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일기' 양촌리 김 회장으로 마음 일군 22년…최불암이라는 영원한 '그린벨트'
등록 2026.10.30 06:49:00수정 2026.10.30 06:58:24
서른아홉 청년이 빚어낸 예순다섯의 굽은 등과 삼킨 웃음 '파하~'
김혜자와의 부부 착시부터 '금동이'서 싹튼 40년 초록우산까지
시대 결핍을 품어 안은 거목
![[서울=뉴시스] 전원일기 최불암. (사진 = MBC 유튜브 캡처) 2026.10.30.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https://img1.newsis.com/2026/10/30/NISI20261030_0002278085_web.jpg?rnd=20261030063219)
[서울=뉴시스] 전원일기 최불암. (사진 = MBC 유튜브 캡처) 2026.10.30.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색소폰 연주자 김원용의 소프라노 색소폰 선율이 안방극장에 번져나갈 때면, 흩어졌던 온 가족은 홀린 듯 텔레비전 앞으로 모여앉았다.
1980년 10월21일 첫 방송을 시작해 2002년 12월29일 막을 내리기까지 22년 2개월 동안 1088회를 이어간 MBC TV '전원일기'. 29일 87세를 일기로 별세한 배우 최불암(본명 최영한)이 분했던 '양촌리 김 회장'은, 급격한 산업화와 해체되는 공동체의 파고 속에서 한국인의 정체성과 서민의 정서를 묵묵히 지탱해 준 '마지막 그린벨트'였다.
처음 김 회장의 옷을 입었을 때 최불암의 나이는 불과 마흔 언저리였다. 극 중 예순다섯 노인의 굽은 등허리와 세월의 무게를 체현하기 위해 그는 걸음걸이와 분장, 의상 하나까지 스스로 연구하며 제 몸을 깎아냈다.
스물일곱에 드라마 '수양대군'의 노년 김종서로 발탁된 이래 그에게는 배우로서 누려야 할 '청년기'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 나이를 20년 이상 앞서간 그 지독한 노역(老役)의 수련은, 질박한 옹기그릇처럼 깊고 단단한 한국적 가장의 원형을 빚어내는 밑거름이 됐다.
![[서울=뉴시스] 전원일기 김혜자, 최불암. (사진 = MBC 유튜브 캡처) 2026.10.30.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https://img1.newsis.com/2026/10/30/NISI20261030_0002278087_web.jpg?rnd=20261030063317)
[서울=뉴시스] 전원일기 김혜자, 최불암. (사진 = MBC 유튜브 캡처) 2026.10.30.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극 중 아내로 호흡을 맞춘 배우 김혜자와의 연기는 가상과 현실의 경계마저 무너뜨렸다. 22년간 한 방을 쓰며 일상을 나눈 두 사람의 모습이 워낙 자연스러웠던 탓에, 시청자들은 물론 주변 지인들까지 "낮에는 김혜자와 살고 밤에는 김민자와 사느냐"고 짓궂은 농을 던질 정도였다. 집에서 TV를 보던 고인에게 실제 아내인 배우 김민자가 "허리 좀 펴고 앉으라, 영락없는 양촌리 김 회장 같다"며 면박을 줬다는 일화는, 그가 얼마나 철저히 배역 속으로 걸어 들어가 살았는지를 방증한다.
김 회장이 구현한 도덕률과 가부장적 권위는 때로 냉혹한 사회 현실과 아득한 거리를 두기도 했다. 1980년대 군사정권의 서슬 퍼런 현실과 농촌 경제의 쇠락, 1990년대 신세대의 개인주의와 부딪치며 생겨난 이 괴리감은 역설적이게도 1990년대 초반 대중문화계를 강타한 '최불암 시리즈'라는 유머 신드롬으로 승화됐다. 젊은 세대는 권위의 무게를 털어낸 해학 속에서 김 회장을 소비하며, 그를 '엄격한 가부장'에서 '스스럼없이 껴안을 수 있는 서민의 벗'으로 다시 호명했다.
무엇보다 김 회장은 배우 최불암의 삶 자체를 뒤흔든 윤리적 거울이었다. 1981년 장터에서 동냥하던 고아 '금동이'를 거두어 자식으로 입적시키는 에피소드가 방영된 뒤 전국에서 격려 편지가 쏟아지자, 그는 덜컥 깊은 부끄러움에 사로잡혔다. "작가가 쓴 대본대로 흉내 냈을 뿐인데 세상이 나를 영웅으로 대하니 위선자가 된 것 같았다."
![[서울=뉴시스] 고(故) 최불암. (사진=최불암 측 제공) 2026.10.30.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https://img1.newsis.com/2026/10/30/NISI20261030_0002278064_web.jpg?rnd=20261030015942)
[서울=뉴시스] 고(故) 최불암. (사진=최불암 측 제공) 2026.10.30.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생전 고인은 '전원일기'에 대해 "농사짓는 법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데 무엇이 소중한지 일깨워 준 드라마"라며 "시청자의 정서를 일구는 '마음 농사'를 지은 셈"이라고 회고했다.
말을 아끼고 속으로 삭이며, "표현 못 하고 산 게 한이다"라는 회한 속에서도 끝내 가족과 세상의 울타리가 돼줬던 양촌리 김 회장. 급변하는 문명의 파고 속에서 길을 잃을 때마다 우리가 고향처럼 찾아가 기대어 울던 그 너른 등판은, 최불암이라는 거목이 우리 대중문화사와 한국인의 가슴속에 남긴 가장 따뜻한 결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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