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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백건우, 쇼팽의 숨겨진 아름다움을 찾아봐요

등록 2019.03.05 17: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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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건우 ⓒ빈체로

백건우 ⓒ빈체로

【서울=뉴시스】 이재훈 기자 = "제가 보기에 콘체르토, 소나타, 발라드, 스케르초 다 좋고 폴란드 대곡도 많지만 쇼팽이 하고 싶은 말은 야상곡(녹턴)에 있지 않나해요."

녹턴은 야상곡(夜想曲)으로도 불린다. 주로 밤으로부터 영감을 받고 작곡한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쇼팽의 녹턴은 밤의 몽환적이고 신비로우며 감성적인 기운을 머금었다.

피아니스트 백건우(73)는 5일 마포아트센터에서 왼손으로 턱을 괴고 여전히 소년 같은 얼굴로 말했다. "쇼팽을 가장 가깝게 그려보고 싶었고, 그래서 선택한 것이 야상곡이죠."

10년 만인 지난 2017년 9월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8차례에 걸쳐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2곡 전곡을 다시 연주하며 노익장을 과시한 백건우는 ‘베토벤 사이클’에 몰두하던 어느날 스튜디오에서 쇼팽 '녹턴' 악보를 훑어보면서 쇼팽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쇼팽의 야상곡이 새롭게 나타나더라고요. 그래서 '새로운 야상곡을 만들 수도 있겠구나'라는 기대감이 들었어요."

 처음에는 쇼팽에 의해 새로운 작품을 쓰는 작곡가를 생각했다. 그러다가 쇼팽으로만 초점이 맞춰지고, 쇼팽의 세계를 대변할 수 있는 곡이 무엇일까 연구하다가 야상곡으로 마무리됐다. 2013년 슈베르트 앨범 이후 6년 만인 이날 유니버설뮤직 그룹 산하 클래식음악 레이블 도이치 그라모폰(DG)을 통해 발매한 '쇼팽: 녹턴 전집'이 그 결과물이다.

지난해 9월 1주가량 통영국제음악당 콘서트홀에서 녹음했다. 통상적으로 배치하는 작품번호 순서가 아닌 백건우의 스토리텔링을 따랐다. "순서대로 연주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요. 연주하는 곡에서 다음 곡으로 넘어가면서 해당 곡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가 중요하죠."

피아니스트 백건우, 쇼팽의 숨겨진 아름다움을 찾아봐요

쇼팽의 녹턴은 백건우가 미국 줄리아드 음대 재학시절부터 연주한 곡이다. "훌륭한 곡인데 '아직까지 이해를 못하는구나'라고 생각할 때가 많았어요. 언젠가는 이 곡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서 늘 숙제로 남아 있었죠."

이번 앨범을 녹음하면서 백건우가 가장 신경 쓴 부분은 소리다. 녹턴의 선율은 쇼팽을 매료한 동시대의 이탈리아 오페라 명가수들이 구사한 '콜로라투라'와 '벨칸토 창법'을 흉내냈다는 평도 있다.

앨범의 내지 글을 쓴 음악평론가 다카쿠 사토루는 "백건우의 녹턴 연주에서 들리는 레가토(음과 음 사이를 끊지 말고 원활하게 연주하라는 표)는 완벽 그 이상이며 피아노에 의해 표현되는 벨칸토는 녹턴 녹음 사상 최고의 성과"라고 들었다. "쇼팽 녹턴의 소리는 무리하지 않고 울리는 소리에요. 그 소리가 노래를 부를 수 있어야 하고, 힘을 안 줘도 빛을 발할 수 있는 소리여야 하죠. 그것이 피아노에서 만들어져 나와야 하는 것이 첫 번째 숙제에요."

 날씨가 녹음 작업을 크게 좌우했다. "날씨가 흐려 피아노 소리가 침체된 상태에서 (소리를) 다시 살리는데 힘들었어요. 녹음 마지막날 햇빛을 받은 것처럼 소리가 나서 첫 번째에 녹음한 것을 나중에 다시 녹음하기도 했죠."

백건우는 쇼팽의 녹턴을 좀 더 파고들기 위해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가져온 악보를 사용하고 녹턴에 관한 책들을 탐독했다. 그리고 '핑거링'을 고심하게 됐다.

피아니스트 백건우, 쇼팽의 숨겨진 아름다움을 찾아봐요

"페달로 해결되는 것이 있고 핑거링으로 해결해야 할 것이 있어요. 쇼팽의 녹턴은 하면 할수록 핑거링의 중요성을 느껴요. 쇼팽 소리가 예쁜 이유는 피아노라는 악기의 굉장히 복잡한 음향을 잘 처리하기 때문이에요. 영어로 하면 '오버턴'(동시에 여러 음을 내는 일종의 배음(倍音))이라는 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따라 달라지죠. 단순히 멜로디만 듣기가 쉬운데 그 멜로디가 나오게끔 받쳐주는 왼손과 오른손의 핑거링 안에 쇼팽의 독특한 아름다움이 숨겨져 있어요. 그걸 살림으로써  소리가 나오게 되죠. 참 재미있는 작업이지만 쉽지 않은 작업이죠. 하하."

백건우는 쇼팽은 녹턴을 대중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자기와의 대화'로 여겼다고 했다. "쇼팽은 큰 홀에서 연주하는 것을 싫어했어요. 연주하는 그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조그마한 살롱 같은 곳에서 친구들 앞에서 자기 곡을 연주하고 진실한 대화를 나누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쇼팽 연주를 들은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가, 어떤 때는 그의 연주가 너무 조용해서 피아노 소리가 잘 들릴지 않을 정도였다고 했죠. 감동은 그런데 너무나도 컸다고 하더라고요."
 
