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스아이즈]정치명가-국무총리·왕비 최다배출한 청주 한씨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재임 시 임명된 37대 한명숙 총리, 38대 한덕수 총리, 이명박 정부의 첫 총리인 39대 한승수 총리는 모두 청주 한씨다.
한국 정치에서 청주 한씨가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으로 불리는 국무총리를 3회 연속 차지하는 진기록을 세운 셈이다.
특히 한덕수 전 총리와 한승수 전 총리의 경우 돌림자가 ‘수(洙)’자로 같고, 똑같이 국무총리와 주미대사를 지내 더욱 눈길을 끈다.
같은 성씨가 연속으로 총리직에 오른 최장 기록은 김영삼 정부 시절 26대 이회창 총리, 27대 이영덕 총리, 28대 이홍구 총리, 29대 이수성 총리로 이어지는 이씨 총리다.
하지만 이회창·이홍구 전 총리는 본관이 전북 전주, 이영덕 전 총리는 강원도 평창, 이수성 전 총리는 경기 광주로 각각 다르다.
현재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을 맡고 있는 한명숙 전 총리는 노무현 정부 당시인 2006년 국무총리로 임명돼 내각을 이끌었고,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맡기도 한 대표적 친노인사다.
1944년 평안남도 평양 출생인 그는 이화여대 불문과를 졸업한 후 동 대학원에서 여성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어 여성민우회장과,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 환경연합지도위원 등으로 활발한 사회생활을 하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인 2000년 16대 국회에 입성했다.
초선 의원이었던 2001년 1대 여성부 장관을, 2003년 환경부 장관을 각각 역임했다. 2004년에는 열린우리당 소속으로 17대 총선에서 배지를 달아 여의도에 입성했다.
노무현 정부에서는 신행정수도건설특별위원회 위원장, 국무총리 등을 지내며 ‘세종시’ 건설을 주도했다. 박근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과 함께 여성 대통령군으로 꼽힌다.
한승수 전 총리는 풍부한 국정운영력과 정치력으로 30여년간 5개 정권에서 꾸준한 신임을 얻으며 각종 요직에서 활발한 활동을 해왔다.
1936년생인 한 전 총리는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거쳐 영국 요크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로 활동하다 전두환 정권인 1987년 상공부 무역위원회 초대위원장으로 관계에 발을 들였다.
이후 그는 노태우 정권에서 상공부장관을, 김영삼 정부에서 주미대사와 대통령 비서실장, 재경원장관(부총리)을, 김대중 정부에서는 외교통상부 장관을 지냈다. 13·15·16대 국회의원도 역임했다.

한승수 전 총리의 부인은 박근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의 이종사촌 언니인 홍소자 여사이다. 사위는 한나라당 김세연 의원이다.
한덕수 전 총리 역시 한명숙 전 총리와 함께 대표적인 노무현정부 인사로 꼽힌다. 1949년생으로 전라북도 전주 출신이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와 1970년에 행정고시 8회로 관계에 입성했다.
대통령 비서실 경제비서실 통상산업비서관, 특허청장, 통상산업부 차관, 통상교섭본부장,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대표부 대사 등 통상 전문가의 길을 걸었다.
청주 한씨는 조선시대 가장 많은 왕비를 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첫 부인 신의왕후, 세조의 장남인 덕동의 왕비인 소혜왕후(인수대비), 예종의 첫 왕비인 장순왕후, 계비인 안순왕후, 성종의 첫 왕비인 공혜왕후, 인조의 왕비인 인열왕후 등 모두 6명의 왕비가 청주 한씨다.
청주 한씨는 조선왕가와 사돈을 맺으면서 문과급 제자 315명, 상신 12명, 대제학 1명, 공신 24명을 배출한 조선 최고의 명문가로 성장했다.
이 과정에서 한확(1403~1456)과 한명회(1415~1487)가 큰 역할을 했다.
신의왕후(1337~1391)는 태조 이성계의 첫 부인으로, 2대 정조 이방과와 3대 태종 이방원을 낳았다.
4대 세종의 장자인 5대 문종의 뒤를 이어 6대 단종이 12살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이 때 왕권을 노리고 있던 왕의 숙부 수양대군(세조)에게 접근, 왕위찬탈을 적극적으로 도운 인물이 한명회였다.
7대 세조는 자신의 두 아들을 모두 청주 한씨 며느리에게 혼인을 시켰다. 장남 덕종은 좌의정을 지낸 양절공 한확(1403~1456)의 딸 소혜왕후(1437~1504)와 결혼했고, 차남 예종은 충성공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1445~1461)와 결혼했다.
한확의 누나는 명나라에 공녀로 들어가 당시 황제인 영락제의 후궁 한비(韓妃)가 된 인물이다.

한확은 15세 때인 1417년 명나라에서 광록시소경이라는 벼슬을 받았고, 조선왕실에서도 명과의 외교를 위해 소중한 존재가 됐다.
누이들을 통해 명 황실과 사돈을 맺은 한확은 조선 왕가와도 겹사돈을 맺었다. 4대 왕인 세종의 아들 계양군과 7대왕 세조의 장자인 덕종에게 자신의 두 딸을 시집보낸 것이다.
하지만 덕종이 20살에 요절하고, 한명회의 사위이자 세조의 차남 예종이 8대왕으로 즉위했다. 예종의 왕비 장순왕후는 17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장순왕후가 요절한 후 예종은 장순왕후와 10촌간인 양혜공 한백륜의 딸 안순왕후(1445~1498)를 들였다.
예종이 즉위 1년 만에 병사하자 덕종과 소혜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성종이 9대왕에 즉위했다. 소혜왕후는 30대 초반의 나이로 대비에 올랐다. 유명한 인수대비다.
청주 한씨 소혜왕후의 아들 성종은 즉위 직전 한명회의 딸이자 숙모인 장순왕후의 동생 공혜왕후(1465~1474)와 결혼했다. 하지만 공혜왕후는 자신의 언니처럼 19세의 어린나이로 요절했다.
장순왕후와 공혜왕후는 자매이지만 왕실에서는 시숙모와 조카며느리로 나란히 왕비가 됐다. 자매가 모두 왕비가 된 예는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 전무후무한 일로, 당시 한명회의 권세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케 한다.
인열왕후(1594~1635)는 16대 인조의 왕비로, 서평부원군 한준겸의 딸이자 효종의 모친이다.
청주 한씨는 최고 역사를 지닌 이른바 삼한갑족(三韓甲族·대대로 문벌이 높은 집안)이다. 한씨의 뿌리는 고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청주한씨세보’에 따르면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왕의 후대에 우성·우평·우량의 3형제가 있어, 각각 기씨·선우씨·한씨가 됐다고 한다. 청주 한씨의 시조 한란(韓蘭)은 기자의 후예인 우량의 원손(遠孫)이라는 것이다.
한말 을사조약을 끝까지 반대한 한규설, 3·1운동 당시 33인의 한 사람으로 활약했던 시인 한용운 선사 등도 청주 한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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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뉴시스 발행 시사주간지 뉴시스아이즈 제259호(1월9일자)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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