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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닦이도 민주화 짓밟는 군홧발에 맞섰다[민중의 5·18]<상>

등록 2024.05.12 08:00:00수정 2024.05.12 08: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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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닦이 행불자 유해, 무명열사 묘역서 40여 년 만에 발견

"직업자활기관 소속 극빈층 청년들도 항쟁 동참" 증언 다수

기층민중 항쟁 실태 연구는 '희소'…"체계적 조사·평가 필요"

[서울=뉴시스] 박태홍 기자 = 광주 금남로 일대에서 시민군과 계엄군 사이에서 유혈 충돌이 벌어진 1980년 5월 21일(부처님오신날) 봉축탑이 서 있는 전남도청 앞 분수대 광장에서 연일 민주항쟁 범시민궐기대회가 열리고 있다. 총탄에 찢기고 부서진 봉축탑이 그날의 혈전을 말해주는 듯하다. 박태홍 뉴시스 편집위원이 1980년 당시 한국일보 사진기자로 재직 중 5·18 광주 참상을 취재하며 기록한 사진을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에 즈음해 최초로 공개한다. (사진=한국일보 제공) 2020.05.17. hipth@newsis.com

[서울=뉴시스] 박태홍 기자 = 광주 금남로 일대에서 시민군과 계엄군 사이에서 유혈 충돌이 벌어진 1980년 5월 21일(부처님오신날) 봉축탑이 서 있는 전남도청 앞 분수대 광장에서 연일 민주항쟁 범시민궐기대회가 열리고 있다. 총탄에 찢기고 부서진 봉축탑이 그날의 혈전을 말해주는 듯하다. 박태홍 뉴시스 편집위원이 1980년 당시 한국일보 사진기자로 재직 중 5·18 광주 참상을 취재하며 기록한 사진을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에 즈음해 최초로 공개한다.  (사진=한국일보 제공) 2020.05.17.  [email protected]




44년 전 오월 광주 대동세상에는 이름 없는 민초(民草)가 있었다. 이들은 5·18민주화운동에 동참했고 최후까지 시민군 곁을 지켰다. 살아남은 이들은 희생자를 염하는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구두닦이, 넝마주이로 당대에도 홀대·멸시 받던 이들은 '이름도 없이' 잊혀져 갔다. 이들의 항쟁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을 뿐, 정확한 역할·행적은 여태 제대로 밝혀진 적 없다.

항쟁 이후 상당수는 행적조차 알 수 없고, 살아남은 이들은 오해와 멸시 속에서 제대로 된 평가와 보상도 받지 못했다. 엄연한 주권자로서의 저항권 행사를 주저하지 않았던 민초들을 재조명, 빈부·신분을 떠나 '모두의 5·18'로서의 항쟁 의의를 되짚어 본다. <편집자주>

[광주=뉴시스]이영주 기자 = 1980년 5월 열흘 간의 핏빛 항쟁에 나섰던 기층민중의 국가폭력 피해 사실이 공식적으로 드러났다. 5·18 시위 참여 10대 구두닦이의 유해가 행방불명 40여 년 만에 무명열사 묘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이름 없이 잊혀져 간 기층민중의 정확한 행적·역할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12일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조사위)에 따르면, 조사위는 지난 2022년 국립 5·18민주묘지 내 무명열사 묘소 4-93에 안치돼 있던 유해가 당시 구두닦이로서 항쟁에 참여했던 고(故) 김재영(당시 17세) 군이라고 진상 규명했다.

무명열사 안장 유해에서 확보한 유전자 정보(DNA)가 김 군의 생존 가족과 일치한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행방불명 42년 만에 가족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1963년 전남 화순에서 태어난 김 군은 부모를 여의고 광주 금남로 일대에서 구두닦이로 일했으며 1980년 5월 21일 시위 참여 이후 소식이 끊겼다.

조사위는 김 군의 행적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기층민중, 특히 극빈층도 항쟁에 적극 참여한 사실을 확인했다. 구두닦이였던 김 군의 생전 행적에 대한 진술들을 종합하는 과정에서 항쟁 당시 기층민중의 역할이 조금씩 드러났다.

