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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6세대 스승 리영희, 저항의 한평생

등록 2010.12.05 11:50:04수정 2017.01.11 12:5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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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뉴시스】  제2회 후광 김대중 학술상 수상자인 리영희 전 한양대학교 교수(79)가 5일 오후 전남대학교 국제회의동에서 특별강연을 진행했다.  리 교수는 특강을 통해 '한미관계의 새디즘과 매조키즘'이란 주제로 이명박 정부에 대한 생각과 미 쇠고기 협상을 놓고 벌어지는 사회현상들을 진단했다. (사진=전남대 제공)/이형주기자 peneye@newsis.com <관련 기사 있음>

【서울=뉴시스】백영미 기자 = ‘실천하는 지성’,‘진보세력의 거목’으로 존재한 리영희 한양대 전 교수(81)가 5일 서울 면목동 녹색병원에서 간경화로 별세했다. 복역과 석방의 반복 속에서도 진보를 향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은 행동하는 지성이었다.

 리 교수는 평안북도 삭주 출신으로 한국해양대를 졸업한 후 미국 노스웨스턴대에서 공부했다. 1951년 국민방위군 사건 당시 국군 통역장교를 지냈으며 1957년 합동통신을 시작으로 국제부 기자생활을 했다.

 언론인으로서 민주화에 앞장서며 1961년부터 5·16 쿠데타에 반대하는 글을 외지 ‘뉴 리퍼블릭’에 기고했다. 1964년 UN의 남북한 동시 초청을 기사화,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풀려나기도 했다.

 1965년 조선일보 기자, 1972년부터는 한양대 교수로 일했다. 교수 재직 중 1970~80년대 대학생들의 필독서 격인 ‘전환시대의 논리(1974)’, ‘우상과 이성(1977)’, ‘8억인과의 대화(1977)’, ‘베트남 전쟁(1985)’, ‘역정(1988)’ 등을 내놓았다.

 박정희 정권 시절 해직과 복직을 오간 리 교수는 1977년 ‘8억인과의 대화’가 중국공산당을 미화했다는 이유로 반공법 위반이 적용돼 감옥으로 갔다. 1987년에는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대 교환교수로 재직하다 한겨레 신문의 이사 겸 논설위원이 됐다.

 1989년에는 한겨레 신문의 방북취재를 기획,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투옥됐다가 특사로 석방됐다. 1995년 한양대에서 퇴임한 리 교수는 이후 뇌졸중으로 투병하다 다시 일어섰다.

 리 교수의 사회적 활동과 진보적 발언에는 쉼표가 없었다. 2005년 신창균통일장 장례위원회 지도위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2006년 제1회 단재언론상, 2007년 제9회 한겨레통일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서울 신촌 세브란스 병원, 발인 8일 오전 6시. 02-2227-8401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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