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휴진·국시거부에 '백기' 든 정부…법까지 개정 구제 최악 선례
복지부, 내년 의사 국가시험 상·하반기 2회 실시키로
1월말 시험, 본과 4학년만 응시…사실상 재응시 기회
11월까지 재응시 기회 부여 난색…"공정성·국민 여론"
3차유행 장기화에 "국민 생명·안전에 위험 발생 우려"
[서울=뉴시스] 박미소 기자 =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본과 4학년 학생의 약 80%가 의사 국가시험(국시) 거부 단체행동 중단한다고 밝히면서 의대생들이 공식적으로 의사 국시 재응시를 요구하고 나설지 주목되는 10일 오후 한 관계자가 서울 광진구 한국보건의료인국가시험원 본관에 들어가고 있다. 정부는 의과대학생들이 의사 국가시험을 스스로 거부하고 있는 상황에서 추가 시험 등은 가능하지 않다는 입장이다. 2020.09.10. [email protected]
그간 공정성이나 다른 국가시험과의 형평성, 국민 여론 등을 이유로 추가 응시는 어렵다던 정부는 결국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3차 유행 장기화에 따른 의료인력 부족 위기에 시행령까지 개정해가며 기회를 제공, 최악의 선례를 남겼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필수분야 적정 인력 확보 등 의사 증원이 불가피한 상황에 정부가 의료계 집단행동에 잇따라 속수무책인 모습을 보이면서 공공의료 강화라는 성과를 얻을 수 있을지 미지수다.
31일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내년 의사 국가시험 실기시험은 상·하반기 2회 실시된다. 이중 상반기 시험은 1월 말 시행된다.
이 같은 결정이 올해 의대 정원 확대와 공공의료전문대학원 신설 등 정부 보건의료정책에 반대하며 올해 국가시험을 거부한 의대생들에게 재응시 기회를 주는 구제책이 아니냐는 지적에 복지부는 "재응시 기회나 구제가 아닌 내년도 실기시험 실시"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1월 말 시험에는 올해 실기시험에 응시하지 않은 현재 의과대학 본과 4학년 2700여명만이 응시가 가능하다. 본과 3학년으로 내년도 국가시험을 치르는 3200여명은 예년과 같이 하반기에 실기시험을 치르게 된다.
이로써 의대생 피해 최소화를 위해 의사 국가시험 실기시험 일정을 9월8일로 1주 연기하고 대한의사협회와 의정협의체 구성과 집단휴진 중단 등을 협의한 9월4일에도 재접수 기한을 6일까지로 이틀 더 연장하는 등 2차례 기회 제공에도 거부했던 의대생들은 내년 1월 말 추가 기회를 얻게 됐다.
심지어 복지부는 의대생들이 시험을 1월 말에 치르고 공보의 등을 신청할 수 있도록 시행령과 관련 규정까지 손보기로 했다.
의료법 시행령에선 의사 국가시험을 매년 1회 이상 시행할 수 있도록 하되 시험 실시 90일 전까지 관련 사항을 공고하도록 하고 있다. 1월 말까지 한달밖에 남지 않아 시험을 치르려면 시행령을 개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창준 복지부 보건의료정책관은 "의료법 시행령에는 90일 전에 공고하도록 강행규정으로 돼 있기 때문에 내년에 실기시험을 1월에 시행하기 위해 의료인력의 긴급한 충원이 필요한 경우에는 공고기간을 최대한 단축할 수 있도록 하는 규정으로 개정하려고 한다"며 "오늘(31일) 중으로 입법예고를 해서 1월12일 자로 공고가 나갈 수 있도록 입법절차를 간소화해 공고하는 데 문제가 없도록 조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군 복무를 대신하는 공중보건의사에 지원하려면 내년 2월10일까지 이를 신청해야 한다. 그러나 1월 말부터 실기시험이 시작되면 2월10일 내에 합격 후 지원하는 건 불가능하다. 이에 복지부는 국방부, 병무청 등에 협조를 구해 공보의 지원 기간을 합격자 발표 이후 일정 기간으로 개정하는 방안을 추진한다.
추가 응시 기회를 거부한 의대생들에 대해 그동안 정부는 공정성과 국민 여론 등을 이유로 들며 난색을 보여왔다.
지난 10월8일 당시 박능후 복지부 장관은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정부가 1년에 수백개씩 치르는 국가시험 중 어느 한 시험만 예외적으로, 그것도 사유가 응시자에 의해 거부된 뒤 재응시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어려운 문제"라며 다른 국가시험과의 공정성·형평성에 따라 추가 응시가 어렵다는 입장을 표했다.
