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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언의 책과 사람들] 친일·월북…어느 영화평론가의 기록

등록 2022.08.27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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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북조선기행 (사진=한상언 영화사가 제공) 2022.08.23.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북조선기행 (사진=한상언 영화사가 제공)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식민지시기 조선영화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영화평론가가 있었다. 바로 서광제이다. 당시 영화에 관한 가장 많은 글을 썼던 그는 단성사 선전부장 이구영처럼 매주 새롭게 상영되는 영화를 소개하던 영화관 선전부 소속도 아니었고, 마치 외도를 하듯 영화에 대해 단평을 쓰던 대부분의 문학평론가와도 달랐다. 오로지 영화에 대한 글을 썼고, 그것으로 필명을 떨쳤다.

전당포를 운영하던 부친 덕에 부유한 생활을 영위했던 그는 당대의 모던보이기도 했다. 테니스를 즐겼고, 자동차를 몰며 시내를 누볐다. 전문학교를 다니며 영화에 뜻을 두고 있던 그는 조선영화예술협회 연구생으로 참여하며 알게 된 문학가 윤기정을 통해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에 가입한다. 이는 그가 프롤레타리아 계통의 영화평론가가 되는 계기였다.

조선영화예술협회의 연수기간이 끝나고 연구생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영화 ‘유랑’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배역을 맡아 연기를 했지만 영화배우가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바로 영화평론이었다. 그가 소속했던 카프 영화부의 윤기정, 임화, 김유영, 강호, 추민 등 여러 영화인들도 영화에 대한 글을 썼다. 하지만 그처럼 꾸준하고 오랫동안 그리고 엄청나게 많은 수의 영화 글을 쓴 사람은 없었다.

전업 영화평론가였지만, 그의 마음 한 구석에는 영화를 만들고 싶은 생각이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영화감독 이규환 등과 성봉영화원을 만들었고, 직접 영화를 연출할 기회를 얻게 되자 주저 없이 메가폰을 잡았다. 시대의 변화에 민감한 평론가였기에 그랬을까? 중일전쟁이 터진 직후 전쟁 수송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철도를 소재로 한 영화 ‘군용열차’를 만들어 당시 일제의 대륙침략에 동조했다. 이 영화는 최초의 친일영화로 기록됐으며 서광제는 누구보다 먼저 일제의 침략전쟁에 동조하는 영화를 만든 인물로 기억됐다.

해방 후 서광제는 새로운 길을 향해 간다. 1946년 창간된 독립신보의 편집인이 된 그는 영화계에서 한발 떨어져 신문계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1948년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한 김구의 수행기자단의 일원으로 북한을 방문 후 ‘북조선기행’이라는 선전용 기행문을 출간했다. 그 직후 북한으로 간다.

천안 책방 노마만리에서는 8월12일부터 15주 동안 이어지는 영화 강좌를 시작했다. 이를 기념해 책방 1층 서가를 영화책으로 채웠다. 1935년에 나온 영화 잡지 ‘영화시대’를 비롯해 1950-60년대 발행된 영화잡지와 각종 시나리오, 영화인들의 기행문까지 두루두루 흥미로운 것들이 가득하다. 이중에는 서광제가 쓴 기행문인 ‘북조선 기행’도 있다. 특히 이 책에는 서광제의 친필 사인이 들어있어 보다 더 의미가 있다. ‘야담’의 발행인이었던 문학가 임경일에게 사인해 전해 준 이 책은 그의 월북 직전 남한에서의 마지막 흔적이다.

그의 북한 생활을 평탄치 않았던 것 같다. 그는 북한에서도 과거 식민지시기처럼 영화 관련 일을 했다. 시나리오 창작사 작가로 있으며 기록영화 시나리오를 썼고, 각종 잡지에 영화관련 글을 투고했다. 그러던 중 당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표현했다가 전쟁 발발 전 숙청됐다고 전해진다. 그래서인지 북한에서 그는 이색분자 혹은 주책바가지로 불릴 뿐 어떻게 생을 마감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한상언 영화연구소대표·영화학 박사·영화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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