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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찬가 대신 민초의 진혼곡…잠비나이가 육화(肉化)한 '적벽'

등록 2026.03.06 17: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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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7~28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공연 리뷰

음악감독 이일우, '적벽가' 이면 재해석

거문고 철성(鐵聲) 압권…사운드

[서울=뉴시스] 잠비나이 '적벽'. (사진 = Shin-joong Kim 제공) 2026.03.06.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잠비나이 '적벽'. (사진 = Shin-joong Kim 제공) 2026.03.06.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예술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치열한 지점은 해석이 아니라 '현현(顯現)'이다. 텍스트의 속뜻을 헤아리는 '이면(裏面)'의 단계를 넘어, 그 해석이 기어코 연주자의 손끝을 찢고 나와 물리적 질량을 획득할 때 관객은 비로소 그것을 '체험'이라 부른다.

지난달 27~28일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펼쳐진 전통 음악 기반의 포스트 록 밴드 '잠비나이'의 신작 '적벽'은 70분간의 러닝타임 내내 관객을 소름 끼치는 전장 한복판으로 밀어 넣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신작'을 통해 선보인 이 작품은 단순한 공연을 넘어선, 삼국지라는 거대한 서사가 소리와 빛을 입고 '육화(肉化)'되는 과정이었다.

판소리 다섯 바탕 중 가장 장대한 서사를 가진 '적벽가'는 포스트 록의 거친 질감과 만나 비로소 제 짝을 찾은 듯 보였다. 심은용의 거문고가 압권이었다. 빽빽한 밀도로 몰아치는 거문고의 철성(鐵聲)은 감정의 장식이 아니라, 전장을 가로지르는 병장기의 서늘한 금속음 그 자체였다. 진보적이고 공격적인 그 타격감은 무대 위에 견고한 사운드의 건축물을 세웠다. 여기에 김보미의 해금은 비명처럼 울부짖으며 전장의 비극을 배가시켰다.
[서울=뉴시스] 잠비나이 '적벽'. (사진 = Shin-joong Kim 제공) 2026.03.06.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잠비나이 '적벽'. (사진 = Shin-joong Kim 제공) 2026.03.06.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적벽'의 설계자인 음악감독 이일우는 피리와 태평소, 일렉 기타를 오가며 오감을 자극했다. 특히 그의 피리 연주 위로 화살이 비처럼 쏟아지는 영상과 조명 연출은 '사운드의 조형성'과 '조명의 사운드성'이 무엇인지를 증명했다. 조명을 박현정(봄라이팅)의 씨줄과 날줄을 섞은 거 같은 촘촘한 구성력이 돋보였다.

 베이스 유병구와 드럼 최재혁의 리듬 섹션은 거대한 파도처럼 무대를 지탱했고, 소리꾼 오단해의 판소리는 이야기의 전달자를 넘어 그 자체로 하나의 날카로운 악기가 돼 거들었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 작품이 견지하는 '윤리적 태도'다. 잠비나이의 '적벽'은 단언컨대 영웅을 찬미하지 않는다. 조조의 오만이나 제갈공명의 신묘한 지략 뒤에 가려진, 이름 없이 스러져간 백성과 군사, 여인들의 '한(恨)'에 렌즈를 맞춘다.

제갈공명이 불러온 동남풍이 과학인지 주술인지는 중요치 않다. 전장에 끌려 나온 민초들에게 그것은 그저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무자비한 불일 뿐이다. 화공(火攻)으로 펄펄 끓는 무대 위에서 핏빛 전투는 아수라장이 되고, 마지막에 남은 것은 덧없는 인생을 닮은 거대한 양의 재뿐이다.
[서울=뉴시스] 잠비나이 '적벽'. (사진 = Shin-joong Kim 제공) 2026.03.06.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잠비나이 '적벽'. (사진 = Shin-joong Kim 제공) 2026.03.06.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타인의 고통을 함부로 흉내 내는 것이 기만이라면, 잠비나이는 차라리 그 고통의 물성 속으로 스스로를 던져 넣기를 택한다. 화려한 영웅서사의 이면에서 신음하던 망자들을 위해 소리의 물성으로 울부짖는 것. 그리하여 이 공연은 유비·관우·장비 그리고 제갈공명의 승전보가 아닌, 거대한 전장의 틈바구니에서 죽어간 이들을 위한 지독하게 아름다운 '진혼곡'이 된다.

가짜를 통해 진짜보다 더 압도적인 사실을 들이미는 순간이 공연이다. 관객은 영웅들의 서사보다, 한 줌의 재로 변해가는 인간 본연의 허무를 목격했다. 잠비나이는 그렇게 판소리의 이면을 거문고의 철성과 피리의 숨결 등으로 형상화한다. 우리 시대 잃어버린 '공감의 윤리'가 소리로 우리를 찾았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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