이후 의대생들에게 추후 재시험 기회를 부여해선 안 된다는 국민청원에 청와대 류근혁 사회정책비서관은 10월23일 "추가적인 기회 부여에 대해서는 이미 2차례 재접수 기회를 부여한 점, 현재 의사 국가고시 실기기험이 진행되고 있는 점, 실기시험 이후 다른 직역 실기시험 일정, 국민 수용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할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같은 입장에는 12월 들어 변화가 생겼다.
정세균 국무총리는 이달 20일 오전 KBS 1TV '일요진단 라이브'에 출현해 "조만간 현실적인 필요나 지금 처해있는 코로나 상황까지 감안해서 아마 조만간 정부의 결정이 있을 것이다. (부정적이었던) 국민 여론도 좀 바뀌는 것 같다"며 국시 미응시 의대생 구제 가능성을 내비쳤다.
결국 의대생들은 국가시험 거부 5개월이 채 안 돼 사실상 재응시 기회를 얻게 됐다.
이처럼 정부 입장이 바뀌게 된 건 코로나19 3차 유행 장기화에 따른 의료 인력 부족이 주된 원인으로 풀이된다.
11월 초까지만 해도 정부는 의대생 국가시험 거부로 내년 1~2월 대형병원 인턴 수급과 2월 제대로 인한 3~4월 공보의 충원이 어려울 수 있다면서도 민간 의료기관 등이 없는 지역부터 공보의를 배치하는 방식으로 풀어나갈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후 11월 중순이 지나면서부터 시작된 3차 유행이 12월 마지막날인 이날까지 정점을 알 수 없는 상태로 계속되면서 의료인력 부족 문제가 심각해졌다는 게 정부 판단이다.
이기일 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은 이날 "응급환자 치료와 취약지 의료공백을 방치해서는 아니 되며 코로나 상황에서도 단 1명의 생명이라도 살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정부의 책임이자 의무"라며 "신규 의사 2700명의 공백이 생기고 공중보건의 380명이 부족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공중보건의는 공공의료기관과 취약지에 필수의료를 담당하고 있어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국민들의 생명과 안전에 실질적인 위험이 발생할 수 있는 점도 고려했다"고 1월 말 국가시험 실시 배경을 설명했다.
재응시 기회 부여가 어려운 이유 중 하나였던 국민 여론과 관련해선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의료진들의 피로도가 날로 심화되고 있고 공공의료 분야의 필수의료인력에 대한 필요성도 날로 증가하고 있는 추세"라며 "이런 것을 감안할 때 국민들의 공감대는 어느 정도 인정됐다"고 말했다. 정부 차원의 여론조사는 없었지만 국민 여론이 달라졌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로써 7월 정부의 의대 증원 확대와 공공의료전문대학원 신설 등에 반대하며 시작된 의료계 집단 휴진과 의사 국가시험 응시 거부 사태는 주요 보건의료정책에 대해 정부가 의료계와 사전 협의하는 의정 협의체 구성과 추가 시험 기회 제공으로 일단락되는 모양새다.
그 결과 더불어민주당과 복지부가 당정협의를 통해 7월23일 내놨던 2022학년도부터 최대 400명씩 10년간 4000명 의대 증원 확대 계획은 이제 3차례 회의를 진행한 의정 협의체 합의 전까지 사라지게 됐다.
문제는 앞으로 의료인력 추가 확보가 불가피한 시점에서 의료계 집단행동에 사실상 백기를 든 정부가 협상력을 지닐 수 있느냐다.
정부는 이번 결정은 "코로나19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특별한 조치"라며 "앞으로 단체로 시험을 거부했을 경우 결코 같은 방법으로 대처하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국민 생명과 직결된 의료계의 집단행동에 대한 제도적인 보완은 없는 상태다.
이달 13일 정부가 발표한 '감염병 효과적 대응 및 필수의료 지원을 위한 공공의료체계 강화 방안'에서도 지방의료원 병상 확보 등에 따른 의사 인력 확충 방안은 의정 협의체에서 별도 논의해 결정하기로 했다. 당장 정부의 정책 발표 단계에서 인력 확보 방안조차 내놓지 못한 꼴이다.
이기일 보건의료정책실장은 "이번 의사국가고시로 관련해서 국민 여러분께 혼란과 불편을 끼쳐드린 점을 매우 죄송하다"며 "공공의료를 확충하고 또 한편으로는 코로나를 잘 대응해 국민에게 보다 편한 보건의료 환경을 만들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