다.

김영욱 간송미술관 전시교육팀장은 “간송컬렉션의 상서는 당대 탁월한 감식가들의 손을 거친 공인(公認)의 기록”이라며 “비록 오래된 필적이지만 지금의 우리에게 유물을 입체적으로 읽어내는 다양한 시선을 제공한다”고 설명했다.
[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간송미술관 특별전 '상서' 전경. *재판매 및 DB 금지

[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간송미술관 특별전 '상서' 전경. *재판매 및 DB 금지



이 전시는 간송 전형필 탄신 120주년을 맞아 마련됐다. 2024년 보화각 재개관 이후 간송미술관이 이어온 ‘간송컬렉션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라는 3개년 기획의 마지막 전시다. 이 전시는 경매와 거간을 통한 입수에서 감식가의 감정, 오동나무 상자를 통한 보존, 후대에 이르는 전승까지 컬렉션이 만들어진 과정을 추적한다.

전영우 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은 “상서는 단지 상자에 적힌 글이 아니라, 아버지인 간송이 먼 훗날 우리에게 남기신 조용한 편지이자 문화에 대한 믿음의 증언”이라며 “상서는 컬렉션의 서사이며, 우리 문화를 지켜내고자 했던 한 사람의 뜻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전인건 간송미술관장은 ‘상서’를 앞선 세대가 남긴 연구의 축적으로 봤다. 간송이 문화유산을 수집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보화각과 수장·연구 시스템을 만들어 후대의 연구 기반까지 마련했다는 설명이다.

그는 “학예를 이야기할 때 ‘거인의 어깨’라는 말을 하지 않느냐”며 “그 당시를 살았던 거인들이 어떤 마음으로 작품을 보고, 제한된 상황에서도 얼마나 치열하게 연구하고 기록하려 했는지를 느낄 수 있는 전시”라고 말했다.

이어 “그림이나 글씨를 감상할 때 미학적인 것을 따지는 것보다 거기에 얽힌 이야기가 중요하지 않겠느냐”며 “그 이야기에 조금 더 깊이와 풍부함을 주는 것이 상서라고 생각하면 더욱 재미있게 볼 수 있다”고 했다.

상서 30건 61점과 유물 21건 45점 등 모두 51건 106점이 나왔다. 전시는 2층 ‘조선 서화’와 1층 ‘근대 서화’로 구성됐다.
 
이번 전시 개막과 함께 동명의 도록 '상서(箱書), 컬렉션을 읽다'가 발간된다. 특히 올해 간송 탄신 120주년을 기념하여 도록 내에 간송 전형필의 생애와 자취를 조명한 30여 쪽 분량의 일대기를 특별 수록했으며,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귀중한 사진 자료들도 함께 만나볼 수 있다. 도록은 전시 기간 중에는 현장 구매만 가능하며, 전시가 종료된 이후부터는 온라인으로도 판매될 예정이다.
간송미술관 보화각 앞에 새롭게 설치된 석호상 한 쌍. 19세기 말~20세기 초 제작된 것으로, 간송 전형필이 1935년 3월 일본인 수장가 와타나베 가문의 소장품으로 경성미술구락부 경매에 나온 것을 당시 거간 신보 김용진을 앞세워 1200원에 낙찰받았다. 둥근 얼굴에 몸을 한껏 세운 독특한 모습 때문에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호랑이 ‘더피’를 닮았다는 별명도 붙었다. 묘소의 파수꾼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석호상은 보화각 문 앞을 지켜온 중국 석사자상을 대신해 새로운 ‘문지기’로 관람객을 맞는다. 2026.10.6. hyun@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간송미술관 보화각 앞에 새롭게 설치된 석호상 한 쌍. 19세기 말~20세기 초 제작된 것으로, 간송 전형필이 1935년 3월 일본인 수장가 와타나베 가문의 소장품으로 경성미술구락부 경매에 나온 것을 당시 거간 신보 김용진을 앞세워 1200원에 낙찰받았다. 둥근 얼굴에 몸을 한껏 세운 독특한 모습 때문에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호랑이 ‘더피’를 닮았다는 별명도 붙었다. 묘소의 파수꾼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석호상은 보화각 문 앞을 지켜온 중국 석사자상을 대신해 새로운 ‘문지기’로 관람객을 맞는다. 2026.10.6.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내·외국인 관람객의 깊이 있는 관람을 돕기 위해 한국어와 영어로 전시음성 해설(오디오 가이드)을 제공한다.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우리 고미술을 알기 쉽게 풀어내며, 개인 이어폰을 지참하면 더욱 쾌적하게 감상할 수 있다.

간송미술관 소장품의 보존 관리는 국가유산청의 협력 아래 복권기금의 지원을 받아 이루어지고 있다. 전시는 12월6일까지 열린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