백건우와 성향이 비슷하다. 여전히 영롱한 건반 터치를 자랑하는 백건우는 한결같이 나지막한 목소리와 온화한 표정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조곤조곤 전한다. 그럼에도 그런 말투가 자신의 연주처럼 청중을 놀랍게 빨아들이는 힘이 있다. 화를 내도 말투가 똑같다. 백건우는 "쇼팽 연주처럼, 조용하게 이야기를 해도 자신의 뜻을 강하게 전달할 수 있어요"라며 웃었다.

"쇼팽이 외로웠던 것은 사실이에요. 금전적으로 궁핍했고, 조국은 전쟁을 치르고 있고 인간으로서 쓰라림을 느꼈죠. 그것을 음악에 표현하는 것 같아요. 그러니 때로는 쇼팽도 소리를 지를 때가 있죠. 야상곡을 봐도 다 조용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것은 속에서부터 울분이 터지는 것을 느낄 수 있어요."

피아니스트 백건우, 쇼팽의 숨겨진 아름다움을 찾아봐요

앨범 내지에는 셰익스피어 '베니스의 상인' 속 문장인 '우리 여기 앉아서 귓전으로 스며드는 음악 소리 들어 보자. 고요한 밤에는 아름다운 화음을 내는 게 제격이야'라고 적혀 있다. "옛날부터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의 문장입니다. 야상곡과 잘 매치가 되는 말이에요. 훌륭한 몇 단어만 가지고 아름답고 풍부하게 표현한 셰익스피어 대단해요.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뜁니다. 훌륭한 예술가는 그런 힘이 있어요."

백건우는 훌륭한 연주는 미스 터치를 듣는 것이 아닌, 그 사람이 연주에 어떻게 묻어 있나를 듣는 것이라고 했다. 우크라이나 태생 피아니스트로 스승인 로지나 레빈(1880~1976)의 말을 되새겼다. "미스터치가 없는 음악회는 없어요. 인간이기 때문에, 늘 있게 마련이죠. 레빈 스승님은 학생들 레슨을 할 때 말씀 하세요. '무엇을 생각하고 있니' '생활이 어떠니'라고요. 좀 더 정확하게 그 사람의 연주를 이해하기 위해서죠."

백건우는 12일 마포아트센터를 시작으로 전국 투어 리사이틀 '백건우 & 쇼팽'을 돈다. 새 앨범에 실린 쇼팽의 녹턴 4, 5, 7, 10, 13, 16번뿐 아니라 즉흥곡 2번, 환상 폴로네이즈, 왈츠 1, 4, 11번, 그리고 발라드 1번을 연주한다. "쇼팽 발라드 1번은 열 몇살 때 치던 곡인데, 한참 후에 다시 그 곡을 제대로 쳐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이후 16일 군포문화예술회관, 17일 여주 세종국악당, 19일 과천시민회관, 20일 광명시민회관, 22일 부산 금정문화회관, 4월10일 춘천문화예술회관, 12일 대구 봉산문화회관, 13일 아트센터 인천, 18일 음성문화예술회관, 20일 안산문화예술의전당 무대에 오른다. MBC TV 다큐멘터리로도 제작된 섬마을 콘서트를 비롯해 백건우는 유명 연주자들 중에서도 유독 지역에서 공연을 많이 하는 피아니스트로 알려졌다.

"제가 오래전부터 주장해온 것인데요. 문화는 모든 사람의 권리에요. 그것을 제공하는 것이 우리들의 의무죠. 문화생활을 한국 어느 곳에서든지 즐길 수 있는 걸 꿈 꿔요."

피아니스트 백건우, 쇼팽의 숨겨진 아름다움을 찾아봐요

어느덧 일흔네살. 만 9세 때 국립 교향악단과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을 협연한지 64년, 1961년 뉴욕으로 옮겨 본격적으로 음악을 시작한지 59년이 지났다.

'건반위의 구도자'로 통하는 백건우는 "곡을 작곡했다고 끝이 아니고, 연주를 했다고 해서 끝이 아니고, 들었다고 해서 끝은 아니죠. 생명체가 살아서 움직이는 것과 마찬가지라, 항상 존재하고 변하고 새롭죠. 그것이 음악"이라고 한다. 일부에서는 클래식이 위기라고 하지만 백건우는 "당신네들이 만든 것 중 가장 훌륭한 것이 이것인데 왜 걱정을 하느냐"고 반문한다. "몇 세기를 걸쳐 살아 왔잖아요. 이 음악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훌륭합니다."

백건우는 4월2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아르망 티그라니얀이 지휘봉을 드는 러시아 국립 스베틀라노프 심포니와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협연한다. 서울 공연 전 29일 안동문화예술의전당, 30일 경기도문화의전당 무대에도 오른다.

"전날 차이콥스키를 다시 치면서 기분이 좋았던 것은 그 곡이 또 새롭게 다가와서였어요. 몇십년을 대하는데 새로운 것이 보인 거죠. 그것이 행복이라고 느꼈어요.

여전히 건반 위에서 구도 중인 백건우는 "앞으로 연주도 연주지만 음반 작업을 더 하고 싶어요“라면서 ”제 나름대로 전달하고 싶은 것을 정성껏 준비해 하나씩 하나씩 해나가고 싶어요"라며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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