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초심잃은 장예모 감독, 남경대학살 영화 ‘진링의 13소녀’

난징대학살 당시 제네바조약에 의해 보호받은 서양인이 지은 윈체스터 대성당에 모여든 수녀원 학교의 소녀들과 홍등가의 창녀들, 잉글먼 신부를 장례 지내러온 미국인 장의사 존(크리스천 베일), 잉글먼 신부에게 입양된 중국인 고아소년 조지, 부상당한 소년병 등의 생존기를 담은 영화다. 상하이 출신 유명 여성작가 옌거링(55)이 2005년 발표한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했다. 진링은 난징의 옛 이름이다.
우선, 여전히 난징대학살이 날조됐다고 주장하는 일본에 대항해 세계적으로 유명한 중국 감독이 나섰다는 것이 같은 피해국민 입장에서 통쾌하다. 한국을 비롯, 점령지 여성들을 위안부로 강제동원한 사실을 부정하고 있는 일본 정부는 중일전쟁(1937~1945) 당시 수도인 난징에서 어른, 아이 가리지 않고 민간인을 학살하고 집단강간한 것도 부인하고 있다.
서방 선교사들와 언론인들의 증언, 아랫도리가 벗겨진 부녀자들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흑백사진과 일본군의 잔혹한 행위를 담은 필름들이 엄연히 존재하지만, 1937년 12월 난징 침공 후 6주간 30만~40만명을 죽이는 것이 가능하냐는 것이 일본 우익의 주장이다. 영어로 난징대학살을 알린 ‘난징의 강간’(국내 번역 제목 ‘역사는 힘있는 자가 쓰는가’)을 쓴 중국계 미국인 아이리스 장(1968~2004)은 일본 우익들의 끊임없는 협박과 괴롭힘에 못이겨 젊은 나이에 자살을 택하기도 했다. 감독과 주연의 국제적 유명세를 먼저 고려했겠지만, 어찌됐든 이 영화에 참여한 일본 스태프들과 와타베 아츠로(45) 같은 일본배우들의 결단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중국영화중 역대 최고인 1000억여원의 제작비를 들인 ‘진링의 13소녀’는 2011년 12월16일 난징대학살 74주기를 맞이해 중국에서 개봉, 단숨에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르며 중국인들의 호평을 이끌어냈다. 곧이어 뉴욕, LA, 샌프란시스코 등 미국 일부 지역에서 정식개봉했으나 현지 평단과 관객의 반응은 싸늘했다.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 후보에는 올랐지만, 아카데미상 외국어영화상 후보작에는 들지 못했다.
“아카데미를 통해 서구에 난징대학살을 알리고 싶다”던 장이머우 감독은 “서양인들은 난징대학살 사건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중국 영화와 중국 문화의 힘이 커지면 예술이라는 방식으로 세계의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역사를 알릴 수 있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이 영화에 대해 더 객관적으로 평가가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표했다고 전해진다.
또 하나의 의미는, 지금은 월드스타로 성장한 크리스천 베일(39)이 데뷔작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다시금 맡으며 향수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베일은 1987년 흥행의 귀재 스티븐 스필버그(67) 감독의 ‘태양의 제국’에서 상하이에 거주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으로 비화되는 중일전쟁 시 일본군의 침략으로 외국인수용소에 갇힌 영국인 꼬마 역을 맡으며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당시 4000대 1의 경쟁을 뚫고 주인공 짐 역을 맡은 베일은 만12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만큼 놀라운 연기를 펼쳤다.