[서울=뉴시스] 박태홍 기자 = 1980년 5월 24일 전남도청 앞 금남로에서 사망한 시민군의 운구 차량이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동하고 있다. 박태홍 뉴시스 편집위원이 1980년 당시 한국일보 사진기자로 재직중 5·18 광주 참상을 취재하며 기록한 사진을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에 즈음해 최초로 공개한다. (사진=한국일보 제공) 2020.05.17. hipth@newsis.com

[서울=뉴시스] 박태홍 기자 = 1980년 5월 24일 전남도청 앞 금남로에서 사망한 시민군의 운구 차량이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동하고 있다. 박태홍 뉴시스 편집위원이 1980년 당시 한국일보 사진기자로 재직중 5·18 광주 참상을 취재하며 기록한 사진을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에 즈음해 최초로 공개한다.  (사진=한국일보 제공) 2020.05.17.  [email protected]



김 군은 1980년대 당시 고아 또는 가출 청년들에게 숙식·교육과 함께 일감까지 주는 자활 지원 기관인 'BBS직업전문학교'(BBS) 소속이었다.

BBS는 남구 사동을 거점으로 북구 임동·동구 학동 등지에 분소를 두고 있었으며, 1곳당 100명 이상 원생이 모였다. BBS는 형편이 어렵고 배우지 못한 청년들에게 식사와 머물 곳을 제공하고, 간단한 직무 교육까지 마치면 정해진 구역 내 구두닦이, 신문팔이 등을 맡겼다.

학동 BBS에 다닌 김 군은 옛 무등극장 주변에서 일하다 시위에 참여했다. 김 군처럼 시위에 참여했던 BBS 출신은 10명 안팎이 생존해 있는 것으로 잠정 집계된다.
    
김 군처럼 사회에서도 괄시받았던 계층이 5·18 항쟁에 참여했다는 기록은 극히 드물뿐더러,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바 없다. 일부 구술집과 증언을 통해 겨우 항쟁 참여 사실 정도가 전해질 뿐, 정확한 가담 규모와 자세한 역할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도 사실상 전무하다.

5·18 10주기 기념 구술집 '광주 5월민주항쟁민주사료전집'에서 증언자 박내풍씨는 당시 구두닦이로서 시위에 참여한 자신의 일화를 소개한 바 있다.

박씨는 5월 19일 처음 사체를 봤을 때의 심정, '같은 민족끼리 이럴 수 있나' 하며 느꼈던 분노감, 사체 수습에 자진 참여했던 경험, 5월 27일 최후 항전 당시 계엄군에 연행됐던 사실을 구술했다.

같은 책에서 윤재균씨도 5월 28일 상무대에서 겪은 일화를 통해 구두닦이의 항쟁 참여 사실을 간접적으로 밝혔다. 당시 고초를 겪던 그는 '군인들이 구두닦이에게 구두를 닦는 시늉을 시켰다'고 진술했다.

다만 전집 속 구술자 499명의 증언에도 김 군과 같은 사회 극빈층의 시위 활동상을 언급한 사례는 많지 않다.

한 학술 논문('5·18 항쟁 증언에 나타난 기층민중의 생활과 경험'·이종범·2004년 발간)에선 5·18 항쟁 기간 중 기층민중의 역할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배경을 "민주화를 위한 실천 의지나 전술적 고려가 앞섰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저자는 논문에서 "그동안 '누가 항쟁을 이끌었는가' 하는 문제를 계급 분석론·사회 운동론 시각으로 예단한 경향이 있었다. 그들(기층민중)이 어떻게 살았는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에 대한 분석이 없다"고 주장, 항쟁 참여자들에 대한 면밀한 조사 필요성을 강조했다.
[장성=뉴시스] 이영주 기자 = 지난 2월 27일 전남 장성군 한 폐가에 1987년 당시 천주교광주대교구정의평화위원회가 제작한 5·18민주화운동 기록 비디오 '광주 의거 자료 3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이 먼지 쌓인 채 버려져있다. 2024.05.10. leeyj2578@newsis.com

[장성=뉴시스] 이영주 기자 = 지난 2월 27일 전남 장성군 한 폐가에 1987년 당시 천주교광주대교구정의평화위원회가 제작한 5·18민주화운동 기록 비디오 '광주 의거 자료 3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이 먼지 쌓인 채 버려져있다. 2024.05.10.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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