니니(25)라는 여배우의 발견도 빼놓을 수 없는 성취다. 난징 태생의 니니는 ‘진링의 13소녀’의 여주인공인 기녀 모 역으로 데뷔한 ‘생짜’ 신인이다. 2007년부터 이 배역을 맡을 여우를 찾아온 장이머우 감독에게 발굴돼 2년간 영어를 비롯해 각종 연기수업을 비밀리에 받아왔다. 장이머우의 뮤즈로 발탁됐던 궁리(48), 장쯔이(34)처럼 세계적 스타 자리를 예약했고,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모 역으로 아시안필름어워드 신인연기자상, 상하이영화평론가회가 주는 최고여우상 등을 받으며 단숨에 주목받게 됐다.
청순함과 요염함을 두루 지닌 니니는 ‘진링의 13소녀’에서 상대역인 세계적 배우 크리스천 베일에게 밀리지 않는 연기로 뚜렷한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니니는 “영어가 내 모국어가 아닌 것을 배려해 잘 이끌어줬다”며 베일에게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수녀원 학교에 다녀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지만, 수녀원 학교 아이들과 같은 나이인 13세 때 양아버지에게 강간당한 후 사창가로 흘러든 모 역으로 중국 기녀의 전통적이며 기묘한 아름다움을 뽐낸다.
그 못지않게 영화는 백전노장의 노련함을 과시한다. 궁리의 영화데뷔작인 ‘붉은 수수밭’(1988)으로 베를린영화제 금곰상, 장쯔이의 데뷔작인 ‘집으로 가는 길’(1999)로 베를린영화제 은곰상, ‘홍등’(1991)으로 베니스영화제 은사자상, ‘귀주 이야기’(1992)와 ‘책상서랍속의 동화’(1999)로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인생’(1994)으로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 등 다 거론하기 숨찰 정도로 유수의 국제영화제를 휩쓴 장이머우다. 중국적 색채미와 화면미학, 매끄러운 이야기 흐름, 각자의 사연과 적절한 갈등, 로맨스 등이 그다지 흠잡을 데 없이 어우러졌다.
그럼에도, 지나치게 노회해 매너리즘에 빠졌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비극적 전쟁영화로서는 지나치게 작위적이고 감상주의적으로 흘렀다. 대중영합적이며 어용적이기도 하다. 영화는 상당히 드라마틱하나 무리한 치장과 과도한 영상미를 추구해 진정성이 떨어져 보인다. 전쟁통에서도 기녀들의 모습은 말끔하고, 슬로모션을 자주 사용한 감동적 영웅주의는 너무 구태의연하다. 총명해 보이는 검은 눈동자가 인상적인 리 소령(통따웨이)이 홀로 일본군 한 부대를 상대하는 것도 비현실적이다.
하지만 아웃포커싱으로 잔인한 장면을 선정적 볼거리로 치환하지 않은 절제미는 좀 갑갑하기는 하나 높이 살만하다. 실제 참상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시체의 여성기에 막대를 꽂아 훼손하고 윤간 후 잔인하게 살해하는 장면 등을 모두 담았다. 성당에 난입한 일본군들이 “처녀다”, “산 채로 잡아라”고 외치며 어린 여학생들의 머리채를 잡고 옷을 찢는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소녀들의 모습은 가슴을 아리게 한다. 존과 창녀들이 변화하고 희생하게 되는 과정도 영화적 재미를 잃지 않는다.

사실 중국에서는 친정권영화로 치부한 그에 대한 비난이 점점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진링의 13소녀’는 2011년 개봉한 중국영화 중 최고의 흥행성적을 거두며 제작비는 회수했지만, 대체 중국 돈으로 6억 위안이나 들인 이유를 모르겠다는 평이 많다. 크리스천 베일의 출연료와 할리우드 촬영팀을 영입해 전투신을 공들여 찍는데 사용했다는 해명이지만, 영화는 주로 성당 안을 배경으로 한다.
지난해에는 장이머우가 감독한 5분짜리 중국 철도부 홍보영상에 무려 1850만 위안(약 33억원)의 예산이 쓰인 것이 확인돼 공금횡령 스캔들에 연루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중국정부의 한 자녀 정책에 반해 4명의 여성 사이에서 7명의 자녀를 둔 것이 폭로되며 중국이 시끄럽다. 신인배우 허쥔(29)이 “장이머우가 숨겨둔 여성과 내가 서로 아는 사이라는 것을 알고 자신의 비밀이 탄로날까봐 ‘진링의 13소녀’에서 나를 제외시켰다”고 SNS에 주장하며 촉발됐다. 30세 연하의 천팅이라는 무용수와 사이에 3명의 아이를 낳고 비밀결혼식을 올렸다는 것이다.
한편 장이머우 감독은 자신의 첫번째 뮤즈이자 옛 연인인 궁리와 다시 손잡고 내년 5월 상영예정인 영화를 촬영 중이다. 그동안 찍어왔던 상업영화를 벗어나 소박하고 따뜻한 초기 스타일을 재현하겠다는 각오다. 제목도 ‘귀래(歸來)’다. 원래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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